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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머리 위에-89화 (89/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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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장 황성으로

제17장 황성으로

전쟁은 400년 전, 자신만의 판단으로 우주를 리셋시키고자 했던 아수라가 그 판단을 거부한 육계(六界)의 지배자들에 의해 소멸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의 목적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나 세계의 조율자(調律者)였던 아수라가 소멸하였으니 그 후폭풍이 작을 수는 없었다. 그때까지의 우주는 그의 절대적인 권능과 법칙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기에 한순간 온 우주가 무정부 상태에 빠진 국가처럼 혼돈의 도가니에 잠기게 된 것이다.

온갖 제약과 법칙으로 꽁꽁 묶여 있던 신과 괴물들이 날뛰기 시작했고 서로 원수나 다름없는 관계이지만 아수라의 눈치 때문에 감히 충돌하지 못하던 세력들이 서로를 전멸시키기 위해 움직였다.

그것은 전쟁이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초월자와 신들이 떼로 죽어나갔고 또 셀 수 없이 많은 종족과 문명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구르기 시작한 피의 수레바퀴는 절대 멈추지 않아 온 우주가 신음 소리만을 토하던 시기다.

그리고 그 전쟁에 휩쓸린 것은 100개로 분화한 지구 역시 마찬가지였다.

최상급 신들, 그러니까 흔히 대신격(大神格)이라 불리는 존재들은 아수라가 소멸한 직후 뭔가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지구를 100개로 분화시켜 버렸는데 문제는 이게 단순 복사 붙여넣기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분화된 각 지구에 미묘한 변수들이 추가되었으며 시대 역시 다양하게 조절되었다. 가장 당겨진 시기는 기원전에 가까웠고 개중 몇 개는 이미 우주를 누빌 수 있을 정도의 문명이 완성된 상태였다.

때문에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는 이미 100개의 지구 중 27개가 신드로이아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문명에 도달한 상태였고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25개의 지구가 추가로 거기에 합류되어 가혹한 우주전쟁에 휩쓸려야만 했다.

피해는 엄청났다. 충분히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을 정도로 완성된 문명을 가진 채 [만들어]진 지구들이었지만 온 우주를 뒤덮은 그때의 전쟁은 그 정도 힘으로 이겨낼 정도로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신드로이아의 가호에 의해 보호받고 있는 하위 문명의 지구들까지 뭣도 모르는 상태로 쓸려 나갈 정도로 가혹한 전쟁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때 영웅이 나타났다.

광황(光皇) 레온하르트.

놀랍게도 제13지구 출신이었던 레온하르트는 스스로의 힘으로 중급 신위를 손에 넣었다. 타고난 특별한 혈통의 힘을 바탕으로 하급 신위를 완성했던 그가 우주에서 쳐들어오는 괴물들을 잡아먹고, 죽이고, 피를 뒤집어써 가며 싸우다 마침내 오염되어 죽어가던 와중… 초월적인 의지와 행운의 힘으로 스스로의 존재를 초월해 버린 것이다.

물론 그가 중급 신위를 손에 넣었다고 해도 전쟁이 끝나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다. 그때의 전쟁은 상급 신위를 가진 신들, 그러니까 언터쳐블들조차도 죽어나갈 정도로 가혹했으니까.

때문에 그는 필사적으로 싸우는 한편 다른 지구의 인간들을 설득해 세력을 만들었다. 최종적으로 분화된 100개의 지구 중 47개를, 그러니까 우주전쟁에 휩쓸린 모든 지구를 결집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마침내 인간들을 결집시키는 데 성공한 그는 47개의 지구에서 모인 7명의 초월자를 받아들여 체계적으로 외적에게 대항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러다 그는 만나게 되었다.

우주를 떨쳐 울릴 강대한 짐승신.

황금사자신을.

“즉.”

주절주절 늘어놓는 세레스티아의 말을 끊고 묻는다.

“우리가 갈 곳도 결국 지구란 말이지?”

“…….”

“아냐?”

“아니… 맞아.”

뭔가 마음에 안 드는지 토라진 표정의 세레스티아를 두고 정신을 집중한다.

‘흐음. 대충 알 것도 같은데.’

심장박동에 맞추어 아이언 하트가 뛰고 있다. 아이언 하트라는 명칭을 누가 만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에 와서는 정말 내 심장이기라도 한 것처럼 완전히 안착되어 있다.

촤라락.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마음속의 책장이 넘어간다. 처음에는 걱정했는데 의외로 조작이 쉽다.

마치 칭호를 조작할 때와 비슷한 감각이다.

“…엄청나군.”

“세상에. 이거 지구가 문제가 아니라…….”

잠시 그 감각을 되새기고 있는 내 귓가에 한쪽에 설치된 화면을 통해 밖을 보고 있던 보람과 동민의 신음 소리가 들린다. 어차피 능력 제어에 진전이 없었던 만큼 나 역시 그들 옆에 섰다.

“뭔데 그… 오호.”

알바트로스함의 목적지는 레온하르트 제국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본성(本星)이다. 물론 이건 레온하르트 제국민들이 부르는 호칭일 뿐이니 정확히는 제13지구라는 표현이 맞겠지.

이미 한 말이지만 우리가 가야 할 곳은 결국 지구다.

화면으로 보이는 장소는 확실히 내가 알고 있는 지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대륙의 형태, 바다의 색 모두 내가 알고 있는 지구의 그것이다.

다만 문제는 그 지구를 돌고 있는 위성에 있었다.

“황금 장미……?”

문자 그대로  지구의 주변을 거대한 황금빛 장미가 돌고 있다. 언뜻 봐도 달보다 크면 컸지 절대 작아 보이지 않는 규모.

현재 지구 바로 위에 떠 있는 거대한 장미는 마치 치구가 화려한 금관을 쓰고 있는 것처럼 우아하게 빛나고 있다. 뭔가 특수한 힘을 품고 있는 것인지 어둠 속에서도 화려한 금빛을 선명하게 내뿜는 것이다.

“그래. 황금사자신께서 레온하르트 1세에게 프러포즈하며 선물한 골든 로즈(Golden rose)야. 우리가 가야 할 황성(皇城)이 바로 저기지.”

그녀의 설명에 황금색의 장미를 보며 답한다.

“그래서 황금 장미가 프러포즈의 상징이었구먼?”

“당연하지. 특히 레온하르트 제국의 황족들은 배우자에게 고백할 때 반드시 황금 장미, 그중에서도 데탈트의 황금 장미를 사용해.”

말은 안 했지만 ‘네가 안 받은 그 장미 말이야’라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물론 아무래도 상관없는 문제다.

“접근한다.”

나직한 동민의 말대로 황금 장미의 모습이 점점 거대해진다. 그리고 그때 머릿속으로 세레스티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계약 내용은 잘 숙지했지?]

‘물론.’

그녀가 나에게 결혼을 애걸(?)했다 해도 절대 착각하면 안 된다. 그녀는 나에게 반했다거나, 나를 사랑한다거나 뭐 그런 이유로 청혼을 한 게 아니니까.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그녀의 말에 따를 생각이다. 이혼 서류는 완벽했고 그녀의 설명에도 빈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가 가지고 있던 신성의 파편을 얻음으로써 [죽을 수밖에 없는] 미래를 회피한 것으로 짐작되는 이상… 내 목숨만큼의 보답은 해주는 게 예의일 것이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세레스티아 황녀님.]

“알았어, 지니. 여태까지 고마웠어.”

[별말씀을.]

문 앞으로 나타난 지니의 SD캐릭터가 풍만한 가슴에 손을 올리며 무릎을 살짝 굽혔다. 팔다리도 짧고 머리가 몸체의 반이나 되는 크기인데도 귀여움을 넘어서는 우아함이 느껴지는 동작이다.

“으, 아쉽다. 이쁜 지니를 한동안 못 보겠구나.”

[어, 어머.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왜 남의 전함 관제인격을 꼬시고 앉았냐…….”

세레스티아의 야유를 들으며 복도로 나서자 자연스럽게 내 뒤로 동민과 보람이 따라붙는다. 막상 황녀인 세레스티아의 옆에는 아무도 없는데 나만 호위를 두고 있자니 뭔가 좀 묘한 기분이었지만 솔직히 전투 능력이랄 게 없는 나였기에 별로 할 말은 없었다.

“이제 가는 건가?”

“그렇지.”

“시원섭섭하군.”

“맞아요. 이제 와서는 거의 집 같은 느낌인데.”

소형 우주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복도를 걸어가는 와중 동민과 보람이 아쉽다는 목소리로 말하자 세레스티아 역시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그러네. 전혀 예상에도 없이 끌려오다시피 했는데 고생하다 보니 정이라도 든 건지……. 뭐, 그래도 함장이 곰탱이였던 건 운이 좋았지만.”

“안 좋은 함장도 있어?”

“당연하지. 멀리 갈 것도 없이 라이징 하트 같은 걸로 끌려갔어 봐. 그야말로 끝장이었을걸.”

“하긴. 그 6황자라는 녀석이 받았다고 했었지……. 아, 그러고 보니 넌 어떻게 된 거야?”

문득 의문이 들어 세레스티아를 바라본다.

“뭐가?”

“아니, 함선 말이야. 그 녀석은 라이징 하트 같은 강력한 전함을 제공받았는데 너는 뭐 없어?”

“물론 있지만… 그걸 이야기해 주면 좀 더 부담될 텐데.”

“부담? 아.”

그녀의 말에 나는 그녀가 황실에서 받은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녀가 귀에 걸고 있었고 지금은 나에게 흡수된 신성의 파편이다.

“하하. 그냥 하는 소리니까 너무 부담 가지지 마. 사실 외가 쪽에 힘이 없어서 강제로 받은 물건이거든. 별다른 효과도 없으면서 쓸데없이 이름값만 높은 [황실의 보물] 때문에 온갖 제약이 다 걸리고 암살자는 심심할 때마다 쳐들어오고 맨입으로 쓱 물어뜯으려는 친척도 한둘이 아니었지. 얼굴 팔면서 망할 아이돌을 하지 않았으면 탈출이 불가능했을걸. 뭐, 이제 와서는 그것도 다 경험…….”

거기까지 말하고 문득 그녀의 표정이 가라앉는다. 달라진 공기에 고개를 돌리니 동민과 보람 역시 눈을 가늘게 뜨고 있다.

[가만히 듣기만 해.]

이 말은 나만 들린 게 아닌 듯 보람과 동민 역시 고개를 끄덕인다.

‘이런 제길.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누가 오나?’

나만 감각이 더디니 깝깝하다. 나폴레옹의 어빌리티 중에 감지계통 능력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러나 내가 잡념에 빠져 있거나 말거나 세레스티아가 말했다.

“그뿐이 아냐. 심지어 오빠 중에 나랑 결혼해서 그걸 받아 가겠다는 미친 소리를 하는 놈도 있었어.”

“…진짜?”

“그래. 물론 배다른 남매이기는 했지만… 웃기는 놈이지. 자기야말로 레온하르트 제국의 이름을 우주에 알릴 유일한 황제감이고 다른 황족들은 다 혈통의 잔재에 불과한 하찮은 존재라는 시대착오적인 소리를 매일 하고 다니거든.”

약간은 촐싹이는 말투로 말한다. 이 녀석 가수라더니 연기 실력도 만만치 않다. 마치 생각 없고 경솔한 여자애가 남을 험담하는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바꿔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 답하는 이가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다니 섭섭하군, 셀. 나는 언제나 진심만을 말했는데.”

반대쪽 복도에서부터 한 무리의 수행원과 알바트로스함의 함장 천현일 소장을 이끌고 금발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낸다.

‘어라? 이건?’

나는 그에게서 강렬하게 느껴지는 감각에 멈칫했다. 그의 주변을 은은히 휘도는 오오라와 공간을 짓누르는 힘은 그가 절대 평범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그쪽이 그 소문의 신랑감이군. 만나서 반갑다. 레온하르트 제국의 황태자, 루이 레온하르트다.”

조각처럼 잘생긴 금발의 미남이 보기만 해도 상쾌해질 정도의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더더욱 선명하게 전해지는 감각에, 나는 깨달았다.

‘이 녀석… 신혈을 각성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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