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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6 장미 꽃다발
“협의이혼합의서?”
“응. 부탁해.”
꾸벅 고개를 숙이며 세레스티아가 말했다.
“딱 3개월 만 결혼해 줘.”
차분하고 침착한 부탁에 나 역시 차분하고 침착하게 답해주었다.
“싫어.”
“…….”
잠시 뻥진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그러나 뭘 어쩌란 말인가? 상황이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데.
뭘 보냐는 내 표정에 세레스티아가 이마를 짚는다.
“아니… 와. 뭐 이런 철벽이 다 있냐.”
“철벽이 아니라 이게 당연한 거지.”
단칼에 자르자 세레스티아의 표정이 시무룩해진다.
“그 당연한 걸 당해보지 않아서 가슴이 쓰리다……. 으으, 단호해. 나한테 거부당했던 남자들도 이런 심정이었을까. 그러고 보면 내가 좀 심하긴 했구나. 인과응보야.”
난데없는 자아 성찰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쓸데없는 소리는 됐고. 어쨌든 나는 거절이야. 이득이 없어.”
“이득이 왜 없어? 황족과 맺어지면 그것만으로도 백작에 준하는 권리를 얻게 돼. 더불어 황실에서 매년 천문학적인 품위 유지비가 제공되고 테라포밍된 행성이나 전용 전함 중 하나를 선택해서 받게 된다고.”
“하지만 이혼할 거라면서?”
“대여가 아니라 증여니 상관없어! 네 과실로 인한 이혼이라 하더라도 권리는 다 그대로 남거든? 굳이 나라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황족이랑 결혼하면 정말 대박이야! 기가급 전함을 타고 지구로 금의환향할 수도 있다구!”
“…어차피 남들한테 보이면 안 되는데 금의환향은 무슨.”
내 전함이 생긴다는 말에 슬쩍 마음이 동했지만 역시나 고개를 흔든다. 그리고 그러자 세레스티아가 뚱한 표정을 짓는다.
“그럼 대체 어떻게 해야 내 부탁을 들어줄 건데? 이거라도 줄까?”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귀에 걸고 있던 귀걸이를 빼 든다. 금색으로 반짝이는 십자가 모양의 귀걸이는 내가 목에 걸고 있는 열쇠와 마찬가지로 타인에게 인식되지 않는 힘을 가진 물건이다. 다른 이도 아니고 초월자인 모르네조차 인식하지 못했을 정도니 보통의 물건은 아닐 것이다.
“그게 뭔데?”
“뭐긴, 뭐야. 내가 지금 가진 것 중에서 가장 큰 가치를 지닌 보물이지. 내가 태어나면서 받았고 평생을 가지고 다닌 물건이야. 자격이 안 되는지 깨울 수도 없는데 노리는 놈은 많아서 온갖 고생을 다 시키는 원수 같은 녀석이지만… 어쨌든 보물이지.”
“어쨌든 보물이라니.”
귀하다는 건 알겠는데 온갖 찝찝한 설명이 다 달려 있어 헛웃음만 나온다. 즉 귀하긴 귀한데 거의 폭탄이나 다름없는 물건이란 말이 아닌가?
“대체 용도가 뭔데?”
“나도 정확히는 몰라. 초대 황제께서 가지고 있던 신기(神器) 중 하나인데 이걸 일깨울 수 있는 자가 황실에 있다면 레온하르트 제국이 온 우주에 그 이름을 떨칠 거라는 유언 때문에 상징성 하나는 어마어마하지. 그래서 그 가격이 어지간한 넘버링보다도 비…….”
우우웅------!!!
그런데 그때 세레스티아의 손에 들린 귀걸이가 크게 공명했다. 세레스티아는 깜짝 놀라 손으로 귀걸이를 움켜쥐려고 했지만 그보다는 귀걸이에서 구체로 뿜어진 빛이 그녀를 튕겨낸 것이 먼저였다.
“우왓?!”
거세게 튕겨 나간 세레스티아의 비명 소리가 들렸으나 거기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어느새 허공에 떠 있는 한 쌍의 귀걸이가 내게 탄환처럼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피할 틈 같은 건 당연히 없었다.
푹!
귀걸이가 심장을 파고들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리며 신음했지만 고통은 없다.
두근.
심장이 뛴다. 온몸에 피를 공급하는 물리적인 심장이 아니다. 나를 위해 죽어갔던 나폴레옹의 정수(精髓)가 심장에 파고든, 아니, 심장에 녹아든 귀걸이의 기운에 반응해 깨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두근.
맥동한다. 정신이 고양되고 온몸에 힘이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내 등 뒤에서는 빛이 뿜어졌다. 이제는 새삼스럽게도 놀랄 이유가 없는 후광(後光)이다.
‘그렇구나.’
그리고 그 순간 나는 황가의 보물이라던 세레스티아의 귀걸이의 숨겨진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신성(神聖)의 파편이야.’
획득 경로는 알 수 없지만 아무래도 초대 레온하르트 황제는 상급, 아니, 어쩌면 최상급 신이 죽는 광경을 목격한 모양이다. 그리고 그 순간 흩어져 세상의 흐름에 녹아드는 신성의 파편을 수습해 이 귀걸이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 거대한 신성의 파편이 내 안에 스며들어 불완전한 나의 신성을 안정시킨다.
“맙소사.”
나는 아찔할 정도로 솟구치는 힘에 신음했다. 물론 열쇠를 이용해 신으로 각성했던 때만큼은 아니다. 그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겠지. 그러나 신성이 내 안에 녹아들면서 벌어진 현상은 실로 놀라웠다.
파라라락--!
눈앞으로 한 권의 책이 떠올라 자동으로 펼쳐진다. 표지에는 아무런 글자도 없어 제목조차 알 수 없었지만, 펼쳐진 페이지에 떠오른 소제목은 매우 익숙한 단어다.
-나폴레옹.
눈이 아래로 향한다. 소제목 아래에 위치한 내용은 단 세 줄에 불과하다.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
<마렌고의 질주>
<죽지 않는 황제>
그것은 나폴레옹이 가지고 있는 어빌리티의 나열. 그리고 그것들을 보는 순간, 나는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깨달았다.
“내 사전에…….”
심장이 뛴다. 아이언 하트가 맥동하기 시작했다.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
고오오오-----!
주변 공기가 훅 하고 밀려난다. 목적성이 없는 증폭이었던 만큼 증폭된 영력이 몸 안에서 끓어오를 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주변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어이가 없군.’
너무나 급작스러운 상황에 당황스럽다. 제대로 된 이능을 배워본 적도 없는 내 심장 속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영력이 끓어오르고 있으니 어찌 황당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정말 놀랄 것은 그 다음이었다.
[목표물을 손에 넣었구나.]
나와 또래 정도로 느껴지는, 약간의 울음이 섞여 있는 목소리가 들린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 정도에 불과하네……. 앞으로는 너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해.]
목소리는 너무나 친숙했다.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임에도 그랬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목소리에 가득한 애정은 가슴이 덜컹할 정도다.
[힘내렴.]
그 말을 끝으로 목소리가 잦아든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그게 누구의 목소리인지 깨달았다.
“…어머니?”
신음하듯 중얼거렸지만 목소리는 이미 끝났다. 그것은 내가 태어날 때 즈음의, 그녀가 내 미래를 예지하던 그 순간의 목소리였다.
“뭐야, 대하 너 괜찮아?”
잠시 주변에서 지켜보고 있던 세레스티아가 다가와 물었지만 나는 대답할 정신이 아니었다.
‘말도 안 돼. 예지했다고? 지금 이 순간을? 나를 우주로 보낸 것이,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친아버지의 유품이라는 열쇠로 [신혈의 봉인]을 해제해 상급 신의 힘을 얻었을 때조차 나는 내 미래를 보지 못했다. 내 미래는 그 누구도 볼 수 없는 완전한 암흑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나 정확한 예지가 가능했다니.
그냥 대충 던진 예지가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신혈이야 그녀가 예상한다 해도 이상할 게 하나 없다. 하지만 내가 이 넓은 우주에서 하필 레온하르트 제국의 황녀를 만나 그녀가 가진 신성의 파편에 접촉할 것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알 수 있다니. 심지어 신성의 파편이 내 몸에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나를 위해 스스로의 존재 자체를 희생한 나폴레옹의 정수 덕분이다. 만약 내 심장에 나폴레옹의 정수가 깃들어 그릇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면 신성의 파편은 내 몸에 머물 수 없었겠지.
만약 나폴레옹의 정수가 없었다면 내 신성에 반응해 끌려왔던 파편은 그냥 흩어져 소멸하거나 그 엄청난 힘을 폭주시켜 영자 폭발을 일으켰을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일이 그렇게 된다면 나는 절대 살아남을 수 없다.
‘그렇다는 말은… 어마니가 이 모든 상황을 예지했다는 말이잖아?’
그렇다. [모든] 상황이다. 내가 우주로 나와 세레스티아를 만나고 나폴레옹이 나를 위해 희생하는 모든 상황을 다 예지하지 않으면 이런 결과를 유도할 수 없다. 조금만 삐끗해도 그냥 끝장인 상황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가정.
‘하지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상급 신의 힘을 가진 상태에서조차 엿볼 수 없는 미래를 그 먼 옛날에 예지하다니. 물론 어머니는 대마녀의 자질을 타고났다고 했었지만, 대마녀라고 해 봐야 고작 인간일 뿐이지 않은가?
‘아니, 잠깐만.’
그런데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이제… 지구로 돌아가도 되는 거구나.’
내가 우주로 나오게 된 건 어머니의 예지 때문이었다. 하늘 아래 살 방도가 없다는 그녀의 예지는 우주를 가리키는 것이었고 나는 살기 위해 쫓겨나듯 지구를 나올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러나 나는 방황했다. 일단 우주로 나온 건 좋은데 언제 돌아갈지 알 수 없었기 때문.
그러나 그녀가 남긴 몇 마디의 말은, 지금 내가 얻은 이 신성의 파편이 우주로 나온 [목적]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즉 그 목적을 이루어낸 난 더 이상 우주에서 방황할 필요가 없다는 뜻. 물론 여기에서 지구까지의 거리는 천문학적이지만 신급 기가스인 아레스는 단독으로 우주 비행이 가능한 기체니 원하기만 한다면 지구로 돌아가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으리라.
“대하야? 너 괜찮아?”
그런데 그때 세레스티아가 다가온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응. 멀쩡해.”
“정말로? 너 지금 뭔가 엄청 끓어오르는 느낌이야. 불길할 정도는 아닌데 뭔가 위태위태한걸.”
“그냥 약간의 변화가 있었을 뿐이야.”
그렇게 말하며 몸을 추스른다. 그리고 그런 나를 보며 세레스티아가 물었다.
“아, 저기 좀 혼란스러워 보이는데 이런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머뭇머뭇하면서 세레스티아가 물었다.
“내 귀걸이는?”
“…….”
나는 귀걸이에 대한 것들을 떠올렸다. 세레스티아가 태어나면서 받은 후 계속 가지고 다닌 물건이라는 점, 노리는 녀석들이 많아 온갖 고생을 다 시킨 원수 같은 물건이지만 그럼에도 평생을 지켜온 레온하르트 황가의 보물이라는 점, 자체적으로 대단한 효과는 없지만 상징성 때문에 넘버링보다도 비싸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나에게 완전히 녹아들어 더 이상 세상에 없다는 점 까지…….
‘아이고.’
절로 신음이 새어 나온다. 당연하지만 나는 여기서 ‘그게 뭔데? 난 몰라, 배째!’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뻔뻔한 인간이 될 수 없다. 되고 싶지도 않고. 아니, 그걸 넘어서.
‘그런 보물이 없어졌는데 그냥 잘 모르겠다고 넘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행성 대여섯 개를 팔아도 살까 말까 하다는 넘버링과 맞먹는 가치를 지닌 보물이라고 했으니 당연히 조사가 들어올 것이다. 어쩌면 세레스티아가 입을 다물어줄 수도 있지만 그녀에게 일방적으로 그만한 부담을 전가할 수는 없다.
“하 이것 참… 나 아직 어린데. 고딩인데.”
“대하야?”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에 의아해하는 세레스티아를 두고 깊은 한숨을 내쉰다.
아무래도 난.
고 3이 되기 전에 이혼할 팔자인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