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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머리 위에-84화 (84/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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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6 장미 꽃다발

그대로 그녀를 붙잡고 식당에서 탈출했다.

위잉.

자동으로 닫히는 식당 문을 뒤로하고 성큼성큼 걷는다. 세레스티아는 나에게 손을 잡힌 채 끌려오고 있다.

물론 정도 이상의 능력자가 우리의 모습을 본다면 이것을 ‘끌려’온다고 표현하기에는 좀 애매하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세레스티아는 늘씬한 체구를 가진 미소녀이지만 동시에 나를 십수 배 압도하는 힘을 가진 능력자이기도 하다. 만일 그녀가 저항할 마음이 있다면 내가 온몸을 다 던져 매달려도 한 발짝 밀어내기도 힘든 게 현실이니 이건 끌려온다고 하기보다 따라와 준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지.

‘대체.’

그리고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나는 그녀를 잡아끌면서도 이를 갈았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완전히 방심하다가 턱을 얻어맞은 복서 같은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녀의 색다른 모습에 멍하니 있다가 제때에 자리를 피하지 못했다. 세레스티아가 달려온 것도 아니고 나는 칭호를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긴장하고 있었다면 그녀의 목적을 눈치 채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는데 그냥 넋을 놓고 있다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우뚝.

그리고 마침내 아무도 없는 폐허에 도착한다. 세퍼드 대전에서 파괴된 장소 중 하나로 우선순위에서 밀려 아직 복구되지 않은 지역이다.

“어머. 이런 외딴 곳으로 끌고 오다니 무슨 짓이야?”

“무슨 짓? 야, 너 대체 이게 무슨…….”

“개수작이냐고?”

“…….”

방긋방긋 웃으며 말하는 세레스티아의 모습에 멈칫한다. 미소는 화사하다. 반짝인다고 해도 좋을 정도여서 누구라도 넋을 잃고 바라볼 정도.

그러나 나는 물었다.

“왜 네가 화를 내는 거야?”

“뭐? 아냐, 아냐. 흠. 좀 서운하긴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니까.”

방긋방긋 웃는 그녀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린다.

“아닌데. 완전 진심으로 화났는데.”

“아니거든?”

“화났잖아?”

“…아니야. 아니, 그보다!”

버럭 소리를 지르며 세레스티아가 화제를 전환한다.

“너 지금 할 말이 그런 거 밖에 없어? 내가 꽃다발 들고 찾아왔는데?”

“아, 맞아. 그러고 보니.”

그녀의 말에 짝, 하고 손뼉을 치자 세레스티아가 웃었다.

“그래. 그러고 보니?”

“그러고 보니…ㅋ 이게 웬 개수작이야?”

“…….”

세레스티아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는 모습이 보인다. 이를 악물고 참는 모양이긴 한데 표정 관리가 잘 안 되고 있었다.

‘이제야 좀 사람 같군.’

웃기는 말이지만 아까의 그 고결하고 몽환적인 분위기보다 지금의 세레스티아가 더 편하고 보기 좋다. 가뜩이나 특별한 오오라를 풍기는 그녀가 잔뜩 꾸미고 분위기를 잡으면 비현실적인 느낌까지 드니까.

하지만 그런 것과 별개로 지금 상황을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이제 어쩔 셈이야? 그 많은 사람 앞에서 수작을 부리다니. 너 황녀면서 막 이래도 돼?”

“흥. 내가 한다는데 누가 어쩐다는 거야? 어차피 아버지도 내 결혼은 내가 알아서 하라고 하셨어.”

아주 막가자는 태도에 눈살을 찌푸린다.

“그쪽이 아니라 내 입장도 생각해야지. 아무리 그래도 동의조차 없이 이런 짓을 벌이다니. 미리 말해두지만 나 이런 거 싫어. 솔직히 말하면 혐오하는 수준이야.”

서로의 마음이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공개적인 고백은 폭력이나 다름없다. 여론을 등에 업어 거절하는 걸 막아보겠다는 수작이 아닌가?

그러나 세레스티아는 내 날카로운 반응 따위는 간지럽지도 않다는 듯 눈웃음을 지었다.

“그런 것치고는 화가 안 났는걸.”

“아닌데. 완전 진심으로 화났는데.”

“아니거든?”

“화났다니까?”

뭔가 아까 했던 대화가 상황만 이상하게 달라져서 반복되는 상황에 눈살을 찌푸리자 세레스티아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러자 허공에 내 얼굴이 떠올라 마치 거울처럼 내 표정을 비춰준다.

“잘 봐. 이게 화난 얼굴이야?”

“…….”

대답하지 못한다. 그녀의 말대로다. 거울처럼 내 얼굴을 보여주고 있는 영상에는 짜증도 분노도 없다. 다만 굳이 감정의 편린을 읽어내라면 약간의 당혹감 정도다.

세레스티아가 말했다.

“넌 화가 안 났어. 조금 놀랐을 뿐이지.”

사랑하는 사람이 사람들 앞에서 고백을 한다면 기쁠 것이다. 감동할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그, 혹은 그녀가 자신을 위해 용기를 내주었기 때문이다.

반면 싫어하는 사람이 사람들 앞에서 자신에게 고백을 한다면 혐오감이 들 것이다. 자신을 난감하게 만들고 구석으로 모는 상대가 더더욱 싫어지겠지.

그리고 난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사랑의 감정은 당연히 없겠지만… 싫지 않았지? 하긴 당연해. 나 같은 미녀가 꽃다발을 내미는데 진심으로 싫어하면 그게 이상한 놈이지.”

“…그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의 근원은 대체 뭐냐?”

“뛰어난 미모와 화통한 성격. 엄청난 재산과 전 우주적인 영향력.”

아, 그리고 황족으로서의 권력도 있네, 하고 덧붙이는 그녀의 모습에 헛웃음이 나온다. 부정하고 싶지만 다 사실이라는 점이 짜증 난다.

“재수 없어.”

“날 시기하는 사람이 가끔 그런 말을 하긴 하지. 그조차도 많지 않지만.”

그렇게 말하며 내 팔을 휙 하고 잡아당기는 그녀에게 끌려간다. 역시나 힘에서 압도적인 차이가 나는지라 정신을 차리고 보니 코가 맞닿을 정도로 그녀와 가까워진 상태다.

“뭐, 뭐하는 거야! 붙지 마!”

기겁하는 내 모습에 세레스티아가 입술을 삐죽댄다. 내 태도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과민반응하지 말고 이거나 받아.”

“뭔데?”

“뭐긴 뭐야, 저번에 그 뜻이지. 아무래도 모르는 모양이지만… 데탈트의 황금장미는 모든 연인이 받길 바라는 보물이야. 이걸 연인에게 넘겨주는 건 가장 세련된 프러포즈 방법이지.”

태연한 말에 헛웃음이 나온다.

“그러니까 그 많은 사람 앞에서 프러포즈를 하셨다? 우주 아이돌께서?”

지구로 치면 리프(Leaf)가 사람들 앞에서 일반인에게 프러포즈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 상황이다. 동아시아 최고의 아이돌이자 한국에서는 국민 여동생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그녀가 일반인과 연애도 아니고 갑자기 결혼을 하려 들면 어떻게 될까? 심지어 고백하는 쪽이 아이돌이라면?

‘심지어 지금 상황은 그것보다 심해.’

세레스티아는 리프랑은 노는 물 자체가 다르다. 그녀는 세계를 넘어 우주 아이돌이라는 여러모로 초현실적인 칭호를 가진 존재인 것이다. 지구에서 리프에게 청혼 받으면 신상 좀 파이고 댓글로 욕 좀 먹는 정도로 끝나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서는 그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암살자가 찾아올 수도 있었다.

“우와. 진심 싫은 표정.”

“진심 싫으니 진심 싫은 표정이 나오지, 이 멍청아. 안 된다면 안 되는 거지 이게 무슨 민폐야?”

“흠… 좀 별로였어?”

“많이 별로.”

“좋아할 줄 알았는데.”

“이런 걸 어떤 미친놈이 좋아해?”

기가 막혀 반문하자 세레스티아가 그게 무슨 질문이냐는 표정으로 말한다.

“내가 하는 거라면 인사 대신 칼을 꽂아도 좋아해야지.”

“…….”

할 말을 잊는다. 물론 농담이겠지만 이쯤 되면 자기애 끝판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각할 정도로 예쁜 그녀가 자신이 얼마나 예쁜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

그나마 그녀 자신이 대단한 권력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만큼 주변 사람들을 이용해 먹는 버릇이 없는 게 다행이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으니 그냥 자기 객관화(…) 정도에서 그치게 된 것이다.

“어쨌든 이것 좀 봐! 나 그래도 오늘 꽤 꾸미고 나왔는데. 좀 설레지 않았어? 여왕의 기사단에서 그렇게 애원하던 치마도 입어봤는데.”

마치 춤을 추듯 나풀나풀 움직이는 세레스티아의 모습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악의는 없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역시 피곤하다.

이 녀석, 경험 많고 철두철미해 보이면서도 종종 이렇게 얼빠진 면을 보이고는 한다. 그건 아마도 그녀가 항상 자신의 미모와 직위에 걸맞은 대우를 받으며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거나 이러는 이유가 대체 뭐야? 나한테 반했다는 헛소리는 하지 말고.”

물론 그녀와 나의 관계는 나쁘지 않다.

처음이야 그냥 우연히 길가다 만난, 딱 그 정도의 관계였으나 함께 비인들의 전함 대천공으로 납치되고 다시 탈출하면서 꽤 친밀함을 느끼는 관계까지 진척이 된 상태다. 함께 적과 싸우고 탈출 방법을 강구하면서 동료애도 생겼고 그녀가 나를, 내가 그녀를 구하면서 어느 정도의 믿음 역시 생긴 것이다. 사실 이 정도쯤 되면 연인이 되어도 굳이 이상할 상황은 아니지만.

‘우린 그런 사람들이 아니지.’

그렇게 보면 꽤 닮은 성격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녀도 나도 감성에 휘둘리는 스타일이 아니어서 헐리웃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위기 하나 같이 겪었다고 단번에 눈이 맞아서 키스신으로 엔딩을 맞거나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냥 예전보다 좀 더 친해진 딱 그 정도. 그런데 그 상황에서 그녀가 나에게 프러포즈를 한 것이다.

“흠.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남편이 좀 필요해.”

“…뭐?”

“정확히는 결혼을 해야 하는 사정이 있어서.”

그녀의 말에 일단 떠오른 건 황실에 관한 것이었다. 왜 그런 이야기가 종종 있지 않은가? 황권에 도전하려면 결혼을 해야 한다든지 기혼자만이 특정한 권한을 얻는다든지.

하지만 이내 의문이 고개를 든다.

“근데 왜 나야? 황족으로서의 의무 뭐 이런 것에 관련된 문제면 차라리 다른 황족이나 귀족들하고 이어지는 게 더 좋지 않아?”

권력을 가진 자들끼리 정략혼으로 맺어지는 건 흔히 있는 일이다. 귀족들이 존재하던 중세 시대뿐이 아니라 현대의 지구에서도 정략혼은 얼마든지 존재할 정도니까.

그런데 세레스티아는 뜻밖의 말을 했다.

“나는 혼자 살 거야.”

“…하?”

잠시 어안이 벙벙하다. 이게 뭔 소리야? 결혼해 달라더니 혼자 살 거라고? 황당해하는 나를 보며 세레스티아가 설명했다.

“번거롭게 되었다면 미안해. 하지만 사정이 있어서 결혼은 해야 하고… 그래서 나와 결혼할 자격이 있으면서도 군말 없이 떠나가 줄 수 있는 남자가 필요했어.”

그렇게 말한 세레스티아가 품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그것은 새끼손가락만 한 금속 막대기였는데 내가 그걸 잡자 마치 두루마리가 펼쳐지는 것처럼 홀로그램이 떠오른다.

나는 거기에 쓰여 있는 글자를 읽었다.

“협의이혼합의서?”

“응. 부탁해.”

꾸벅 고개를 숙이며 세레스티아가 말했다.

“딱 3개월 만 결혼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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