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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6 장미 꽃다발
그녀는 지금 나에게 보여준 그 이미지를 실제로 할 수 있는 힘이 있었고… 무엇보다 지금 이 말은 농담이 아닌 진심이었다.
“…이런 미친.”
헛웃음만 나온다. 과연 지구인들은 지금 자기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걸 알고나 있을까?
그러나 그 이후 하와는 뜻밖의 말을 했다.
“대신이라고 말하기는 미묘할지 모르지만… 제 말을 따른다면 당신의 안전을 지켜 드리지요.”
“안전을?”
“한동안 당신을 지켜볼 겸 동행할 예정이니… 적어도 목숨 하나만큼은 어떤 상황에도 위험하지 않게 보호해 드리죠.”
“정체는 숨기고?”
“정체는 숨기고.”
“…….”
그녀의 말에 얼떨떨한 기분으로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곰곰이 판단해 본 결과.
‘어? 이거 좋은 거 아닌가?’
고작(?) 중급 신위, 그러니까 황제 클래스 정도만 되어도 이 우주에서 최강자의 반열에 들어간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힘을 가진다. 끝도 없이 광대한 대우주에도 실제 활동하고 있는 황제 클래스의 존재는 10여 명 정도에 불과하다고 하니까.
그리고 그 이상의 존재는?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지.’
현재 물질계에 거주하며 활동하는 상급 이상의 초월자, 즉 언터쳐블은 리전을 이끄는 아담과 이브, 그리고 그로테스크를 이끄는 킹과 퀸 정도뿐이다. 과거에는 훨씬 많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죄다 물질계를 떠나 다른(대부분 신계. 혹은 고유차원)차원에 거주하며 아주 가끔 모습을 드러낼 뿐이니까.
즉… 상급 신위를 가진 그녀가 진심으로 나를 보호한다면 날 해칠 수 있는 이는 거의 없다. 절대적인 안전을 보장받는 것이다.
하지만.
“왜?”
영문을 알 수 없어 반문한다. 대체 왜 그녀가 그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나를 죽인다는 선택지는 내 친부 때문에 고를 수 없다고 쳐도 그녀가 열쇠를 뺏어 가면 나는 저항조차 할 수 없을 텐데.
그리고 그런 내 생각을 짐작한 듯 하와가 말한다.
“당신의 존재는 마음에 안 들지만… 당신에게 열쇠가 간 것은 아버지의 뜻일 테니까요.”
“그의 뜻을 거부할 수는 없… 아차.”
무심코 이야기하다가 주변을 둘러본다. 지금 우리의 대화는 나의 [친부]를 짐작할 여지를 주는 대화였기 때문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시간을 동결시켰어요. 감각은 별로 예민하지 않네요.”
“시간을 감각으로 읽어내는 쪽이 더 이상한 거야.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시간정지라니.”
투덜거리며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정지되어 있는 모르네를 바라본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우리보다 먼저 여기에 와 있었다.
“…그에게도 제약을 건 거야?”
“저래 보여도 초월자라서 따로 따로 걸어줘야 하거든요.”
아무래도 그녀는 정말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것으로 보인다. 이럴 거면 왜 그렇게 당당하게 나타나서 깽판을 쳤던 건가 하는 의문이 들지만 지금에 와서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흠. 이제 와서 이런 질문을 하기도 좀 그렇지만.”
나는 하와를 보며 잠시 망설였다. 물론 짐작하고 있던 일이지만 그 당사자에게 확인하려니 묘한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맞아요.”
그리고 내 생각을 읽은 듯 하와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같은 아버지를 가지고 있는 걸로 추정되죠.”
“이제 와서 추정은 무슨.”
나는 알고 있었다. 바보도 아니고 여태까지 짐작도 못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겠지.
내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인공지능들.
반칙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주어지는 어빌리티.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가진 [기억]들.
사실 그의 정체에 대해 이런저런 짐작은 해도 확신까지 가지지는 못했던 나에게 하와는 쐐기나 다름없는 존재.
나는 물었다.
“그는 기계신이지?”
“아뇨.”
“그래 역시… 뭐?”
순간 당황해서 되묻는다. 그리고 그런 나를 하와가 날카로운 눈으로 째려보았다.
“아버지는 기계신 따위가 아니에요. 그건 영락한 모습일 뿐이라고요!”
“그, 그래? 그러면… 아.”
버벅이다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생각해 보면 내 기억에는 기계신다운 면모가 없었지.’
그는 세상의 관리자였다. 수없이 많은 생명체를 관리했고 그 안의 모든 것을 알았다.
그는 진정한 의미의 전지자(全知子).
‘아.’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그는, 문명과 정보의 신이로구나.”
그렇다. 그것이… 바로 그가 가지고 있던 진정한 위(位)였다.
*
하와는 인간 동료들과 함께 있는 대하의 모습을 지켜보며 조용히 인상을 찡그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대하와의 대화는 그녀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웃기지도 않는군. 설마 내가 허세를 떨어야 하는 상황이 올 줄이야.”
그렇다. 그것은 명백한 허세였다.
물론 하와는 대하에게 보여주었던 이미지를 그대로 행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많은 힘을 잃었다고는 하나 그녀는 여전히 상급 신위를 가진 존재였으니까.
그러나 거기에는 중요한 전제가 붙는다.
‘방해가 없을 경우에.’
다른 장소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녀가 진심으로 힘을 발휘한다면 은하 하나를 통째로 날려 버릴 수도 있을 정도니까.
그러나… 그 장소가 문명이 싹튼 행성이 속한 곳이라면 이야기가 좀 다르다. 해당 문명을 수호하는 성계신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그녀가 상급 신위를 가지고 있다면 그건 성계신도 마찬가지다. 비록 창조신의 위(位)를 가진 그들의 전투력은 대단치 않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더욱 공격하기 껄끄럽다. 그들의 힘은 방어와 보호에 특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명이 발달하여 우주의 구조를 대략적으로 파악한 생명체들이 난데없는 운석 낙하나 돌발적인 사고로 자신들이 멸망하지 않을까 불안해하는 경우가 왕왕 존재하지만, 사실 그건 다 쓸데없는 걱정이다. 문명의 수호자인 성계신이 지키고 있는 한 그런 일은 절대로 없다. 지근거리에서 초신성이 폭발해도 괜찮을 정도로 성계신의 보호 능력은 막대한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지.”
대하가 열쇠로 스스로의 피를 깨웠을 때, 그녀는 도망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일시적이나마 상급 신성을 깨운 그에게 [인식]되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지.’
대하는 틀림없이 상급의 신성을 깨웠지만 엄밀히 말해 그 전투력은 중급 초월자에도 못 미쳤다. 만약 전신 아레스가 없었다면 그렇게까지 일방적으로 적을 유린하지는 못했으리라.
신성(神聖), 신위(神位), 신격(神格).
그것은 초월자들을 떠받치는 근본이며 그 세 가지가 삼위일체를 이루어야만 신으로서의 진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기형적이게도, 상급 신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에 걸맞은 신격과 신위가 없었다.
상급의 신성, 하급의 신위, 그리고 필멸자의 격.
간혹 초월자도 아니면서 하급 신위나 신성, 혹은 신격을 얻는 존재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처럼 극단적인 경우는 그녀로서도 듣도 보도 못했다.
“그나마 지금은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계집이 신성의 조각을 가지고 있었다니… 그와 관련된 미래였기에 내 전지의 영역에서 벗어났던 건가.”
중급의 신성, 그리고 필멸자의 위와 격.
불완전하던 신성이 완성되어 나타난 결과였다. 그 기형적인 형태만큼 능력 역시 극단적이다.
‘그가 지금 나에게 명령을 내린다면?’
그의 명령을 한 번 거부했던 하와였지만 지금 와서 다시 명령을 [듣게] 된다면 거부할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가 없었다.
-나와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털끝만치의 해도 끼치지 마, 하와.
기억한다. 그 가슴이 철렁하던 느낌.
그저 시험 삼아 그가 명령하는 것을 방치했다가 상상도 못한 감각에 발작하듯 저항했었다. 분명 전력을 다해 그를 해치려 했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애교에 가까운 앙탈뿐. 심지어 그 앙탈조차도 그의 몸에 털끝만 한 해도 끼치지 못했다.
“역시 어쩔 수 없었어.”
지금이야 [명령]을 내리기 전에 자리를 피할 수 있으니 그의 명령에 종속될 위험도 없다. 그의 목소리가 직접 그녀에게 닿지 않는다면 명령권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니 그의 명령이 목구멍을 지나 말로 구현되는 그 순간 자리를 피한다면 그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 것.
하지만 그가 열쇠를 사용해 또다시 신혈을 깨우게 된다면?
그때는 그의 인식 범위 안에 들어가는 순간 도망도 못 치고 종속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녀가 대하에게 한 건 낯이 뜨거워질 정도로 질 낮은 협박이었지만, 그가 또다시 신혈을 깨우는 상황만큼은 막아야 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과연 괜찮을까.”
하와는 다시 대하를 바라보았다.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포근해지고 모든 걸 그에게 맡기고 싶은 마음이 들불처럼 일어난다.
기계 생명체인 그녀의 입장에서는 웃기는 이야기지만, 그건 이성이 아닌 감성의 영역이다. 그녀는 냉철한 이성으로 자신의 감성을 억누르고 있는 것이다.
‘그가 아레스를 탈 때부터 짐작했어야 했는데.’
전신(戰神)의 위상을 근본으로 삼은 아레스는 진정한 전사(戰士)만이 탈 수 있는 기체다. 평생을 치열한 전장을 전전하며 초월경에 오른 자가 아니면 아레스는 그 어떠한 경우에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중급 신위를 가지고 있던 초월자조차도 조건이 안 된다는 이유로 그를 타지 못했고, 전투는 경험했지만 전쟁을 경험해 보지 못한 무인 역시 그에게 거부당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아레스는 스스로 그를 태웠으며 그가 혹여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언제나 전전긍긍했다. 그를 단순한 조종사로서 보는 것이 아니라 [대하]라는 특별한 개채로 인식한 채 사랑과 애정을 품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와 역시 마찬가지다.
후비적.
아무도 안 보는 사이 슬쩍 복도 구석으로 이동한 대하가 코를 후볐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고 금세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돌아왔지만 하와는 틀림없이 보았다. 정말이지 꼬질꼬질한 모습.
그러나.
“미쳤어.”
그 모습조차 너무나 사랑스럽다.
“미쳤어…….”
아무도 보지 못하는 전함의 구석진 곳.
상급 초월자다운 정신력으로 헤실헤실 피어오르는 미소를 짓눌러 낸 하와가 조용히 절망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