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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머리 위에-83화 (83/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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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6 장미 꽃다발

대전쟁(The Great War)은 전 우주를 대상으로 수백억 대나 팔린 신뢰도 높은 시뮬레이션이다.

대전쟁을 개발해 냄으로써 레온하르트 제국은 어마어마한 수익과 명성을 함께 얻었다. 제국 클래스의 세력이라 해도 근접한 은하가 아니라면 그 이름조차 알리기 힘든 대우주에서 수백 개가 넘는 세력에게 그 존재감을 선명히 각인시킨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만큼 레온하르트 제국은 일종의 국책사업으로서 대전쟁을 관리했다. 전투기술부(部)를 만들고 황실에서 직접 책임자를 임명하여 그 시스템을 보완 발전시켜 나간 것. 그리고 그렇기에 대전쟁의 상세 데이터는 국가 기밀로 쉽게 열람할 수 없다. 신호에 따라 대하를 발견한 알바트로스함의 기술진이 최종적으로 그를 조종사가 아닌 전자계열 초능력자로 인식하는 실수를 저질렀던 것 또한 그런 이유 때문.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클리어 스테이지와 점수뿐이다.

그들이 할 일은 점수에 따라 조종사 후보생을 포섭한 뒤 상세 내용을 윗선에 보고하는 데에서 그치며 그들 스스로 전투기록을 직접 확인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월권행위이다. 조종사의 전투 방식과 습관이 담겨 있는 전투기록은 해당 조종사를 공략할 약점 역시 보여주기 때문에 그들은 자체적인 판단이 아닌 규칙에 따라 조종사 후보생을 포섭하며 전투기록은 암호화되어 본성에 전달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자, 모두 잘 보았다면 뭐라고 말 좀 해보게.”

드디어 그 전투기록이 본성에 도착해 전투기술부에 공개된 상태였다.

“흐음…….”

“신음만 하지 말고 뭐라고 말 좀 해보라니까. 자네가 보기에 이건 어떤가?”

“아니, 잠깐 기다려 봐. 흠. 이거야 원… 놀랍군. 이거 마치… 진짜로 대전쟁을 플레이 한 것 같지 않은가?”

“무슨 능력인지 경지가 보통이 아니군. 심지어 메인 서버에서도 오류를 찾을 수가 없다니.”

“대전쟁의 시스템이 조작된 전례가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이건 정말 엄청나군. 그 어떤 어색함도 없이 자연스럽게 전투를 이어나가고 있네. 게다가 이 기교를 보라고. 이건 적어도 트리플 이상의 능력이 모여 만들어진 능력이야. 정보계열 능력이 없다면 이런 디테일은 살릴 수 없네.”

온갖 기기로 가득 찬 방에 있는 세 명의 노인은 놀랍다는 표정으로 정신없이 전투기록을 살피고 있다. 단순히 영상을 살피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 움직이는 시스템까지 확인하고 있는 것.

그리고 그런 그들의 말에 중앙에 앉은 금발의 중년 남성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현실 도피 그만하고 제대로 분석해. 다 잘리고 싶어?”

“허허. 하지만. 허허허.”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12억 8,000만 점이라니.”

세 노인 모두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짓는다. 어떻게든 평온을 유지하고 있지만, 다들 눈가가 파르르 떨리고 있다.

그리고 그들을 대표해 기다란 귀를 가진 푸른색 머리칼의 노인이 묻는다.

“설마 이게 실제 플레이 화면이란 말인가?”

“당연하지. 애초에 시스템 명령어를 전혀 안 건드리고 전투기록을 조작한다는 게 말이나 될 법한 소리냐? 아니, 설사 그게 가능하다 해도 왜 그런 짓을 하는데?”

이미 만들어진 시스템이 외부로부터 조작되는 건 머나먼 과거부터 셀 수 없이 일어나던 일이다. 원래 방어보다 공격이 쉬운 법이고 어마어마한 재화와 인력이 모여 만든 시스템이라고 해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공격에 뚫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경우가 전혀 달랐다. 어떤 수치 하나가 아니라 게임 플레이 전체가 자연스럽고 원인과 결과가 다 맞아떨어진다면 그건 시스템 조작이 아니라 그냥 정상적인 플레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점수는 좀 아니지 않나? 게다가 저런 말도 안 되는 플레이는 기간트 마스터도 불가능해. 아무리 대단한 천재라도 저 많은 어빌리티를 전부 달인급으로 다룰 수는 없어.”

한국 사람이 영어를 하는 건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다. 외국어를 배우는 것이 쉬운 일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시간과 노력이 있다면 충분히 원어민 수준으로 학습할 수 있는 테니까.

마찬가지로 3개 국어를 하는 것도 놀라울 건 없다. 언어적인 재능이 있다면, 4개 국어, 5개 국어를 원어민 수준까지 익히는 경우도 그리 드물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대하가 보이는 이 모습은 그 모든 상식을 초월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 기록을 봐! 어빌리티가 매일 달라! 겹친 걸 제외해도 지금 확인된 것만 50개가 넘는 어빌리티를 다루고 있네! 게다가 이 기교들은 대체 뭔가? 아이언 하트의 영력을 자기 심장에 있는 마력 다루듯 쓰다니. 게다가 이놈 몇 살이야?”

“20년도 못 살았다던데.”

“그래, 20년! 이게 말이나 될 법한 일인가?”

언어적인 재능이 있다면, 그리고 환경이 받쳐 준다면 어린 나이에 2개 국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구사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나 5살짜리 소년이 2개 국어도 10개 국어도 아닌 한 200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한다면 어떨까? 해당 언어의 모든 단어의 뜻과 뉘앙스까지 완벽히 파악한다면?

그건 재능의 문제가 아니다.

이상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가 살아온 그 짧은 생은 그 엄청난 역사를 이루기에 너무나 짧기 때문이다.

“이럴 게 아니라 일단 불러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확인해야 해!”

평소 점잖은 모습들에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한 반응이다. 그들이 받은 전투기록은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투기록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그는 온 우주의 전쟁사를 다시 쓸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흥분한 이들을 보며 현 전투기술부의 장관, 로스타 레온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인데… 마침 그 녀석이 여기로 오고 있다더군.”

“여기라니. 본성으로?”

“아니, 황성으로.”

“…그게 무슨 소리야. 외부인이 단번에 황성으로 온다고? 혈통, 혈통 입에 거품 무는 꼰대들이 그렇게 많은데 그럴 수가 있나?”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반문한다. 민감한 주제였지만 망설임 없는 태도다. 로스타 레온하르트가 황족이라고는 하나 그들 셋 모두 세계의 이치를 깨달은 대마법사들로 황실 안에서 대접받는 위치였던 것이다.

로스타가 말했다.

“그럴 수 있어. 아니, 그래야 한다고 해야겠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의아해하는 세 노인을 보며 로스타가 웃었다. 그리고 그러다가 손을 흔들자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한 통의 편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양 뿔이 달린 노인은 편지봉투 위에 새겨진 글자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발신자가… 별빛의 여왕이군.”

“윽. 너 손녀뻘 여자애한테 그 별칭을 사용하나?”

“당연하지! 여왕님은 여왕님이야!”

버럭 소리 지르는 뿔 달린 노인의 모습에 옆에 있던 대머리 노인이 말한다.

“하하. 자네 몰랐나? 이 녀석 자네 조카딸 브로마이드도 잔뜩 가지고 있다네.”

“진짜? 나잇값 좀 해라. 이 영감탱이야.”

“후후후. 뭐라 비난해도 여왕을 향한 나의 사랑은 사그라지지 않지. 아니 그런데 왜 갑자기 여왕의 편지를 꺼내는 건가? 혹시 나 주려고?”

“…….”

“허허, 농담일세. 그나저나 진짜 무슨 내용이기에 그러나?”

“별건 아니고. 주례를 좀 봐줄 수 있겠냐고 하는군.”

뜬금없는 말에 뿔 달린 노인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누구의?”

“누구긴 누구야.”

피식 웃으며 로스타가 누구도 상상 못한 폭탄 발언을 날렸다.

“당연히 자기지.”

*

척.

“일어나셨습니까.”

“…아. 네.”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절도 있는 경례에 식은땀을 흘린다. 당연한 말이지만 모르는 얼굴이다. 알바트로스함에서 생활한 지도 꽤 오래되었다 해도 모든 승무원의 얼굴을 다 아는 건 아닌데다 오늘만 해도 몇 십 명이 넘는 사람에게 경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그렇게 일일이 불편해하지 마요. 고마운 마음 때문에 그러는 건데.”

“아니, 아무리 그래도 나는 군인도 아닌데 말이야.”

“군인이 아니어도 전쟁 영웅이지.”

“…너까지 그러기야?”

“사실이니까.”

보람과 동민의 말을 들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라이징 스톰을 제압하고 정신을 잃은 후 한 달 넘게 잠만 잤다. 더 황당한 건 그 한 달의 시간 동안 알바트로스함이 아스트랄 드라이브를 가동해 레온하르트 제국의 본성으로 날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모르긴 몰라도 이 정도 시간이면 이미 대여섯 개가 넘는 은하를 가로지른 상태일 것이다.

‘학교는 어떻게 되는 건지…….’

한숨이 나왔지만 학교 따위를 걱정하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다. 평이하게 등교와 하교를 반복하던 매일과 우주로 나와서 거대 로봇에 탑승해 외계인들과 싸우는 매일은 너무나  달라서 이질감까지 느껴질 정도다.

“그나저나 몸은 좀 괜찮아요? 오래 누워 있었는데.”

“아아. 푹 쉬어서 그런지 오히려 상쾌한 편이야. 하지만 설마 한 달이나 잘 줄이야. 배고파서 죽을 거 같아.”

“흠, 하긴. 영양제가 아무리 좋아도 음식은 아니니까요. 다행히 알바트로스함도 어느 정도 복구되어서 음식들이 꽤 괜찮아요.”

“뭐가 좋은데?”

“지구에는 없는 건데, 탈타라는 국물 들어있는 만두 비슷한 게 되게 괜찮더라고요. 소화도 잘되고… 음?”

팔자 좋게 말하고 있던 보람이 문득 멈칫한다. 왜 그러나 하고 돌아봤더니 저 멀리서부터 사람들이 술렁거리는 게 느껴진다.

“오오… 세상에.”

“과연 여왕인가.”

“아름다워…….”

크지 않게 소곤소곤 속삭이는 소리가 들린다. 그들은 모두 한곳을 보고 있었고, 나 역시 무슨 일인지 궁금했기에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 그들이 바라보는 장소를 찾았다.

그리고 발견했다.

“아…….”

그녀는, 레온하르트 제국의 황녀이자 우주 아이돌이라는 거창한 칭호를 달고 있는 세레스티아는 마치 무게가 없는 듯 사뿐사뿐 걸어오고 있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녀는 대단한 미녀다.

사실 언제나 알고 있었다. 바닷물을 한 올 한 올 건져 만든 것 같은 푸른색의 머리칼, 그리고 머리칼과 마찬가지로 푸르게 빛나는 눈동자, 백옥처럼 하얀 피부.

마치 뛰어난 명공이 완성해 낸 것 같은 외양의 그녀는 그 누구보다 ‘그린 듯한’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위험한 것을, 사건을 싫어하는 나조차도 자꾸만 넋을 잃게 되는 그런 외모를.

하지만 한 달 만에 잠에서 깨어난 지금, 나는 그녀의 진짜 모습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뻐. 세상에.”

옆에 있던 보람조차 숨죽인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질투조차 없이 경탄만이 가득하다.

이제 와서 굳이 그녀가 아름답다는 걸 계속 생각할 이유는 없었다. 그녀의 미모는 굳이 더 말할 필요도 없고 놀랄 것도 없는 당연한 일.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던 나에게조차 지금의 그녀는 너무나 아름답다. 평소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그 모습조차 기억이 잘 안 날 정도였다.

‘그렇군.’

그리고 그 모습에 나는 깨달았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을 꾸민 적이 없어.’

그녀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전투복을 입고 지냈고 머리도 그냥 대충 묶거나 풀고 다녔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화장을 한 적이 없다. 언제나 민낯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누구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할 정도로 그녀는 아름다웠다. 타고난 미모와 카리스마, 그리고 그녀를 휘감고 있는 그 특유의 오오라가 언제나 그녀를 빛나게 만들었던 것.

그런데 그런 그녀가 지금 한껏 자신을 치장하고 화장까지 한 채 걸어오고 있다.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전사처럼, 복장부터 화장, 머리 스타일까지 전력투구를 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건 정말 인정할 수밖에 없군.’

아름답다. 그녀는 소녀 특유의 청순함과 생기발랄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성숙한 여인에게서나 볼 수 있는 농염한 색기 또한 가지고 있었다. 화사한 미소녀로서의 시기와 도도한 미녀로서의 시기가 서로 마주치는 그 어떠한 지점, 바로 그 지점이 꽃봉오리가 만개하는 것처럼 펼쳐져 눈부신 빛을 흩뿌리고 있다.

그 모습은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주변의 현실이 오히려 놀라 부서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또각. 또각.

수많은 사람의 시선 따위는 간지럽지도 않다는 듯 당당히 걸어온다. 그런데 그녀의 손에 뭔가 들려 있었다.

“저게 뭐야. 꽃다발?”

“장미 꽃다발? 게다가 금색이라니. 저거 설마…….”

“누구야, 누가 준 꽃다발이지?”

“아니, 그것보다 황녀님이 그걸 받으셨단 말이야?”

“대체 어떤 사람이지?”

그녀가 누군가의 마음을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승무원들이 술렁거린다.

하지만 아니다. 그 꽃다발은 누구에게서 받은 게 아니었다.

그녀는…….

“잘 잤어?”

술렁이는 승무원들 사이를 가로지른 세레스티아가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러면서 내밀어지는 장미 꽃다발.

그리고 나는 그런 그녀를 향해 손을 뻗어…….

“어?”

“앗?!”

“뭐!?”

그대로 그녀를 붙잡고 식당에서 탈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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