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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장 황성으로
당신의 머리 위에 93화
미움받아 본 적 있는가?
-드디어 만났군.
온 세상의 미움과 증오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물러서십시오, 여왕님!”
경고와 함께 어둑서니가 뛰쳐나간다. 그림자로 이루어진 그의 머리칼이 부풀어 올라 전신을 뒤덮더니 삽시간에 그 크기를 수십 배 이상 불린다.
[크르르르---!!]
그림자로 이루어진 거대한 용이 나타나 포효한다. 100미터는 되어 보이는 신장에 그 거대한 육체 전부를 실체화된 염(念)으로 둘러싼 그의 모습은 마치 살아 있는 재앙의 화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살벌하다.
사실 그림자용이라 하면 용종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존재 중 하나다. 그림자로 이루어진 육신을 가지고 있기에 물리적인 피해에 면역이나 다름없는데 그 그림자에 담겨 있는 강력한 사념의 힘으로 인해 악의적인 영력에 저항하는 힘마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번식률이 너무 낮아 전 우주에서도 그 숫자가 많지 않지만 정상적인 과정을 거쳐 성장한 그림자용은 성룡이 되는 것만으로 어지간한 고룡에 필적하는 능력을 가진다. 귀족을 넘어서 왕족에 가까운 종으로 용황족(Kaiser dragon)의 핵심 세력이라 할 만한 힘을 가진 존재.
그러나 상대가 너무 안 좋았다.
-까불지 마라, 버러지!
강철의 팔이 휘둘러지자 그것만으로 그림자로 이루어진 날개가 뜯어지고 그 단면에서 폭포수 같은 암흑의 정수가 쏟아져 나온다. 더욱 더 크게 몸을 키우고 있던 어둑서니는 단박에 쓰러져 바닥을 뒹굴었다.
그에게로부터 경악에 찬 고함 소리가 들린다.
[아담……!! 이렇게 전면에서 움직이다니 미쳤군! 드래고니안에서 이 일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선계나 신계의 신들 역시 마찬가지고!]
물질계에서 직접 활동하지는 않지만 노블레스나 엘로힘에도 언터쳐블을 뛰어넘는 최상위급 초월자들이 존재한다. 죽음을 불러온다는 죽음의 용, 크롬 크루어히(Crom Cruach)나 전대 용신(龍神)으로 현재에는 마법의 신의 자리를 차지한 염룡(炎龍) 카인, 혹은 세계(世界)의 화신(化身)이라 불리는 지저스 슈퍼스타(Jesus Superstar)나 깨달은 자 붓다(Buddha)등이 그들이다.
그들은 자연법칙과 명리를 초월해 물질계를 떠난 존재이지만 우주적인 재앙이 발생할 시 종종 그 모습을 보이곤 했다. 물질계에 얼마 남지 않은 최상위급 초월자가 어느 선을 넘는다면, 당연히 움직이겠지.
그러나 우주에 몇 남지 않은 최상급 초월자이자 우주를 지배하는 연합의 대적은 전신이 일그러질 정도로 기운을 폭발시키며 말했다.
-상관없어.
콰득! 하는 소리와 함께 그림자용의 몸이 터져 나간다. 우리 뒤쪽에 서 있던 현일이 대경해 우리 몸을 붙잡았다.
“물러서야… 컥?!”
새하얀 팔로 나와 세레스티아를 안았던 현일의 모습이 사라진다. 이어 쿵, 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 그가 우리 뒤편에 착륙해 있던 알바트로스함의 외벽에 박혀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내 파편을 헤치고 나오는 그였지만, 제대로 움직이기는 힘들어 보인다.
“도망가요! 변신!”
“제기… 랄!!”
보람과 동민이 아담의 앞을 가로막는다. 당연한 말이지만, 문자 그대로 자살행위였다.
콰득! 퍽!
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보람과 동민이 쓰러진다.
“안 돼! 도망쳐!”
“으아악!”
육신이 폭발하고 대지가 터져 나간다. 황성에 있는 온갖 기기가 뭉쳐 만들어진 걸로 파악되는 금속 손들이 휘둘러질 때마다 모든 것이 파괴된다. 심지어 그중 하나가 빛을 뿜어내자 저 뒤에 있던 황성의 절반 이상이 날아갔다. 황성에서 금빛 기운이 피어올라 그걸 막으려 했지만 역부족이다.
황실 안에서 대여섯 명의 초월자가 메뚜기처럼 튀어나왔지만 그들 역시 1분을 버티지 못하고 몰살당했다.
“맙… 소사.”
세레스티아는 파괴되는 황실과 학살당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언제나 당당하던 그녀가 엄청난 충격을 받은 것으로 보였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를 위로할 시간이 없다.
어느새 정신 차리고 보니 우리 일행을 제외한 모든 이가 시체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어라?’
그런데 순간 의문이 들었다.
‘우리 일행만 살았다고?’
전투력으로 치자면 그림자용 어둑서니가 아무래도 천현일 소장보다는 더 낫다. 그런데 아담과 마주한 어둑서니는 단박에 살해당한 반면 현일은 빈사 상태가 되었을 뿐 목숨이 위험해 보이지는 않는다.
“으으… 괜찮아요?”
“멀쩡하다.”
그뿐인가. 바닥에 쓰러져 있던 보람과 동민이 일어선다. 부상을 입었지만 그리 심각하지 않은 수준. 당연한 말이지만 그게 그들의 능력이 뛰어나서이기 때문일 리는 없다.
‘봐줬다고?’
그러나 이해할 수 없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회색의 인영(人影)에게서 느껴지는 증오와 질투는 가슴이 먹먹해질 정도로 살벌하다. 그런데 그런 그가 어째서 나는 물론이고 내 주변 사람들만 골라서 해치지 않는다는 말인가?
“멈춰, 아담! 이미 늦었어!”
그리고 그렇게 주변 모든 것을 파괴한 아담의 앞을 하와가 막아선다. 어디서 나타나는지 보지도 못했다. 그냥 정신 차리고 보니 그녀가 앞에 있다.
-닥쳐.
“제발 진정해. 너도 알고 있잖아…….”
-닥… 쳐!!
외침과 동시에 공간이 일그러진다. 내 앞에 서 있는 하와와 아담 사이의 공간이 막대한 힘의 충돌에 뒤틀리는 것.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꺄악-!!”
비명소리와 함께 하와의 몸이 뒤쪽으로 튕겨 나간다.
그리고 우리 앞에 아담이 다가왔다.
끼이익-! 쿵!
사방을 돌아다니며 학살을 진행하던 수십 개의 금속 팔 역시 주변에 내려선다. 내 앞을 가로막듯 보람과 동민이 섰지만, 아담이 회색의 팔을 가볍게 내젖는 것만으로 좌우로 날아가 버렸다.
“하하… 이것 참.”
그리고 그 모습에 세레스티아가 허탈한 웃음을 흘린다.
“죽어도 이루겠다는 각오를 세우고 치열하게 살았는데… 이런 허탈한 결말이라니.”
퍽!
마지막으로 그녀 역시 수십 미터나 날아가 바닥을 뒹군다. 가차 없는 공격이었지만, 나는 날아가 쓰러진 세레스티아의 몸이 움찔움찔 떨리는 것을 보았다.
‘착각이 아니야. 죽이지 않고 있어.’
나와 친분이 있는 모든 이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 천현일 소장도, 동민도, 보람도, 심지어 황성이 거의 다 파괴된 상태에서도 알바트로스함은 어느 정도 무사하다.
‘하지만 왜? 나에게 더 큰 고통을 주려고?’
쾅!!!
순간 내 양옆으로 강철의 주먹이 떨어져 내린다. 몰아치는 풍압으로 비틀거리다 주저앉는다.
-어째서.
다시 쾅, 하고 폭음이 인다. 강철 주먹이 내 주위 바닥을 후려치고 있다.
-어째서!
주위의 모든 것이 모조리 파괴되기 시작한다. 강철 주먹이 휘둘러지면 그 어떤 것도 버티지 못한다. 그림자용인 어둑서니의 육체까지 단번에 파괴되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잔뜩 만들어진 저 강철 손들에 뭔가 특별한 힘이 깃들어 있는 모양이다.
쾅!
다시금 바닥을 내려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는 나에게 그 어떤 피해도 입히지 않았다.
“…이봐?”
그리고 그사이 어떻게든 그가 뿜어내는 악의에 적응해 그를 마주 본다. 마치 허공에 회색 크레파스를 직직 그어 만든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그가 새빨갛게 타오르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다.
-네가 밉다.
원망과 증오, 질투와 혼란이 느껴진다. 모든 것을 초월한 최상급 신이 아니라, 울며 방황하는 아이 같은 감정의 폭풍이다.
-네가 밉다.
토해내는 것 같은 목소리. 그리고 그것을 마지막으로 그의 모습이 사라지고----
끼리리릭----!
사방으로 튕겨 나갔던 보람과 동민이 날아와 내 앞으로 선다. 어느새 옆에는 세레스티아가 서 있다. 알바트로스함을 부수며 박혔던 천현일 소장도 제자리로 돌아오고, 부서지고, 박살 나고, 온몸이 뜯겨 죽어나갔던 사람들이 멀쩡한 모습으로 일어나기 시작한다.
파괴된 황성이 복구되고 뛰쳐나왔던 초월자들은 안으로 돌아갔다. 강처럼 흐르던 핏물이 사라지고 찢어졌던 하늘 역시 파란 하늘로 돌아간다.
“이런… 미친…….”
신음한다.
시간이 돌아가고 있었다.
“대하야.”
망연자실해서 서 있다. 아담이 벌인 끔찍한 참상과 힘도 무서웠지만, 시간까지 돌릴 수 있을 줄은 몰랐다.
“대하야?”
어느새 주변은 아담이 나타나기 전 상황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비명을 내지르며 죽어갔던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환호를 내뱉고 있다.
‘초월적인 힘 앞에서 모든 것이 무의미하군.’
허탈함이 밀려온다. 인간이 만든 제국, 문명, 세력, 그 모든 것은 초월적인 힘 앞에서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두 눈으로 직접 봤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야 예전부터 그들의 힘을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들이 장난처럼 제국 클래스의 국가를 파괴하고 또 복구하는 모습을 보니 일순간 힘이 쭉 빠질 정도다.
“너… 기분 많이 나빠?”
“음?”
느닷없는 말에 고개를 돌린다. 거기에는 평소와 다르게 약간 시무룩해 보이는 표정의 세레스티아가 있었다.
그녀가 사과한다.
“미안. 내가 지나쳤어. 사람들이 다 똑같은 건 아닌데… 너무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나 봐.”
“음? 엉?”
순간 그녀의 말을 따라가지 못하고 의아해하자 마침내 세레스티아가 울상을 짓는다.
“그, 그렇게 싫었어?”
그녀의 말에 나는 그제야 그녀가 나에게 한 입맞춤과 사람들 앞에서의 결혼 발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래도 내 태도 때문인 모양이군. 헤롱헤롱 하고 있었으면 상황이 좀 달랐겠어.’
그러나 나는 정색한 채 심각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고(아담 때문이지만) 아무래도 그녀는 그 모습에 실수했다는 생각을 떠올린 모양이다.
“흠, 뭐 괜찮아. 좋기도 했고.”
“그, 그렇지? 막 설레고 그랬지?”
“응.”
“조, 좋아! 그러면…….”
“그래도.”
다시 살아나는 그녀를 보며 말한다.
“다음부터는 상의하고 해. 너무 제멋대로야.”
“…네.”
웬일로 고분고분한 모습이 제법 귀여웠지만 머릿속이 복잡하다.
‘하지만’
아담의 모습을 떠올린다.
‘왜 그냥 간 돌아간 거지?’
나를 적대하는 거야 뭐 이해할 수도 있다. 이왕이면 서로 친해지는 게 더 좋겠지만 이미 자신이 리전을 이끌고 있는데 아버지의 다른 자식이 나타나면 싫어할 수도 있는 일 아닌가?
하지만 와서, 온갖 부담을 다 감수하고 이렇게 깽판을 쳤는데 그냥 돌아간다니.
‘대체 어째서?’
그러나 그 누구도 나에게 대답해 주지 않는다.
*
“하아… 하아…….”
세레스티아의 수많은 팬 사이에 검은 머리칼의 소녀가 주저앉아 있다. 창백하게 질린 표정이 꽤 심상치 않았지만, 어쩐 일인지 주위에 있는 그 누구도 그녀를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
그런데 주저앉아 있는 소녀, 하와의 앞으로 다가선 노인이 있었다.
“두 번째 경고다.”
새하얀 머리칼과 수염을 가진 훤칠한 키의 노인은 몸에 착 달라붙는 턱시도를 입고 있다. 그런 그의 손에는 근사한 디자인의 회중시계가 들려 있었는데, 그 시계의 시침과 분침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빠르게 돌고 있었다.
“왜 나한테 와서 지랄이야. 아담한테 꺼져.”
“지금은 말해도 알아들을 정신이 아니더군. 꼴을 보니 오히려 덤벼들지 않으면 다행인 느낌이라 너한테 온 거지. 이게 얼마나 큰 배려인 줄 알지?”
“…….”
그의 말은 틀림없이 사실이었기에 하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모습이 만족스럽다는 듯 노인이 웃는다.
“시간을 돌리는 것 자체를 뭐라고 하는 게 아니다. 그건 있을 수 있는 일이지. 그러나… 쓸데없이 운명의 흐름을 뒤흔들지 마라. 신계의 눈치를 보는 건 이해하지만 혹시라도 세 번째 경고를 받게 된다면.”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회중시계를 닫은 노인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때는 시계가 아니라 낫을 든 내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가 사라진다. 하와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