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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머리 위에-97화 (97/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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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8 왕관을 위하여

레온하르트 제국은 절대군주제다.

지구보다 훨씬 더 발전된, 그러니까 미래 세계나 다름없는 레온하르트 제국이 절대군주제라는 사실이 좀 이상하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아무래도 우주에서는 종종 존재하는 방식인 모양이다.

“물론 중세 지구 따위랑은 상황이 달라. 귀족이 아니라 하더라도 자유와 평등은 충분히 누리고 살고 귀족이나 황족이라고 하위 계급을 깔아뭉갤 권리는 없으니까. 무엇보다 모든 계급은 철저한 혈통주의인 동시에… 능력주의야.”

“…어떻게 혈통주의랑 능력주의가 공존할 수 있어?”

“그야 혈통이 능력을 가지니까.”

그리고 황족은 그 정점에 위치한다. 상급 신중에서도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황금사자신의 힘을 이은 그들은 빼어난 외모와 높은 지능, 강건한 육신, 그리고 드높은 영력과 권능을 가지고 태어나 레온하르트 제국을 이끌 존재로 키워진다.

“내가 이런 말을 할 처지는 아니지만… 불공평하군.”

혈통의 힘을 타고나 태어날 때부터 지도자의 운명을 가진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지구보다 훨씬 발전된 사회인만큼 시민의식도 훨씬 더 깨어 있을 텐데 태어날 때부터 자신들과 다른 이 불합리한 계층을 용납한단 말인가? 초월자라거나 하는 이들이야 문자 그대로 초월한 존재라지만, 이런 특별한 계층은 그냥 그 피를 가지고 태어났을 뿐인데 지도자가 되다니.

그러나 세레스티아는 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이다.

“세상은 원래 불공평해, 바보야. 설마 너희 34지구는 모든 인류가 같은 선에서 시작해서 노력으로만 결정되는 삶을 산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

반박할 수 없다. 물론 지구에는 귀족도 황족도 존재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평등한 삶을 살아가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운명이 갈린다. 태어나는 나라에 따라 갈리고 자신의 부모가 누구냐에 따라 또 갈린다. 민주주의 사회에 계층 따위는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일용직 노동자의 자식과 대기업 회장의 자식을 같은 계층이고 평등한 관계라고 말하는 것은 기만이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지만 애초에 레온하르트 제국은 초대 황제 폐하가 없었으면 성립조차 될 수 없는 국가야. 고작 300년밖에 지나지 않은데다 제대로 기록된 역사이기 때문에 국민들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지. 비록 이렇게.”

“엉망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래.”

타닥, 타다닥.

나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쉴 새 없이 타자를 치고 있다. 그녀의 앞에 떠 있는 온갖 자료를 정리하고 내용을 파악한 뒤 서류를 결재하고 담당 부서에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생각한 것보다 평화롭단 말이지.”

나는 황제가 죽었다는 사실에 최악의 상황을 상상했다. 세레스티아와 나의 결혼을 황제에게 인정받은 지 고작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그가 죽었으니 세레스티아가 세웠던 순탄한 계획이 모조리 어그러졌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서 당장 세레스티아의 본거지인 [별빛]에 미사일이 날아왔어도 별로 놀라지 않았을 정도였는데 뜻밖에도 외부에서의 그 어떤 공격도 없다.

“지금까지 몇 명의 황제가 죽었는지 벌써 잊었어? 황제가 죽는 상황에 대한 시스템은 벌써 100년 전부터 마련되어 있었어.”

“…애초에 황제가 죽는 걸 감안하고 짜놓은 시스템이 있다고?”

“그래. 다만 솔직히 지금 상황은 나도 상상 못 했어. 지금까지의 황제들과 다르게 아버지는 황권을 완전히 휘어잡았다고 생각했… 다이애나! 레논 제약에 대한 개별 조사는 없어?”

설명하다 말고 고개를 돌리자 그녀의 옆에서 홀로그램 창을 띄워 여러 자료를 검토하고 있던 다이애나가 고개를 흔들었다.

“레논 제약이 저희 [별빛]에 소속된 기업이라고는 하나 자금을 지원하던 정도에 불과하기에 제대로 된 감시 체계는 되어 있지 않습니다.”

“감찰부는?”

“완벽한 신뢰가 불가능합니다. 이미 황태자의 영향력이 너무나 크니까요.”

“역시 그런가…”

고민에 빠진 그녀의 모습에 묻는다.

“뭔가 문제라도 있는 거야? 아니, 그보다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유산 방어.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내 앞으로 책정된 유산이 발생했어. 황궁으로 걸어 들어가기 전에 그것들을 다 추스르고 들어가야 해.”

“누가 황제를 해쳤는지부터 알아봐야 하는 거 아냐?”

내 질문에 세레스티아의 옆에 서 있던 다이애나가 설명했다.

“보고와 원로원의 발표에 따르면 출처 미상의 영자 폭탄이 터지면서 폐하가 기거하고 있던 황궁이 통째로 날아갔다고 합니다. 범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용의자에는 대부분의 황족이 다 들어가죠.”

“뭐? 그럼 설마.”

“그래. 나는 유산 상속인인 동시에 용의자이기도 해. 오늘 저녁에 만나러 갈 황족들이 다 그렇고.”

설명하면서도 눈앞에 떠 있는 자료들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나는 그중 하나를 가리켰다.

“아, 방금 넘긴 페이지에서 스물다섯 번째 문단 함정 조항이다.”

“뭐?”

한참 페이지를 넘기던 세레스티아가 깜짝 놀라 페이지를 앞으로 넘겼다. 그녀는 나에게 ‘뭐가 함정이라는 거야?’라고 묻는 대신 내가 말한 부분을 침착하게 읽고 또 읽었다.

“알레이나, 부다 건설의 평균 이익률이 얼마나 되지?”

“4.87%입니다. 플랜트가 5.36%, 에너지가 5.25%, 토목이 5.10%로 상대적으로 높은 이익률을 보였고 건축은 3%이하죠.”

“그래, 그럼… 아! 그렇구나! 이 망할 놈들이 자재 값 상승하고 영업비용을 전혀 감안하지 않았어! 이 자료대로라면 1~3%씩 이익률이 떨어지고, 특히 투자 개발형 사업하고 민자 사업은 외형상 수익률이 0.43%랑 0%잖아? 장사가 잘되는 거랑 별개로 공사를 할수록 손해야! 특히 테라포밍 같은 걸 한번 진행하면 적자가 어마어마해!”

‘…와.’

먼지만큼의 힌트를 줬을 뿐인데도 순식간에 답을 찾아내는 세레스티아의 모습에 혀를 내두른다.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의 아이돌이지만 막상 실무에 들어가니 무서울 정도로 유능했다. 지금도 너무 단시간 내에 과도한 일을 몰아 해야 했기 때문에 놓친 것이지 시간에 여유가 있었다면 스스로도 찾아낼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될 정도다.

“대하! 더, 이런 오류 더 없었어?”

“지금까지는 자세히 보지 못해서… 오른쪽 벽에 전부 띄워줄래?”

“다이애나.”

“예?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이 녀석이 내 남편감이라는 걸 벌써 잊었어? 시간 없으니 빨리 띄워!”

세레스티아의 닦달을 이겨내지 못한 다이애나가 패드를 조작하자 오른쪽 화면이 훅 하고 어두워지더니 그 위로 수십 장의 문서가 떠오른다.

내가 문서들을 읽기 시작하자 세레스티아 역시 자기가 살펴보던 서류로 돌아간다. 내가 문서들을 체크하는 동안 남은 작업을 더 하려던 모양이지만, 애초에 지금 이 작업이 그리 길게 이어질 이유가 없다.

그냥 슥 훑어보면 끝이다.

“2번, 7번, 11번, 23번, 40번. 그리고… 52번. 세 개는 악의적인 장난질이고 두 개는 자료를 좀 빼먹었어. 마지막은 좀 이상한데? 오히려 너한테 과할 정도로 이득이야.”

당연한 말이지만 서류나 계약서에 담긴 내용이 뭔지 정확하게 파악하지는 못했다. 내가 무슨 기업의 오너 같은 것도 아닌데 이런 우주적인 규모의 사업의 보고서나 계약서, 그리고 재무표 따위를 읽을 줄 알 리가 없으니까.

그러나 나는 칭호를 볼 수 있다.

예전 옆집 아주머니가 버렸던 쓰레기의 칭호를 본 것처럼, 기가스들의 칭호와 인공지능의 칭호를 본 것처럼 나는 사물의 칭호 역시 확인하는 게 가능하다.

즉, 뭔가 [문제]가 있는 서류나 문서라면 나는 그걸 보는 순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와, 대하 너 취직 안 할래, 취직?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내가 회사 몇 개 줄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시고 마무리나 해, 마무리나. 시간 없다면서.”

내 말에 ‘핫’ 하는 소리를 내더니 내가 골라낸 문서들을 확인한다. 옆에 서 있는 다이애나가 어리둥절해하는 것과 다르게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태도다.

‘역시 이 녀석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군.’

세레스티아는 내가 신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상태에서 나를 만나기 위해 알바트로스함에 찾아왔던 하와를 만났다.

사실 정보가 이 정도 주어졌으면 정답에 근접한 추론을 해내는 게 오히려 당연하다. 무엇보다 그녀는 내가 [명령]하는 모습을 직접 보지 않았던가?

‘기계신(機械神) 디카르마(Dekarma).’

정보와 문명의 신이라는 어마무지한 신위가 아니더라도 그는 여전히 최상급 신이며 한때 강대한 힘과 권능으로 전 우주를 두려움에 떨게 하던 존재다. 연합의 대적인 리전의 수호신이던 그의 혈통이라면, 사실 어떤 권능을 가지고 있어도 이상할 게 없다. 오히려 지금 내 힘이 너무 약한 편이라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아무래도 심각하긴 한데. 이쯤 되면 거의 공격이야. 이런 것들을 가신이라고 부를 수 있어?”

“황법에 따른 가신일 뿐 실제로 승복하고 있지 않으니 어쩔 수 없어.”

황족과 귀족이 존재한다고 귀족들이 무슨 영지를 가지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제국을 소유하는 것은 오직 황제뿐이고 그 아래의 황족들과 귀족들이 가지는 것은 영토가 아니라 기업, 부동산, 지적재산권 등이었던 것이다.

“즉 귀족이라는 건 일종의… 재벌 가문이로군?”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그렇지. 그리고 황족들은 해당 가문이나 기업 중 일부의 주인이 되는 방식이고.”

그런데 황제가 죽으면서 세레스티아 앞으로 발생된 유산이라 할 수 있는 기업들이 딴마음을 먹었다는 뜻이다. 세레스티아가 막대한 재산과 부를 얻어 그녀의 영향력이 더욱 강해지는 것을 막고 싶은 다른 황족들이 손을 쓴 것이다.

“황녀님. 슬슬 시간입니다.”

“벌써? 뭐, 다행히 대충 정리되었으니… 준비해 줘. 아차, 총의 봉인을 풀었지?”

“예.

“가져다줄래?”

“잠시만.”

세레스티아의 말에 알레이나가 방을 나선다. 나는 전혀 뜬금없는 단어의 등장에 의아해했다.

“총?”

“덕분에 시간에 여유가 생긴 것도 겸해서 선물이야.”

그녀의 말과 함께 방을 나섰던 알레이나가 신발가계에서 흔히 봐왔던 사이즈의 상자를 들고 왔다. 다만 재질은 나무였고 꽤나 고급스럽게 장식되어 있다.

딸깍.

딱히 사양할 필요가 없던 만큼 망설임 없이 열어준다. 상자 안에는 전체적으로 심플한 디자인의 검은색 권총이 놓여 있었다.

“…리볼버?”

황당해한다. 아니, 대우주 시대에 이 무슨 시대착오적인 디자인이란 말인가? 세레스티아는 그런 내 반응을 짐작한 듯 웃으며 말했다.

“이름은 쉐도우 스토커. 그렇게 보여도 첨단 병기야. 캔딜러 성인들이 황제 폐하께 드렸던 선물 중 하나지.”

“허, 이게 첨단 병기라니.”

상자 안에 있던 검은색의 권총, 쉐도우 스토커를 잡아 든다. 순간 상자를 들고 있던 알레이나가 움찔하는 게 느껴진다.

세레스티아가 설명했다.

“원래는 내가 쓰려고 받았지만 아무래도 맞지 않아 봉인했던 물건이야. 나는 마탄술(魔彈術)을 연마해서 마총 계열이 아니면 힘을 발휘하기 힘들거든.”

“마총이 아니면 이건 뭔데?”

“그야 당연히 순수한 과학기술로 만들어진 물건이지. 황제 폐하께 이걸 선물한 캔딜러 성인이 그랬다더라고.”

피식, 하고 웃으며 세레스티아가 말했다.

“그것이야말로 4문명의 결정체라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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