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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8 왕관을 위하여
피식, 하고 웃으며 세레스티아가 말했다.
“그것이야말로 4문명의 결정체라고 말이야.”
“4문명의 결정체라…….”
어떤 문명이 지성을 깨우치고 문명을 꽃피우면 제 1문명이 시작된다. 사실 명확한 기준은 모르겠다. 불의 발견이 그 기준이라 말하는 이들도 있고 사실 더 근본적인 기준은 행성 에너지 이용이라는 사람도 있는데 확실한 가설은 아니니까.
어쨌든 그렇게 발전한 지성체들이 자신의 행성 전체, 혹은 대부분을 장악하는 정보망과 네트워크를 완성하면 제 2문명에 들어선다. 지구의 경우에는 인터넷과 전파의 발견이 바로 그것.
그리고 이어 자신이 살고 있던 행성에서 벗어나 다른 항성, 다른 은하로 넘어가는 게 가능해지는 시점에서 그들은 제 3문명에 들어서게 된다. 내 고향인 34지구의 경우 간신히 지구나 벗어나 달이나 가는 정도이니 아직 3문명에 들어서지 못한, 한 2문명 막바지 정도 되는 수준이라 할 수 있겠지.
그리고 4문명은…….
“아, 참고로 말하자면 우리 레온하르트 제국은 아직 3문명이야.”
“흠? 그럼 이렇게 선물을 줄 게 아니라 가져가서 연구하는 게 좋지 않아? 다음 문명으로 넘어갈 수 있는 기술적 단서가 될지도 모르는데.”
내 말에 세레스티아가 고개를 흔든다.
“바보야. 문명 레벨을 그렇게 쉽게 넘길 수 있으면 누가 걱정을 하겠어? 그건 중세시대 인물이 반도체를 얻으면 그걸 해석해서 뭔가 얻어낼 수 있다는 것과 똑같은 소리야.”
즉 충분한 인프라나 지식이 없다면 상위 문명의 물건을 얻어 봐야 별다른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한 단계의 문명 차이는 고작 100~200년 수준이 아니기 때문에 단서를 얻어봐야 해석이 불가능하며, 그렇기에 이렇게 결과물을 이용하는 것만이 가능하다는 뜻.
기이잉---
귀를 기울여 보니 작은 기동음이 들린다. 감촉은 통짜 쇠로 만들어진 리볼버였지만, 아무래도 그 내부는 꽤나 복잡한 모양이다.
“저기, 황녀님. 쉐도우 스토커를 쓸 수 있다는 건.”
“흠… 그런 건 아냐. 하지만 기밀이니 묻지 말아줄래?”
“알겠습니다.”
더 따지지 않고 꾸벅 고개를 숙이는 다이애나의 모습에 묻는다.
“뭐야, 이거 아무나 못 쓰는 거야?”
“황제 폐하께 드린 선물이었으니 당연하지. 황족이 아니면 사용할 수 없어.”
“그렇군.”
별다른 감흥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정보와 문명의 신, 이라는 신위에서의 문명이 [기계문명] 혹은 [과학문명] 그 문명 위에 성립된 존재들은 나를 거스르기 어렵다는 점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학과 마학의 합작품인 기가스들도 그러는데 순수한 기계라면 더 말할 것도 없지.’
간단히 수긍하며 쉐도우 스토커를 살핀다.
[토르 공방]
[다재다능 쉐도우 스토커]
‘무슨 사람 같은 칭호네.’
신기해하며 쉐도우 스토커의 칭호를 살피니 쉐도우 스토커의 사용법이 자연스럽게 머리로 스며들었다.
“음.”
“어? 왜 그래. 문제라도 있어?”
“아냐. 이거 꽤 느낌이 좋은데?”
나는 세피라는 녀석이 소품 삼아 내 팔에 채 놓았던 고급 시계를 벗어버리고 거기에 쉐도우 스토커를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그러자.
위이잉- 철컥!
한순간 쉐도우 스토커가 빠르게 재조립되더니 순식간에 근사한 디자인의 금속 시계로 변해 손목을 차지한다. 검은색 광택이 흘러 꽤 고급스러워 보이는 모습이다.
“오, 무슨 트랜스포머같다.”
“뭐야, 그건.”
“어라? 여기에는 그거 없어? 아니면 너무 고전 영화라 잊혀진 건가.”
장난스러운 내 말과 다르게 다이애나의 표정은 심각하다. 약간 혼란해 보이기까지 하다.
“…황녀님.”
“묻지 말랬지?”
가볍게 고개를 흔들어 다이애나의 입을 다물게 한 세레스티아가 나를 바라본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이제 가자.”
“사용법에 대한 설명은 괜찮아?”
약간 눈치를 살피는 그녀의 모습에 웃는다.
“뻔히 알면서 묻기는. 선물 고마워.”
“별말씀을. 아, 이제 진짜 시간 없다. 금방 옷 갈아입을 테니까 잠깐 앉아 있어.”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려 방을 나간다. 다이애나도 그녀의 뒤를 따르고, 어느새 방에는 나 혼자 남았다.
그리고 그때였다.
지직--
“음?”
허공이 일렁이는가 싶더니 양팔을 훤히 드러낸 판금갑옷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낸다. 치렁치렁 늘어뜨린 회색 머리칼과 선이 굵은 미남형의 얼굴은 나에게 매우 익숙하다.
“아레스?”
[오! 성공했어!]
언뜻 험악해 보이는 아레스의 얼굴이 환해진다. 그러나 그 직후 깜짝 놀란 듯 표정을 수습하며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너 이 자식! 연락 한 번을 안 해?]
“뭐? 네가 스스로 위성궤도를 돌며 대기하고 있을 거라고 했잖아.”
[하지만 그래도 가끔 연락을 해야지! 황성의 방해 때문에 [시선]을 내려 보낼 수는 없지만 매개체가 있다면 이야기 정도는 할 수 있다고!]
“매개체라니… 아하.”
나는 왼팔을 들어 손목에 채워진 쉐도우 스토커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이건 단순한 병기가 아니라 통신기능 역시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뭐 어쨌든, 시간이 없으니 그 시계에 이야기 좀 해줘. 다행히 자아(自我)가 없는 단순 인공지능이니 자리를 낼 수 있겠다.]
서두르는 아레스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린다.
“자리를 낸다고? 그리고 무슨 이야기를 해달라는 건데?”
[별거 없어. 방어를 열라고 그래.]
아레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녀석이 나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할 리는 없었다.
“방어를 열어라, 쉐도우 스토커.”
팟!
순간 내 앞에 서 있던 아레스의 [시선]이 사라진다. 그러나 그렇다고 조용해진 건 아니다.
[좋아! 성공이군.]
“뭐야, 만병지왕이야?”
[말하자면 그렇지.]
신기하게도 내 [내부]에서 아레스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건 지금까지 들어온 영언(靈言)과는 느낌이 좀 달랐다. 마치 어떤 신호가, 내 뼈를 타고 올라와 뇌에 직접 전해지는 느낌이다.
[오, 사이즈도 작은 주제에 기능이 꽤 많군. 페어링 기능도 있는데……. 좋아, 우자트도 인식된다.]
잠시 아레스가 혼자 중얼중얼 하더니 내 시야에 아레스가 떠오른다.
“오, 이건 뭐야. 안경으로만 비치는구나.”
세레스티아의 팬들이 뿜어내는 살기 때문에 깨졌지만 자가복구 기능으로 원래 모습을 되찾은 우자트를 썼다 벗었다 하면서 아레스의 모습을 살핀다. 아레스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다.
[좋아, 이거라면 황족들이나 감시체계에 들키지 않고 완벽한 통신이 가능하다.]
‘나는 이렇게 말하면 되고?’
가만히 마음속으로 말하자 아레스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러면 되지. 그리고.]
딸깍.
아레스가 뭔가 주절주절 더 떠들려고 시동을 거는데 방문이 열린다. 세레스티아인가 했는데 들어온 것은 노란색 머리칼에 작업복을 입고 있는 작은 체구의 소녀였다. 아까 내 머리를 만져 주었을 때와 같은 작업복이다.
“마지막으로 스타일 체크 하러 왔어요.”
“아, 고마워. 이름이 레미였지.”
“네, 앉으세요.”
화사하게 웃던 아까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다. 약간은 딱딱하고 사무적인 분위기로 내 모습을 꼼꼼히 살피더니 머리를 정리하는 레미. 나는 잠시 그녀에게 머리를 맡긴 채 눈을 감고 있다가 벗어놓은 고급 시계를 넘겨주었다.
“마침 잘 왔어. 이거 다시 가져가 줄래?”
“어려울 것 없죠. 그런데 새로운 시계라니…….”
“셀이 선물이라며 주더라고.”
별로 특이할 것도 없는 말이었는데 내 머리를 정리하던 레미의 손길이 우뚝 멈춘다.
“뭐야, 다 한 거야?”
“너… 후우. 후우.”
깊은 심호흡 소리에 의아해한다. 뭐야, 선물 좀 받았다는 게 그렇게 충격적인 일인가?
그러나 내가 뭔가 더 묻기 전에 레미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착각하지 마.”
“음?”
서늘한 목소리에 의문을 표한다. 여전히 머리에 가위가 닿아 있어 돌아보기 애매한 상태에서 레미가 말한다.
“지금은… 단지 필요에 의한 상황일 뿐이야. 황녀님은.”
뭔가를 꾹. 참으며 서서히 풀어내는 느낌으로 레미가 말했다.
“황녀님은 너를 사랑하지 않아.”
뚝뚝 끊어지는 목소리에는 원망까지 담겨 있다. 나는 순간 그녀가 왜 이렇게까지 감정을 드러내는지 궁금했지만, 굳이 그걸 알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당연한 소리를.”
순간적으로 웃음이 나온다.
세레스티아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무슨 비밀을 말해주듯 그녀의 태도가 불쾌하다기 보다 신기하다. 설마 내가 그렇게까지 멍청해 보인단 말인가?
‘사랑은 무슨.’
세레스티아는 단 한 번도 나를 [그런] 눈으로 본 적이 없다. 처음 만났을 때도, 점점 친해져 갈 때에도, 그리고 무엇보다 함께 고난을 헤치고 나오던 그 순간에까지도 그랬다.
그녀는 물론 나를 좋아한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그녀가 나에게 가지는 호감은 절대 이성을 향한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죽어도 이루겠다는 각오를 세우고 치열하게 살았는데… 이런 허탈한 결말이라니.
이미 [사라져 버린 시간]에서의 그녀를 떠올린다. 아담이 나타나 황성을 포함한 골든 로즈의 절반 이상을 파괴하고 그 안에 있는 초월자들을 학살하던 때 그녀가 보였던 그 복잡한 시선.
나는 그녀의 그 어떤 상황도 모른다. 그녀의 성장 과정이 어떤지, 어째서 [황녀]라는 직위에도 불구하고 배경이 없는지, 어째서 [아이돌]이라는 황녀답지 않은 일을 해서라도 황실에서 탈출해야 했는지.
그리고 왜 스스로 군대에 들어가 전쟁터를 뒹굴었는지.
‘그러고 보면 정말 아는 게 하나도 없군.’
어쩌면 당연하다. 나 스스로가 그것들을 알고 싶어 하지 않았으니까. 칭호를 볼 수 있는 나라면… 시간이 충분하다는 전제하에 그 모든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을 텐데도 그러지 않았던 것이다.
“당연한… 소리?”
“그래. 아마 이야기를 듣게 되겠지만… 나는 잠시 그녀와 계약을 맺은 것뿐이니 일이 정리가 되면 그녀와 헤어질 거야. 어차피 서로 사랑의 감정도 없으니까.”
“서로? 서로 없다고?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순간 그녀의 목소리에 분노가 실려 어리둥절한 기분이 되었지만 고개를 끄덕인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어차피 머리를 더 만질 것 같지도 않아 몸을 일으켰다.
“빚이 있어서 잠시 돕는 것이니 너무 민감하게 생각하지 마. 나는…….”
“웃기지마!”
“……?”
난데없는 고함에 고개를 돌려보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레미가 나를 쏘아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녀와 결혼하면서? 어떻게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어! 그녀는… 황녀님은!”
“…레미.”
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고함을 지르던 레미가 얼어붙은 것처럼 멈춘다. 그녀의 뒤에는 소리 없이 다가온 세레스티아가 있었다.
“근신하고 있어.”
“황녀님, 저, 저는.”
“한동안 널 보고 싶지 않다.”
“…….”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으로 잠시 멍하니 있다가, 간신히 몸을 움직여 방을 빠져나간다. 세레스티아가 말했다.
“미안해.”
“그래, 미안해야지. 결혼을 하면서 여자 문제를 정리 안 하다니.”
“그건… 미안. 설마 제일 얌전하던 레미가 이럴 줄이야. 뭐라 할 말이 없어.”
연신 고개를 숙이는 그녀의 모습에 고개를 흔들었다.
“팬들 시선이 수십 배는 더 무서웠으니 됐어. 귀여운 여자한테 원망 받는 건 좀 슬프지만 어쩔 수 없지.”
“으으, 미안. 녀석들이 워낙에.”
삐빅!
거기까지 말했을 때 문득 기계음이 울린다. 세레스티아가 표정을 굳혔다.
“슬슬 나가야 해.”
“그래. 다른 황족들 얼굴이나 보러 가볼까.”
굳이 방금 전의 화제를 더 길게 이어가고 싶지 않았기에 고개를 끄덕인다. 무기를 가지게 되어서일까? 불안하던 초반에 비해 심적으로 많이 안정되어 있는 상태. 나는 손을 내밀었고 단정한 디자인의 흑색 드레스로 우아하게 치장한 세레스티아가 자연스레 그 손을 잡는다.
“하지만 조심해. 아까 보고서를 볼 때도 그랬지만.”
천천히 걸으며 그녀가 말했다.
“이건 다른 방식의 전쟁이니까.”
대회의실로 나아간다.
우리가 겪어야만 할, 새로운 전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