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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장 황성으로
나는 세레스티아를 돌아보았다.
“이 병신이 지금 뭐라는 거야?”
기가 차다. 물론 레온하르트 제국의 7대장군 중 하나가 죽은 건 어마어마한 사건이겠지만 방금 나를 죽이라 명령한 주제에 너무 뻔뻔하지 소리가 아닌가? 그렇게 황당해하는 나를 보며 세레스티아가 답한다.
“몰라. 정신이 좀 이상한가 봐.”
“…….”
루이는 반박도 못한 채 창백한 얼굴로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그 순간 그가 걸치고 있던 황금색 목걸이가 빛나더니 삽시간에 그의 모습이 사라져 버린다.
“아, 도망갔다.”
“그러게.”
사라져 버린 황태자의 모습에 긴장감 없이 중얼거린다. 물론 이렇게 도망가 버린 그는 두고두고 화근이 될 테지만 어차피 여기서는 그를 어찌할 방법도 능력도 없다. 하와는 단지 나를 지켜줄 뿐 명령을 듣는 것은 아니니 그를 잡아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는 것이다.
‘물론 시도해 볼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녀가 내 [명령]에 보였던 격렬한 저항을 떠올리면 그게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번 더 명령을 내리면 모든 것을 다 파괴해 버리겠다는 그녀의 협박을 굳이 시험해 볼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말이야 바른 말이지 사실 저항하고 거부하는 게 당연하다.
평생 본 적도 없는 존재가 단지 명령하는 것만으로 내 의사를 강제하는 상황을 세상 그 누가 좋아하겠는가? 그 대상이 자신의 부모 같은 존재의 혈육이 아니라 그 이상의 존재라 해도 그건 마찬가지다.
하물며 그녀는 언터쳐블. 신들이 떠난 현재의 우주에서 가장 지고한 힘을 가진 존재 중 하나이다. 그런 그녀가 하급 초월자 따위(?)에도 미치지 않는 내 명령을 들어야 한다면 당연히 모욕감을 느끼겠지.
‘만일 시도했다가 괜히 그녀가 적으로 돌아서기라도 한다면?’
만일 일이 그렇게 꼬이면 모든 것이 끝장이다. 황실의 실세라고 할 수 있는 황태자가 나를 적대하는 상황에서도 태연할 수 있는 게 바로 그녀의 비호 때문인데 이런 우주 규모의 행운을 될지 안 될지도 모를 도박에 거는 바보짓을 할 수는 없다.
“화, 황태자님이…….”
“으으…….”
생각을 정리하다 내 눈치를 살피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수행원들의 모습을 발견한다. 황태자는 사라졌지만 그를 수행하던 보좌관과 수행원들이 남아 있던 것. 식은땀까지 뻘뻘 흘리면서도 감히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못하는 그들의 모습에 세레스티아가 말한다.
“꺼져.”
“그,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럼? 너희가 하려던 대로 해줄까?”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화들짝 놀라더니 꾸벅 고개를 숙이고 우르르 도망간다. 그리고 그 모습에 나는 세레스티아를 돌아보았다.
“흠. 내가 이런 말을 하기도 좀 뭐하지만… 레온하르트 황가 말이야.”
“좀 품위가 없지?”
“응. 콩가루네.”
뭔 놈의 황족들이 얼굴만 마주치면 죄다 덤벼드니 이쯤 되면 레온하르트 황실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의심할 지경이다. 무슨 중세시대도 아니고 법 같은 게 없단 말인가? 도저히 계급 사회 같지 않은 사회 분위기를 가진 국가라고 생각했는데 황족만 만나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연속으로 벌어지고 있다.
“완전히 부정할 수 없는 게 슬프지만… 좀 복잡한 사정이니 이해해 줘. 레온하르트 제국은 제법 견실하고 튼튼한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그 위에서 군림하는 황가는 꽤 혼란한 상황이거든.”
“어째서?”
“그야 당연히 초대 황제께서 잠드셨기 때문이지. 우리 레온하르트 제국이 건국된 지 고작 300년 남짓밖에 되지 않았는데 아버지가 벌써 9대 황제야.”
“…황족들이 수명이 짧아?”
“그럴 리가. 기본 200년에 최대 500년 이상 살아. 이러니저러니 해도 신족이니.”
“…….”
설명만 들어도 개판의 냄새가 폴폴 풍긴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복도 너머가 웅성웅성하더니 한 무리의 승무원이 다가온다. 그 맨 앞에는 알바트로스함의 함장 천현일 소장이 있었다.
“다행이군. 큰일이 나지 않았나 했는데… 망할 황태자 놈이 무슨 권한을 가지고 왔는지 시스템도 멋대로 다운시켰어.”
예상대로 녀석은 여기에서 나를 처분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무리한 거지?’
이해할 수가 없다. 어째서 굳이 자신에게 협력하지도 않는 천현일 소장의 관리하에 있는 알바트로스 함에 침입해서 일을 벌인단 말인가? 내 목숨이 목표라면 황성에 내려서길 기다렸다가 암살자를 보내는 게 훨씬 간단할 텐데.
“흠……! 저 갑옷은…….”
그리고 그렇게 고민에 잠겨 있는 사이 현일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노링턴 대장군의 하체를 발견했다. 상체가 통째로 사라졌는데 신기하게도 그 단면에서는 피가 흐르지 않는다.
“노링턴이야.”
“그 양아치가 여기에 쓰러져 있다는 건.”
잠시 생각에 잠겼던 백곰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러나 그것은 분노나 걱정이 담긴 표정이 아니다.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하! 그 양아치 놈이 임자를 만났구나! 이렇게 만든 건 역시 그녀겠지?”
“응.”
“황태자 얼굴이 사색이 됐겠군! 근위단장인 녀석은 함부로 황성에서 나오면 안 되는데 여기에서 시체가 되다니! 이거 잘하면 황태자 자리에서 추락하는 거 아닌가?”
“아몬 공작이 뒤에 있으니 일이 그렇게 잘 풀리지는 않을걸. 그래도 꽤 고생할 건 틀림없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7대 장군 중 하나가 죽었는데 그냥 넘어갈 수는 없을 테니.”
역시나 사람이 죽었다고 애도하거나 뭐 그런 분위기는 전혀 없다. 오히려 기껍다는 분위기를 보아하니 현일과 노링턴의 사이가 상당히 안 좋았던 모양이다.
“흠. 그럼 이 시체는 어떻게 해줄까? 제거해?”
“가능하면 즉시.”
“좋아.”
흰색의 털로 뒤덮인 두툼한 앞발이 쭉 하고 뻗어지자 청색의 강기가 휘몰아쳐 노링턴의 하체를 뒤덮는다.
카가가가각!
마치 분쇄기에 금속 물체를 집어넣은 것 같은 쇳소리가 울려 퍼진다. 역시나 초월자의 육신이라는 것인지 아니면 그의 육신이 가진 특성인 것인지 노링턴의 하체는 강기의 폭풍 안에서도 10여 초 가까이 버텼다. 시체 상태에서도 이 정도니 그가 살아 있었을 때 내구가 어땠을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그리고 하와는 그걸 한 방에 날려 버렸고 말이지.’
역시 조심해야지, 하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린다. 그런데 동민과 보람이 강기의 폭풍을 홀린 듯 바라보고 있다.
“아깝군.”
“그러게요. 으으, 초월자의 신체를 저렇게 갈아버리다니… 저걸 지구로 가서 팔면 나라도 몇 개는 살 텐데요.”
“무슨 네크로맨서 같은 소리냐, 이것들아. 쓸데없는 소리 말고 경호 잘해.”
“우. 하지만 초월자가 상대면 어쩔 수 없는걸요.”
“난 최선을 다했다.”
“솔직히 그 황자 막은 것만 해도 대단한 거죠.”
“대우주가 해도 해도 너무한 거다.”
“촌것들로는 한계가 있다는 거죠.”
아주 둘이 죽이 척척 맞아서 떠든다. 하지만 그들을 [볼] 수 있는 나는 알고 있다. 계속해서 초월적 강자들을 만나는 그들이 상당한 자극을 받고 있으며, 또 그만큼 계속해서 강해지고 있다는 것을.
처음 우주에 나왔을 때였다면 초월자 바로 아래 단계라고 할 수 있는 황태자의 공격을 감히 막아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나저나 곰팅아, 황성에 무슨 일이라도 있어?”
가만히 있던 셀의 질문에 노링턴의 시체를 처분한 현일이 고개를 돌린다.
“무슨 일?”
“응. 루이가 평소 골빈 소리를 하고 다니긴 해도 그렇게 바보는 아니거든. 이렇게까지 무리를 했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야.”
세레스티아의 말에 현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맞아.”
“맞다니? 알아?”
“물론이지. 넌 가끔 자신의 영향력을 너무 가볍게 보는 것 같군.”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돌려 앞서 걷기 시작한다. 우리는 그의 등을 보며 따라 걸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영향력?”
“글쎄, 나도… 아! 우리 애들이 온 걸지도 모르겠다.”
“우리 애들?”
“응. 뒤를 받쳐 주는 가문이 없어서 다른 황자나 황녀들처럼 지원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나는 황녀야. 나름대로 세력을 만들었지.”
“흠. 혹시 그 세력 레온하르트 제국 밖에서 만든 거야?”
“오? 청원을 농락할 때 눈치챘지만 너 역시 똑똑하구나. 맞아. 전쟁터를 구르면서 고르고 고른 진짜배기들이지.”
“…….”
그녀의 말에 나는 그녀를 처음 봤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그녀의 칭호는 이랬다.
[데트로 은하 연합 4군단 제1돌격대]
[외계인 세레스티아]
사실 그녀의 신분을 알게 된 이후 항상 그녀의 소속에 의문이 있었다. 그녀는 레온하르트 제국의 황녀. 그런데 어째서 데트로 은하 연합의 돌격대가 그녀의 [대표적인] 소속이 될 수 있는가?
그런데 지금 그녀의 활기찬 목소리에서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소속감.’
그렇다. 바로 그것이다. 그녀가 자신이 속한 단체(가족은 단체로 취급 하지 않는다) 중 가장 크게 소속감을 느끼는 단체가 바로 데트로 은하 연합에 소속된 제1돌격대였던 것. 이러니저러니 해도 제국의 황녀인 그녀가 타국의 돌격대에 더 소속감을 느낀다는 건 레온하르트 제국의 황실이 그만큼 그녀를 홀대했다는 증거나 다름없다.
“흠. 하지만 모르겠는걸. 우리 애들이 강하긴 해도 황실에 위기감을 줄 정도는 아닐 텐데.”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그녀가 의문을 표하거나 말거나 현일은 계속해서 걸어서 아무것도 없는 한쪽 벽 앞에 섰다.
그리고 말했다.
“자부심을 가져도 좋아. 정말이지… 황실에서도 이런 상황은 상상도 못 했을 거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기이이잉---
의문을 표하는 세레스티아의 목소리를 묻어버리며 한쪽 벽이 통째로 열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와아아아-----!!!
함성이 터진다. 외부에서 봤을 때는 상상조차 못했던 푸른색의 하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펼쳐진 금빛의 화원, 그리고 그 너머에 보이는 황금빛 성.
그런 것들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건…….”
“인사라도 해줘.”
산만한 덩치의 백곰은 정말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우리를 돌아보았다. 그의 어깨 너머로 셀 수 없이 많은 우주선과 그보다 수천 배는 더 많은 가지각색의 외계인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말했다.
“온 우주에서 모여든 너의 팬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