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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장 황성으로
‘뭐야, 이것들. 호위하라고 우주로 보낸 거 아니었어? 왠지 해외 유학 느낌이…….’
물론 정확히 말하자면 해외(海外) 유학이 아니라 외계(外界) 유학이긴 하지만 뭐 어쨌든 간에 말이다.
내가 그렇게 투덜거리는 사이 세레스티아가 고개를 돌려 말한다.
“레미, 이 둘을 숙소로 안내해 줘.”
“예, 황녀님.”
착륙장에 기다리고 있던 5명의 여인 중 하나가 정중히 고개를 숙이더니 보람과 동민을 데리고 사라진다.
“오랜만입니다, 황녀님.”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이에요!”
“으으, 그놈의 군 생활 좀 그만하시면 안 돼요? 전쟁터에 뛰어들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심장이 터져서 죽어버릴 것 같아요!”
보람과 동민이 사라지자 차분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던 네 명의 여인이 우와왕~ 하며 세레스티아에게 달려들었다. 세레스티아는 호탕하게 웃으며 그녀들을 하나하나 안아주었다,
“하하하, 다들 잘 지냈어?”
“물론이죠. 별빛의 영역에서 나갈 생각도 안 하는데 누가 뭘 어쩌겠어요?”
“무엇보다 황녀님이 없으면 그분들도 저희 따위는 건들 생각조차 안 해요. 아무래도 민감한 시기니 황제 폐하의 눈 밖에 나고 싶어 하는 이도 없었고요.”
상당히 친근한 사이인 듯 반가운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그리고 그런 그녀들을 향해 세레스티아가 말했다.
“이 녀석이야. 이름은 관대하.”
너무나 간결한 소개에 네 쌍의, 아니, 어느새 보람과 동민을 안내하고 돌아온 레미라는 여인까지 합쳐 다섯 쌍의 눈이 나를 응시한다.
잠시 모두가 눈의 대화를 하더니, 그중 가장 훤칠하게 키가 큰 검은 정장의 여인이 앞으로 나선다.
나이는 20대 중반, 아니, 후반 정도일까. 세레스티아에 비하면 물론 빛이 바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몹시 화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는 여인이다. 다만 옷차림만은 매우 심플해서 [단정]이라는 단어에 자신을 완벽하게 맞춰낸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처음 뵙겠습니다, 관대하님. 제 이름은 다이애나고 왼쪽부터 레미, 델리, 로이나, 세피입니다. 여기 있는 우리들은 지금부터 당신을 담당할 스태프죠.”
“스태프?”
“원래는 내 매니저 겸 코디네이터야.”
세레스티아의 말에 다이애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 일도 병행하고 있습니다만 지금부터는 당신을 황녀님과 나란히 세웠을 때 어떻게 보일지에 대해서 조정하는 것이 주 업무가 되겠지요. 그래서 말인데 그 대충 깎은 머리카락은 용서할 수가 없군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리자 노란색 머리칼의 소녀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에게 다가온다. 기본적으로 귀여움이 넘치는 아이돌에 가까운 외모였으나 입고 있는 것은 십수 개의 주머니가 주렁주렁 달린 작업복이다. 거기에는 온갖 종류의 가위와 빗, 그리고 여러 색의 약품이 담긴 약통들이 들어 있었는데 모두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레미라고 합니다. 헤어스타일을 관리해요. 잠시 조정을 좀 해야 하니 가만히 계셔주실 수 있나요?”
“아, 으응.”
“감사합니다~!”
화사하게 웃으며 양손을 움직인다. 그리고 그러자.
키리링!
그녀의 작업복에 달려 있던 가위를 포함한 요상한 도구들이 벌 떼가 날아오르듯 솟구쳐 순식간에 내 머리를 자르고 감으며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델리라고 합니다. 의상을 손봐드리겠습니다.”
“로이나입니다. 메이크업을 해드릴게요.”
“세피입니다. 잠시 소품을 착용시켜 볼 테니 가만히 계세요.”
얼굴에 뭐가 끼얹어지더니 내 몸을 뒤덮고 있던 옷이 살아 있는 듯 꿈틀거린다. 어느새 신발은 벗겨지고 없고 온갖 시계와 목걸이 등이 걸렸다 사라졌다를 반복한다.
“이, 이게 뭐야?”
“후후, 포기해. 나도 무대 나갈 때마다 너랑 똑같은 처지니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황당하게도 내 앞에 있는 여인들은 자신의 이능을 미용 쪽으로 특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그 경지가 상당할 정도라니. 아무리 이능이 일상인 대우주라지만 이건 좀 너무하는 거 아닌가?
‘그나저나.’
농락이라고는 했지만 완벽한 제어하에 움직이고 있는 그녀들이었던 만큼 나는 별문제 없이 몸을 맡긴 채 그녀들을 관찰할 수 있었다. 최근 들어 칭호를 보는 능력이 발전해서 자연스럽게 그녀들의 [감정] 상태가 보인다.
“흠, 여기서 이런 말하기도 좀 그렇지만.”
그리고 그렇기에 나는 그녀들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다들 화났어?”
키긱!
순간 허공을 휘몰아치던 가위의 궤도가 크게 흔들리는 바람에 하마터면 커다란 땜빵이 생길 뻔했지만 다시금 발동된 염동력이 마치 실드처럼 내 육신을 보호한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말 그대로지. 다들 엄청 화가 났는데.”
“그게 무슨… 아닙니다.”
“맞는데.”
“아닙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겁니까?”
납득할 수 없다는 반응에 어깨를 으쓱인다. 고개를 돌려보자 악동처럼 웃고 있는 세레스티아의 모습이 보인다.
“이 녀석들이 그렇게 화났어?”
“응. 날 완전 찢어 죽일 기세인데.”
짜증 난, 화난, 몹시 화난, 원망함, 살의 충전… 그런 칭호들이 보인다. 특히나 세 보이는 살의 충전은 다이애나의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 모든 감정을 완전히 숨기고 있다는 점이 대단하다. 칭호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녀들의 상태를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으리라.
“흠, 내가 논의도 없이 남편감을 데려왔기 때문일까?”
“좀 억울한데. 그러면 당연히 원망의 대상은 너 아냐?”
장난스러운 대화에 다이애나가 한숨 쉰다.
“…그렇게 느끼셨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 뭐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야. 아무래도 내가 세레스티아에게 별로 안 어울려 보이겠지?”
“그런 문제는 아닙니다. 어차피 황녀님과 어울리는 남자는 세상에 없으니까요.”
“오.”
작게 휘파람을 분다. 왜냐하면 지금 그녀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타인을 대상으로 이렇게 대책 없는 애정을 품을 수 있다니.’
약간 황당했지만 세레스티아의 매력과 미모를 생각해 보면 이해 못할 바도 아니었기에 고개를 끄덕인다. 다만 세레스티아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다이애나를 보며 투덜거린다.
“으이그, 너… 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 마.”
“죄송합니다.”
“음?”
잠시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부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쓸데없는 소리라니, 설마 그녀 스스로도 자신과 어울리는 남자가 세상에 없다고 생각한단 말인가?
“다 됐습니다.”
잠시 잡념을 떠올리는 사이 치장이 마무리된다. 다이애나가 허공에 손을 문지르듯 움직이자 허공이 잠시 일렁거리더니 내 모습을 비춘다.
“…오.”
놀라 말을 멈춘다. 거기에는 놀랄 정도로 말쑥한 내 모습이 있었다. 무슨 뷰티 프로그램 같은 곳이었다면 ‘이게 나……?’ 하면서 호들갑을 떨 정도로 외양이 달라져 있었던 것이다.
피부톤은 무슨 사진 보정 프로그램으로 손본 것처럼 밝아져 잡티 하나 보이지 않고, 그리 길지 않은 머리칼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약간 어색하던 정장은 몸에 착 달라붙는 슈트가 되어 근사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팔목에는 척 봐도 보통 물건이 아닌 걸로 파악되는 시계가 채워져 있다. 더불어 어느새 신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편한 착용감을 가진 구두까지.
그러나 그렇게 나를 코디 해 준 여인들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역시…….”
“역시 뭐?”
뭔가 미묘한 분위기에 반문하자 세레스티아가 웃으며 답한다.
“꾸며 봤자 볼품없다는 소리지 뭐.”
“은근히 심한 소리 하네 이게…….”
그러나 아무리 기분 나쁘다 해도 그것이 현실이다. 네 여인의 코디로 내 모습은 꽤나 그럴싸해졌지만, 아무리 그럴싸해져 봐야 세레스티아와 어울리는 모습이 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태양 옆의 반딧불이나 태양 옆의 가로등이나 안 보이는 건 매한가지니 이렇게 꾸미는 정도로는 한계가 있는 상황.
하지만 세레스티아는 걱정 말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키랑 체격은 충분하니 상관없어. 귀족이나 황족을 만날 때라면 모를까 어차피 촬영 때는 원판을 드러낼 생각이 없으니까.”
“원판을 드러낼 생각이 없다고?”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에 의아해하자 세레스티아가 잠시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자, 그럼 다들 나가서 할 일을 해주겠어? 다이애나만 따라오고.”
“네 황녀님.”
네 명의 여인이 동시에 예를 표하고 방을 나서자 세레스티아는 더 안쪽에 있던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걸으며 말했다.
“평범하게 살 거라고 했잖아, 바보야. 전 우주에 얼굴 팔리고 그런 일이 가능할 것 같아?”
“그건… 확실히 그렇군.”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의 결혼은 일종의 계약 결혼이고 이미 이혼 서류도 작성한 상태이다. 결혼 후 3개월이 지나 이혼이 완료되면 나는 지구로 돌아가 대우주와 상관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구라고 외계와 전혀 상관없는 장소가 아니다. 실제로 관광 패키지로 놀러 왔던 세레스티아를 만난 장소도 바로 지구가 아니던가? 괜히 지나가던 외계인이 나를 알아보고 접근하면 여러모로 곤란하다.
“질문이 늦었지만… 뭐 하려고 이렇게 꾸며주는 거야?”
“방금 말했다시피 촬영 때문에 그래. 레온하르트 황족의 결혼은 절대로 가벼운 의미가 아니야. 인터뷰도 해야 하고 다른 황족들도 만나야 하지.”
“혹시 녀석들이 반대하고 깽판을 놓을 수도 있어?”
아무래도 세레스티아가 레온하르트 황실과 사이가 좋지 않은 느낌이었기에 걱정하자 세레스티아가 답한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냥 무시하면 돼. 솔직히 약간 걱정했지만… 아버지가 허락한 시점에서 모든 게 끝난 거나 다름없어. 이러니저러니 해도 레온하르트 제국은 절대군주제니 절차만 지키면 그 누구도 딴죽을 걸 수 없거든.”
천천히 걸어 인공적으로 꾸며진 정원을 지나치며 생각을 정리한다.
그녀와 한 ‘계약’의 내용은 매우 단순하다.
나와 그녀가 결혼을 한다. 3개월을 함께 산다. 그리고 그 후에 이혼한다.
이런 과정이 필요한 것은 레온하르트 제국의 황족이 태어날 때부터 황실에 예속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의 자유는 존재하지만, 최종적으로는 황실의 지시를 어길 수 없는 형태의 제약이 존재했던 것.
황족은 태어나고, 살아가고, 마침내 결혼하고 죽는 것까지 황실의 설계 아래에서 움직여야 한다.
때문에 별빛의 여왕이라는, [아이돌]로서의 영향력으로 황실의 설계에서 탈출하여 군 생활을 한 세레스티아는 더없이 이질적인 존재라고 한다. 황족들이 대체적으로 그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역시 이런 이유 때문이라던가.
그때 그녀가 청혼했을 때 나눴던 대화를 떠올린다.
‘그런데 거기에서 탈출할 방법이 딱 두 가지 있어.’
‘두 가지나?’
‘그래. 그중 하나는 초월지경에 오르는 것이고, 또 하나는.’
‘…결혼이군.’
‘그렇지. 당연하지만 아무나하고는 안 돼.’
즉 그녀가 나에게 청혼한 것은 나에게 깃든 신성의 존재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긴 눈치채지 못하는 게 이상하긴 했다. 초월지경은 커녕 별다른 이능도 습득하지 못한 내가 아레스에 탑승하여 절대적인 신위를 보였다.
그건 누가 봐도 신족으로서의 [권능]이다.
‘너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지우지 않을 거야. 잠깐만 결혼하고 이혼해서 나를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주기만 하면 돼. 그리고 그 후 황실에서 수여한 우주선이랑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금의환향하면 되는 거야! 이 정도면 완전 남는 장사 아냐?’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다. 남는 장사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그녀에게 빚을 진 상태였기에, 그녀의 말에 동의했었다.
“그럼 이틀 동안 인터뷰하고 귀족들을 만나고 삼 일 후 결혼식을 올리면 된다?”
“그렇지. 그리고 그 후 결혼 생활을 3개월만 유지해 주면 돼. 그럼 다 끝이야. 3개월이 넘으면 아무 말 안 하고 그냥 떠나도 돼.”
“…잠시, 잠시만. 황녀님. 지금 무슨 말씀이시죠? 떠난다니.”
그때 우리의 대화에 다이애나가 끼어든다. 나는 세레스티아를 바라보았다.
“괜찮아?”
“아, 물론이지. 믿을 수 있는 녀석이야.”
“하긴. 바로 아래 사람들한테까지 숨기고 일을 진행하기는 조금 어렵…….”
쿵!
그런데 그 순간 땅이 울렸다. 뭔가가 이 별빛이라는 빌딩과 충돌했다… 는 그런 느낌은 분명히 아니었다.
“뭐야, 이거. 느낌이 아주 먼데?”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알 수 없는 현상에 다이애나가 심각한 얼굴로 눈을 감는다. 뭔가 정신계열 능력을 가진 것인지 세레스티아 역시 차분한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맙소사.”
잠시 후 눈을 뜬 다이애나가 신음하는 모습에 세레스티아가 묻는다.
“무슨 일이야?”
“화, 황제… 황제 폐하께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덜덜 떨고 있다. 세레스티아의 표정이 굳는다.
“아버지가 뭐?”
“황제 폐하께서.”
거기까지 말하고 흡, 하고 심호흡한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녀가 말했다.
“…승하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