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머리 위에-90화 (90/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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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장 황성으로

“아, 그쪽이 그 소문의 신랑감이군. 만나서 반갑다. 레온하르트 제국의 황태자, 루이 레온하르트다.”

조각처럼 잘생긴 금발의 미남이 보기만 해도 상쾌해질 정도의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더더욱 선명하게 전해지는 감각에, 나는 깨달았다.

‘이 녀석… 신혈을 각성했어?’

보자마자 알 수 있다. 지금은 아니지만 나 역시 신혈을 각성한 경험이 있었으니 당연한 일. 나는 그를 마주 보며 손을 내밀었다.

“관대하입니다.”

그가 신혈을 각성했다고 주눅이 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신혈 특유의 오오라가 전해졌지만 그래 봤자 지금까지 만난 초월자들에 슬쩍 비견될 정도에 불과했으니 중급 신위를 가지고 있던 청원이나 상급 신위를 가지고 있는 하와를 몇 번이고 마주한 내가 새삼스럽게 놀랄 수준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손을 마주 잡으려는 그 순간 루이의 몸에서 날카로운 기세가 일어났다.

번쩍!

한순간 빛에 시야가 점멸한다. 뭐든 인식하고 분석할 수 있는 게 내 능력이었지만 사고의 속도는 일반인 수준이라 이렇듯 한순간에 벌어지는 일에는 전혀 반응할 수가 없다.

팡!

공기가 터져 나가는 소리와 함께 시야가 안정된다. 정신을 차리니 앞으로 탄탄하게 단련된 동민의 등이 보인다.

끼긱!

이어 가시처럼 찔러 들어온 빛 덩어리들은 보람이 펼친 결계에 가로막혔다. 약간 놀란 것 같지만 여전히 여유 넘치는 표정의 루이가 말한다.

“비루한 하위 문명 출신치고는 괜찮은 호위들이군. 이렇게 깔끔하게 막아내다니.”

동민과 보람을 보며 품평하는 그의 관자놀이에 세레스티아의 권총이 겨눠졌다. 그녀로부터 위협적인 기세가 뿜어졌지만 그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다.

“하하, 동생아. 이깟 총으로…….”

쩌정!

그러나 그 순간 망치로 철판을 두드리는 것 같은 소음과 함께 루이의 몸이 휘청거린다. 여태껏 느긋하던 그의 표정이 슬쩍 굳었다.

“이런, 대단한 수준의 마총사라는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였나?”

“그러는 너야말로… 어떻게 된 거야? 좋은 아티팩트라도 손에 넣었어?”

“아티팩트? 푸하하하!”

진심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린다. 그리고 그 모습에 나는 세레스티아가 그의 상태를 짐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그는 최근에 들어서 신혈 각성에 성공한 모양이다.

‘어쩌면 세레스티아의 귀걸이… 그러니까 신성의 조각을 탐낸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을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결국 다른 방식으로 방법을 찾아냈어.’

신혈 각성은 이능을 단련해 경지를 올리는 것과 전혀 다른 방향성을 가진다. 뭔가를 학습하거나 능력을 쌓아가는 게 아니라 어떤 특별한 혈통의 힘을 타고나 거기에 내재된 힘을 깨워가는 과정이니까.

제로에서부터 능력을 쌓아가야 하는 다른 존재들이 보자면 한없이 불공평하게 보이겠지만 사실 그것도 그리 간단한 일만은 아니다. 나야 전 우주에서도 흔치 않은 희대의 사기템 [열쇠]가 있어 단지 그것을 돌리는 것만으로 신혈을 완전각성(完全覺醒)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에게도 그런 행운이 있지는 않았을 테니까.

“뭐가 그렇게 웃기지?”

“하하. 이 힘을 보고 아티팩트를 따위를 떠올리는데 어찌 웃기지 않겠느냐. 하긴 황가의 혈통을 등한시하고 천박하게 굴러먹던 네가 우리 황가의 진정한 힘을 어찌 알 수 있겠느냐마는.”

우우웅---

루이의 몸에서 금빛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그의 전신을 뒤덮은 금빛은 평소 세레스티아가 일으키던 황금의 영기와도 전혀 다르다. 훨씬 짙게 뭉쳐 있는 기운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꿈틀대고 있다.

“이건 설마…….”

이제야 그가 얻은 기운을 짐작한 세레스티아의 표정이 굳는다. 그가 지금 가진 전력이 우리 전부를 어떻게 할 정도가 아님에도 그렇게 당황하는 건 아무래도 그가 신혈을 각성했다는 사실이 어떤 상징성을 가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아쉽군. 그냥 내 힘으로 처리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부관!”

“네, 황태자님.”

미리 이야기가 되어 있던 것인지 별다른 명령을 내리지 않았음에도 루이의 뒤쪽에 서 있던 사내가 양손을 합장(合掌)하듯 마주 대고 붙였다가 뗀다. 그리고 그러자 허공이 갈라지며 금빛 갑주를 걸친 사내가 모습을 드러낸다. 세레스티아가 신음한다.

“노링턴 대장군, 당신 설마?”

“어이쿠… 이렇게 뵙게 되서 정말 송구스럽습니다, 황녀님. 하지만 줄을 잘 잡는 것도 저희에게는 중요한 문제 아니겠습니까?”

비열한 미소는 삼류 양아치의 그것이었지만 그에게서 전해지는 힘은 막대하다. 나는 그가 초월자라는 것을 알았다.

“7대장군…….”

무심코 중얼거린다. 왜냐하면 대장군이 난데없이 여기에 나타났다는 게 결코 좋은 의미를 가질 리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레온하르트 제국에는 총 19명의 초월자가 존재하지만 그들 전부가 레온하르트 제국에 충성하는 것은 아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천현일 소장만 해도 레온하르트 제국에 잠시 적을 두고 있을 뿐이라서 원한다면 언제든지 제국에서 나갈 수 있는 몸이고(대신 요직에 앉지 못한다) 세레스티아를 찾아왔던 그녀의 광팬(초월자에 노인에 반마족이기까지 한데…) 볼티몬처럼 레온하르트 제국이 손님으로서 대우하고 있는 초월자들 역시 존재하니까.

그리고 그들은 레온하르트 제국에 속했다 해도 자신의 판단에 따라 움직인다. 숫자가 상당해 가볍게 보일지 몰라도 그들은 하나하나가 스스로의 운명을 넘어선 초월자이니 그리 쉽게 이용해 먹을 존재가 아닌 것.

그러나 7대장군은 다르다.

그들은 레온하르트 제국에서 나고 자랐거나, 레온하르트 제국의 힘으로 초월자가 되었거나, 혹은 황족 혈연으로 연결된 레온하르트 제국의 중추라 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예전과 달리 레온하르트 제국에 황제 클래스의 존재가 없어 그들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황족의 명령에 따르는 존재라는 사실에는 변화가 없는 것이다.

“노링턴.”

“예, 황태자님. 황녀를 잡아들일까요?”

직위나 경지에 걸맞지 않은 태도로 꾸벅 고개를 숙이는 대장군의 모습에 루이의 얼굴이 험악해진다.

“네가 감히 황족에게 손을 댄다고?”

“제가 지나쳤습니다, 황태자님.”

다시 꾸벅. 고개를 숙이자 루이가 흥 하고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일단… 저 녀석을 제거해라.”

“오빠, 미쳤어?”

세레스티아가 인상을 찡그리며 내 앞을 가로막는다. 그녀의 몸에서도 황금빛 기운이 피어오른다.

“이미 그의 존재를 황실에 알렸어. 그런데 여기에서 무력을 쓰겠다고?”

“그래. 안타깝게도 통신 자체는 막지 못했지만… 아직 황실에 내려서지 못한 지금이 마지막 기회나 다름없으니까. 노링턴.”

“예, 황태자님.”

차분히 답하는 대장군을 향해 루이가 말한다. 더 길게 말하기도 귀찮다는 태도다.

“해라.”

“네.”

대답과 동시에 공간이 일그러진다. 동민과 보람이 내 앞으로 끼어들고 세레스티아의 권총이 불을 뿜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다 소용없다. 대장군 노링턴은 마치 허깨비처럼 모두를 투과하여 내 목에 묵빛의 칼을 휘둘렀다.

그리고.

퍼억!

상체가 통째로 날아가 쓰러졌다.

쓰러진 것은… 제국의 7대 장군 중 하나이자 초월자인 노링턴이다.

“뭐?!”

“어?”

“미친……?”

순간 벌어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모두가 멍한 표정으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하체를 바라보았다. 그는 놀라운 생명력을 지닌 초월자였지만, 남은 반신에는 그 어떤 부활의 조짐도 없다.

“셀, 역시 저 황태자라는 놈도 죽여두는 게 낫겠지?”

그리고 혼란에 빠진 사람들 속에서 유일하게 침착한 내 목소리에 세레스티아의 표정이 변한다. 그녀는 잠시 혼란에 빠져 있다가,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듯 표정을 고쳤다.

“흠. 하지만 오빠는 황태자야. 그를 죽이면 후환이 있지 않을까?”

“나를 죽여도 후환이 있는 건 마찬가지잖아. 이 근처 정보를 저장할 수 없게 조치를 취했을 것 같은데.”

당연한 말이지만 죄다 허풍이었다. 지금 우리의 전력으로는 그를 놓치지 않고 잡을 수 있다는 확신은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세레스티아가 눈으로 물었다.

그녀야?

은근한 눈짓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다. 황태자가 와서 목숨을 위협할 때도, 사실 나는 그렇게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목숨 하나만큼은 어떤 상황에도 위험하지 않게 보호해 드리죠.]

상급 신위를 가진 그녀의 약속은 그냥 약속이 아니다. 그녀의 말에는 힘이 있고 일단 입 밖으로 꺼냈으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약속의 정확한 범위를 알았다.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만 개입하는군.’

만약 길 가던 깡패가 나를 후려 팬다면 그녀는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그러나 누군가 나를 죽이려 한다면, 그녀는 상대가 초월자라고 하더라도 저지한다. 아니, 애초에 그녀에게는 일반인이나 초월자나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괜히 보는 사람마다 덜덜 떠는 게 아니었군.’

그 강대한 무투형 초월자인 천현일 소장조차 하와를 처음 본 그 순간 신음을 토했다. 약간 정신이 이상해 보였지만 황실의 원로 대우를 받는다는 볼티몬 역시 하와를 보고 덜덜 떨었다.

사실 그때는 그걸 이해는 해도 그리 체감되지는 않았는데, 이제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너… 어… 이, 이게 무슨……? 완전히 미쳤군!! 대장군을 죽였어? 제국을 위해 충성하는 7대장군 중 하나를?”

예상하지 못한, 아니, 그걸 넘어 상상도 못 했을 사태에 창백한 얼굴로 소리치는 황태자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여전히 멋진 미남이었지만, 그 잘생긴 입으로 내뱉는 소리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수준.

나는 세레스티아를 돌아보았다.

“이 병신이 지금 뭐라는 거야?”

기가 차다. 물론 레온하르트 제국의 7대장군 중 하나가 죽은 건 어마어마한 사건이겠지만 방금 나를 죽이라 명령한 주제에 너무 뻔뻔한 소리가 아닌가? 그리고 황당해하는 나를 보며 세레스티아가 답한다.

“몰라. 정신이 좀 이상한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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