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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5 전신 강림
[…….]
[…….]
[…….]
전장에 침묵이 강림한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전군 돌격.”
명령과 동시에 회색의 거인들이 일제히 돌진한다. 라이징 스톰에서 쏟아져 나왔던 기가스와 전투기들은 즉시 반격을 시작했지만 어림없는 소리다.
콰득! 퍼벙! 쾅!
모조리 제압(制壓)된다. 전투기들은 날개가 잘리거나 엔진이 정지당하고 기가스들은 사지가 잘린 채 우주 공간에 둥둥 떠다닌다. 그리 긴 시간도 필요 없었다. 검과 검이 부딪히는 그 순간, 포격이 발사되는 그 순간 모든 것이 끝난다.
이것들은 그냥 분신이 아니다. 1,000기나 되는 수급 기가스는 하나하나가 [내가] 탄 수급 기가스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고 10기의 인급 기가스 역시 [내가] 탄 인급 기가스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여기에는 [나폴레옹에 탄] 내가 10명, [천둥룡에 탄]내가 1,000명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숫자에서도 불리한데 하나하나의 역량에서도 압도당하고 있으니 어찌 적들에게 승산이 있겠는가?
찌이익-!
삽시간에 모든 기가스와 전투기를 제압한 후 따로 명령을 내린 나는 즉시 라이징 스톰에 돌입했다. 거대 전함인 라이징 스톰에는 당연히 두터운 배리어가 있었지만, 마치 천을 잡아 뜯어버리듯 찢고 갑판 위로 내려선다.
그야말로 한순간. 마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 같은 자연스러움에 아레스가 기겁했다.
[아니, 잠깐. 지금 뭘 한 거야? 전함의 배리어를 찢고 들어와? 이런 어빌리티도 있어?]
“어빌리티가 아니고 초월기야, 바보야. <전쟁의 신>이지.”
그것은 즉발성 기술이라기보다 패시브에 가까운 능력이다. 배리어에 스며들어 방어를 강화하거나 적의 영자 결합을 끊어버릴 수 있는 일종의 오오라를 아이언 하트를 중심으로 반경 50미터에 펼쳐 내는 능력이니까. 원한다면 무기에 주입하여 공격력을 늘리는 데에도 사용할 수 있다.
[위력이야 그렇다 치고 전쟁의 신이라니… 네 초월기 나랑 되게 어울린다.]
“당연히 어울리지 네 초월기인데.”
[…내 초월기는 <전신의 보물창고>랑 <전신의 군세>뿐인데?]
나머지는 어빌리티고, 라고 중얼거리는 아레스에게 답한다.
“나중에 설명해 줄게.”
콰득!
손을 내뻗어 라이징 스톰의 장갑을 뜯어버리고 그 안으로 침입한다. 라이징 스톰의 구조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쿵! 콰득!
쾅!
직선으로 이동한다. 벽이 가로막으면 벽을 부수고 움직일 만한 공간이 나오면 삽시간에 가로지른다. 물론 앞을 막아서는 녀석들이 있었지만.
“막아! 녀석이 동력부로 이동하고 있다!”
“하지만 공격이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신급 기가스라니!! 대체 저런 게 어디서 나온 거야!!”
녀석들은 단지 시끄럽게 떠들기만 할 뿐 내 걸음을 막을 수 없었다. 신급 기가스인 아레스의 배리어는 테라급 전함에 준하는 방어력을 가지고 있었고 라이징 스톰에 그걸 뚫을 수 있는 수단은 주포 사격 정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함선 내에서 그만한 화력을 발휘할 수 있을 리 없지.’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예지]가 발동했다.
콰릉!
오른손을 들어 찔러 들어오는 창을 막아냈다. 어지간한 건물 정도 되는 크기를 가지고 있는 아레스에 비하면 이쑤시개 정도에 불과한 크기를 가진 창을 굳이 손을 들어 막는다니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창을 막는 그 순간 천둥이 치며 주변 공간이 일그러진다.
아레스가 비명을 질렀다.
[대하! 조심해! 나와 같은 넘버링이다!]
넘버링(Numbering). 그것은 우주에 존재하는 초월병기 중에서도 1,000위 안에 들어간다는 강력한 신기들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어지간한 행성 대여섯 개를 그 내용물까지 다 팔아도 하나 사기가 어렵다는 넘버링은 초월자가 들게 되면 동급의 초월자 10명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위력을 가진 병기라고 한다.
사실 초월병기나 넘버링에 특별히 정해진 형태나 효과는 없다. 그것은 총이 될 수도 있고 칼이 될 수도 있으며 적을 파괴하는 데 특화되기도 하지만 사용자를 치유하거나 워프 존을 만들기도 하니까.
일반적으로 초월병기는 그 이름에 걸맞게 병기의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우주를 날아다니는 전함 중에서도 넘버링에 들어가는 특별한 명품들이 존재하고 아레스 같은 신급 기가스들도 초월병기로서 넘버링에 들어가는 것이다. 심지어 [음식을 무한정 생산해 내는 냉장고]라는, 도저히 병기의 형태로 봐주기 힘든 물건들도 넘버링에 들어가 있을 정도니 더 말할 필요도 없겠지.
즉 내가 타고 있는 아레스와 적이 던져 낸 창의 힘은 본질적으로 그리 큰 차이가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단지 나는 넘버링에 탔고 적은 그걸 손에 들었을 따름이니까.
다만 문제가 있다면.
“너와 같은 넘버링인데… 그래서?”
모든 병기가 그러하듯 중요한 건 사용자의 역량이라는 것이다.
끼이익---!!
“크윽……! 이, 이게 무슨…….”
2미터에 가까운 신장을 가진 고풍스러운 인상의 노인이 <전쟁의 신>이 만들어낸 오오라에 둘러싸여 무릎을 꿇었다. 나는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좀 자라.”
털썩.
너무나 간단히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넘버링은 허공에 열린 공간의 틈이 집어삼켰다. <전신의 보물창고>에 들어간 것이다.
[…터무니없군. 이 정도면 상급 신에 맞먹는 힘이야.]
기가 차다는 아레스의 중얼거림에 어깨를 으쓱인다.
“그래 봐야 잠깐이지.”
[잠깐?]
“그래. 그리고 그래서 이렇게 열심히 움직이고 있는 거고.”
콰득! 콰득!
벽을 부수며 직선으로 나아간다. 함장으로 추정되는 존재마저 쉽사리 제압당한 이상 나를 막아설 이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기에 나는 별문제 없이 동력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정지---!! 정지하십시오---!!! 더 이상 접근하시면 교전수칙에 따라 자폭모드에 들어가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동력부에 들어가자 날카로운 여성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려 퍼진다. 내가 동력부에 너무나 가깝게 접근하자 라이징 스톰의 관제인격인 [루나]가 드디어 접촉한 것이다.
“반가워.”
원래대로라면 해치를 열고 일단 아레스에서 내려야 하는 상황이다. [명령]은 내 목소리가 직접적으로 전달되어야만 효과를 발휘하기에 통신으로 상대와 연결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
그러나 지금이라면 상황이 전혀 다르다. 사정이 있어 여기까지 들어왔을 뿐 지금의 나라면 외부에서도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정지하십시오. 더 이상 접근하시면 교전수칙에 따라 자폭모드가…….]
“루나.”
이름을 부른다. 그리고 그러자 시끄럽던 경고음이 당장 멈춘다. 나는 다시 그녀를 불렀다.
“루나.”
[네… 주인님.]
공손한 목소리에 웃는다.
전쟁은 끝났다.
*
탁.
10층짜리 아파트에 가까운 신장을 가진 아레스가 거짓말 같이 작은 소음과 함께 갑판 위에 내려선다. 나는 온몸에 충만하게 차오르던 힘이 점점 사그라지는 걸 느끼며 알바트로스함의 안쪽으로 이동했다. 마음 같아서는 라이징 스톰을 완전히 포획해서 이리로 끌고 오고 싶었지만 시간이 너무 촉박해 그럴 수 없었다.
[대하, 지금 네 힘이…….]
“나도 알아.”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던 전능감이 점점 사그라지고 머릿속을 가득히 채우던 온갖 지식과 미래가 죄다 사라져 가기 시작한다.
[지금] 상태의 나는 전지전능에 가까운 존재지만 원래의 나는 극히 일반적인 지능을 가진 존재다. 아마 지금 내 머릿속에 있는 이 무한한 지식 중 태반을 잃어버리게 되겠지. 꿈속에서 터무니없이 긴 시간을 보낸다 하더라도 깨어나는 순간 그 모든 내용이 신기루처럼 머릿속에서 지워지는 것처럼, 나는 아주 중요한 키워드 몇 개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식을 기억해 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래서 내 미래라도 봐두고 싶었는데…….’
나는 다시금 온갖 정보와 미래를 뒤지다 헛웃음 지었다.
‘막상 내 미래는 볼 수 없다니.’
놀랍게도 전지에 가까운 지금에 와서도 내 미래를 보려고 하면 모든 것이 깜깜하다. 청원을 비롯한 초월자들이 내가 끼기만 하면 예지가 꼬인다고 했을 때는 뭐 그런가 보다 했는데 설마 그게 지금의 나에게조차 통용될 줄은 몰랐다.
그뿐이 아니다.
‘청원은 왜 죽는다는 거지?’
청원을 잡아 후환을 처리하기 위해 그에 맞는 미래를 찾아보았지만 그의 [죽음]만을 읽을 수 있을 뿐 그 외의 어떤 정보도 얻어낼 수 없었다. 그가 왜 죽는지, 누가 죽이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와인가?’
나와 동급. 혹은 그 이상의 존재는 절대권능으로도 읽어낼 수가 없다. 세상 모든 걸 알 수 있을 것 같은 전지의 권능도 다른 상급 신위의 초월자에게는 통하지 않는 것.
‘하지만 그녀가 대체 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의문이 들었지만 더 이상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기이잉--!
아레스의 해치를 열고 밖으로 나오며 그에게 말한다.
“대기하고 있어. 다만 너무 멀리 가지는 말고.”
[차라리 내 안에서 쉬는 게 낫지 않겠어?]
“네 안에서 쉬기는 뭘 쉬어. 몇 달을 쓰러져 있을지 가늠이 안 되는 판에.”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처럼 잠이 쏟아지고 있다. 내 안에서 깨어났던 신성이 사그라지기 시작하면서 점점 더 눈꺼풀이 무거워져만 가고 있다.
“할 일이… 또 뭐 남았지?”
내 안에 깃든 전능의 지식이 다시는 이 상태가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가르쳐 주고 있는 만큼 어떻게든 모든 일을 지금 처리해야 했다. 지금이 지나면 나는 다시 [비천]한 인간이 되고 말 것이니 지금 잠깐만 수고해도 할 수 있는 일을 못 하면 나중에 땅을 치게 될 상황이 될지도 모른다.
‘전쟁도 끝냈고, 라이징 스톰도 침묵시켰고, 분신을 다 보내서 공룡 녀석도 처리했고…….’
점점 깜빡이는 의식을 필사적으로 붙잡으며 숙소로 향한다. 그리고 그러다 손바닥을 쳤다.
“맞아. 큰일 날 뻔했군.”
말과 동시에 오른손을 휘둘렀다.
철퍽!
몸 안을 휘돌고 있던 액체 금속이 바닥에 뿌려진다. 지금껏 나를 억죄고 고통스럽게 했던 형틀이었지만 육체를 초월한 신성에 의해 보호받는 지금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고…….”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린다.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겁고 점점 걷기도 힘들다. 최대한 빠르게 움직였다고 생각했는데도 도저히 숙소까지 이동할 수 없는 상황.
그리고 그때 복도 너머에서 세레스티아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인다.
“대하야!”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마침내 주저앉는다. 신성이 거의 다 사라지며 어마어마한 탈력감이 몰아치고 있다. 당장에라도 정신을 잃을 것 같았기에 그녀에게 부탁한다.
“셀, 미안하지만 나를 숙소로 보.”
그러나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세레스티아가 한껏 상기된 얼굴로 내 이름을 불렀다.
“대하야, 관대하.”
“…왜?”
눈을 반짝이고 있는 세레스티아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린다. 이 녀석은 또 왜 이렇게 신 난 것인지 알 수 없다. 방금 전이라면 의문을 가지는 것만으로 그 이유를 알겠지만, 아니 그걸 넘어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신성이 사라지고 있는 지금에 와서는 그럴 수 없다. 머릿속을 가득히 채우고 있던 대부분의 지식이 사라지면서 특별히 중요한 몇 가지 외에는 전부 잊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나에게 세레스티아가 말했다.
“나랑 결혼 안 할래?”
속삭이는 그녀의 모습은 꿈결 같다. 쓸데없는 생각일지 모르지만… 순간 이 우주에 그녀에게 이 말을 듣기를 소원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하는 잡념이 떠오른다.
그녀는 전 우주적인 아이돌이고 대단한 미녀였으며 또한 엄청난 권력과 힘을 가진 황족이기도 하다. 모르긴 몰라도 그녀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남정네가 어지간한 나라를 세울 수 있을 정도로 많겠지.
그러나.
“이건.”
그런 그들과는 입장도 취향도 다른 내 입에서는 당연히 고운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이건 또 뭔 개수작이야?”
“…….”
그리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