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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5 전신 강림
정신을 차렸을 때 본 것은 넘어질 정도로 고개를 들어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책장이다. 고층 건물 정도를 넘어 마치 산맥을 보는 것 같은 규모로 상대를 압도하는 책장.
거기에는 빈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수 없이 많은 책이 빼곡히 들어차 있어 감히 그 수를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였는데 자세히 보면 그 책들 하나하나가 다 다른 종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유산을 열었구나.”
그리고 그 앞에 한 사내가 있었다.
“하지만 꽤 재미있구나. [전]과 [후]의 특성을 모두 가질 줄이야. 겹치는 부분이 없는 건 아니지만… 최후에는 나도 어느 정도 잃어버린 힘이었는데.”
온화한 인상의 사내다. 전체적으로 호리호리한 체격의 그는 책장에 꽂혀 있었던 걸로 파악되는 책 한 권을 든 채 흥미 가득한 눈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다.
“당신은… 당신은 누구죠?”
당연한 질문이었지만 사내는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시간이 많지 않군. 지금 그 상태가 오래가지 않을 테니 일단 당면한 일부터 처리하는 게 좋겠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이 읽고 있던 책을 덮어 나에게 내민다. 나는 무심코 그것을 받았고, 그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말했다.
“좀 더 자라서 다시 오거라.”
그리고 그 말과 함께 세상이 반전한다.
*
[그만! 그만! 항복이야! 항복이라고!]
다급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다. 정면에 떠오른 화면에는 창백한 얼굴로 연신 소리치는 6황자의 모습이 보였다.
[이익… 이게 뭐야. 침입을 시도조차 할 수 없다니.]
옆에 있는 천사 역시 당혹스러운 표정인 건 마찬가지다. 여태까지의 여유 넘치고 농염한 미소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뭐야.”
[대하! 괜찮은 거야?]
“물론 괜찮지. 아니 그걸 넘어서 그냥 괜찮은 정도가 아닌데?”
몸 안 깊숙한 곳에서부터 미증유의 힘이 끓어오르고 주변 모든 것이 완벽하게 인식되고 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그 [인식]이란 공간을 가르고 나타난 파츠들로 완성된 아레스와 내 앞에 있는 골드리안 정도를 말하는 게 아니다.
저 멀리 있는 알바트로스함과 그 안에 있는 수많은 승무원, 그리고 그들이 나누는 대화 모두가 내 인지 영역에 들어와 있다. 마찬가지로 라이징 스톰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 소리와 출격을 명하는 함장의 고함 소리, 그리고 그의 명령에 따라 출격하는 수많은 전투기와 기가스들의 모습 역시 내 인지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라이징 스톰의 사출구로 쏟아져 나오는 적들의 규모는 상당하다. 라이징 스톰과의 거리가 꽤 있었던 만큼 나와 싸웠던 기가스와 전투기는 워프게이트를 타고 왔던 녀석들뿐이었는데 라이징 스톰 자체가 접근한 지금 남은 모든 병력이 몰려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아주 좋아.”
나를 향해 날아오는 모든 기가스와 전투기가 인식된다. 그뿐이 아니다. 그 안에 타고 있는 조종사들의 모습이 보이고 그들 간의 대화 역시 모두 인식된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전장 전부를 손바닥 위에 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모든 것을 알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전지전능에 가까운 감각.
비록 일정 시간뿐이었지만, 나는 내가 인류의 인식을 벗어난 초월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을 느낀 것은 나만이 아닌 듯 필사적인 외침이 들려온다.
[진정하고 내 말 들어봐! 난 널 죽일 생각이 아니었다고! 이 전투가 끝나고 바로 천국에서 상황을 설명할 생각이었단 말이야!]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당연하지만 질문은 아니었다. 녀석 쪽에서 일방적으로 화면을 보내고 있을 뿐 내 쪽에서는 녀석에게 아무런 통신도 연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겠지 뭐. 무슨 말을 하는지 궁금하기는 하지만 지금 그걸 꼭 알아야 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 순간.
내가 [의문]을 가지는 순간.
“…그렇군.”
나는 알 수 있었다.
[음? 뭐가 그렇군이야.]
“시시한 이야기야.”
나는 6황자가 말하는 ‘천국’이 의미하는 바를 알았다. 그의 목적도, 그가 가지고 있던 계획도 알 수 있었다.
물론 그게 그를 살려둘 이유는 되지 못한다.
[잠깐! 잠깐 기다려! 날 이대로 죽이면 너도 무사하지 못해! 레온하르트 제국 전체를 적으로 돌리게 될 거라고!]
골드리안의 목을 잡고 있는 아레스를 중심으로 퍼져 나가는 어마어마한 영압(靈壓)에 짓눌린 6황자가 소리 지른다.
[너는 절대 이 비밀을 지킬 수 없어! 아무리 신급 기가스에 탔다 해도 청원의 입을 막을 수 없다고!]
맞는 말이다. 사명에 의해 온갖 제약을 받는 청원이었지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목격하고 그것을 황실에 알리는 것은 아무런 제약에도 걸리지 않는다. [거짓]을 말하는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그것이 진실이라면 그의 행동을 막는 그 어떤 방해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하, 어쩔 거냐?]
걱정이 담긴 아레스의 목소리에 피식 웃었다.
그래, 6황자의 말은 모두 맞다. 지금 그를 여기에서 죽이면 두고두고 후환을 걱정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 일을 감출 수 없을 것이고 레온하르트 황가는 황태자 후보 중 하나를 죽여 버린 나를 절대 곱게 보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나는 담담히 말했다.
“감수해야겠지. 그 어떤 미래를 봐도 저 녀석을 살려두는 것 보다는 죽이는 게 낫다는 판단이 나오거든.”
[…미래?]
“그래. 미래.”
수많은 시간이 머릿속에서 폭풍처럼 몰아치고 있었다. 과거, 현재, 미래 모두가 머릿속에서 온갖 정보를 안겨주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상위 이상의 신들만이 가지고 있다는 절대권능.
신은 알고 있다(God Knows).
[안 돼.]
[멈춰요!]
아레스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며 우득, 하는 소리가 들리자 한순간 자신들의 미래를 짐작한 6황자와 천사가 비명을 지른다. 그러나 그것들은 전혀 내 판단을 가로막지 못했다.
쿠오오오----!
아레스의 손에서 일어난 어마어마한 힘이 골드리안의 몸 안으로 파고들어 그 안에 타고 있는 조종사 둘을 이 세상에서 지워 버린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골드리안의 아이언 하트까지 제압해 버렸기 때문에 금빛으로 빛나던 골드리안이 한순간에 침묵한다.
“천현일 소장.”
[엇? 뭐야? 지금 아레스랑 통신이 연결된 거야? 이 목소리는 관대하인가?]
“예. 다행히 아레스가 제때에 나타나 주어서 골드리안을 제압했습니다.”
[6황자와 그 천사는?]
“제압하고 나니 없어져 버렸습니다. 공간을 다루는 탈출 수단이 있는 모양이군요.”
물론 거짓말이다. 그 둘은 죽었고 그 존재는 티끌조차 남지 않았으니까.
‘허무하다면 허무하군.’
그는 황제가 될 운명을 가지고 있던 존재였다. 비록 광기 넘치는 미치광이였지만 그의 유능함은 틀림없는 사실이었고 그는 황족 중에서도 희귀한 혈통과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선택받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영혼의 반려인 천사를 만나 [위대한 핏줄]을 만들어낼 가능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레온하르트 제국의 이름을 온 우주에 알릴 존재가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소용없는 일이지.’
그러나 물론 안타까움을 느끼지는 않는다. 원래 미래는 수많은 갈림길의 연속이니까. 다만 지금의 경우, 그는 선택의 주체가 되지 못했을 뿐이다.
[물을 게 많지만… 괜찮은 거냐? 지금 엄청난 수의 적이 몰려오고 있다.]
“쓸데없는 말씀을.”
그렇게 말하고 손에 들고 있던 골드리안을 알바트로스함을 향해 집어 던졌다. 사출구에 정확하게 집어 던졌으니 별문제 없이 받아낼 수 있을 것이다.
“가자, 아레스.”
[좋아!]
대답과 동시에 아레스의 몸이 빛살처럼 우주를 가로지른다. 아직 이쪽의 정확한 사정을 모르는 라이징 스톰의 기가스와 전투기들이 몰려오고 있었지만 어차피 그들은 우리의 격에 맞는 적이 아니었다.
우우웅------
기가스와 전투기들을 향해 날아가는 아레스의 몸을 회색의 구체가 뒤덮는다. 나는 정신을 집중했다. 아레스는 대부분의 조종사가 죽을 때까지 그 모습조차 보지 못한다는 신급 기가스였지만 나는 그 모든 것이 너무나도 익숙하고 편하기만 했다.
‘일차적으로 기를 꺾어볼까.’
수십 대의 기가스와 수백 대의 전투기가 보인다. 그중 일부는 나를 공격해 들어오고 나머지는 무시하고 지나가려 한다. 나 하나에게 달라붙기보다 알바트로스함을 공격해 6황자를 구해내려 하는 모양이었다.
[무시라니. 거 참. 어쩔까]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 짓는 아레스의 영언에 나 또한 웃었다.
“어쩌긴. 숫자 좀 많다고 쪼개려 들면.”
고오오오오----!
아레스의 몸을 뒤덮고 있던 회색의 영력이 사방으로 뿜어지기 시작한다.
“이쪽도 숫자로 상대해 줘야지.”
수십, 수백을 넘어 천 개가 넘는 회색의 빛이 허공으로 떠올라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다. 그것은 하나하나가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회색빛의 거인. 그들이 앞을 가로막자 라이징 하트의 기가스들이 혼란스러워하는 게 느껴진다.
[이게 뭐야? 이건… 기가스?]
[맙소사!! 이것들 하나하나가 수급 기가스에 맞먹는 영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 심지어 개중 10여 기는 인급 기가스에 맞먹는 영력을… 말도 안 돼!]
여기저기에서 비명이 터져 나온다. 사실 당연한 일이다. 10여 기도 아니고 100여 기도 아니고 무려 1,000여 기의 기가스가 난데없이 나타난 셈이다. 어찌 당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당황하는 건 그들뿐이 아니었다.
[에, 엥?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내 <전신의 군세>는 물론 강력한 기술이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원래 전신의 군세는 수급 기가스 10기와 기급 기가스 1,000기를 만들어내는 초월기다. 수급 기가스들이 각기 100기의 기급 기가스를 이끌어 아레스를 보조하는 것.
그러나 지금처럼 그들의 등급이 1단계씩 상승한 이상, 그 효과는 보조 정도가 아니다. 농담이 아니라 이들만으로도 전쟁을 치르는 게 가능해지는 것이다.
[속지 마! 이깟 가짜 따위!]
그런데 그때 라이징 하트의 기가스를 이끌던 조장 중 하나가 전신의 군세를 향해 매서운 속도로 파고들었다. 특이하게도 광선검이 아니라 금속으로 만들어진 검을 들고 있었는데 특수한 힘의 보정을 받는 것인지 그 검이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은하류의 검 앞에 기술도 영혼도 없는 가짜 따위 상대가 아니다!]
날카로운 포효와 함께 검을 내려친다. 1010기의 기가스 중 백인장이라고 할 수 있는 인급 기가스를 향한 공격.
쩡!
그러나 인급 분신은 녀석의 검을 가볍게 쳐내 공격을 빗겨내고.
콰득!
그 직후 관통을 건 우검으로 적 기가스의 오른팔을 자르고 좌검의 폼멜로 머리를 후려쳐 자세를 아래로 떨어뜨린 후에 그대로 X자로 빗겨 올라가며 양다리도 잘라 버렸다. 항상 그랬듯 악수하듯 남은 손을 잡아 그대로 뜯어버리는 마무리. 사지절단(四肢切斷)당한 적 기가스의 몸뚱이는 그대로 분신의 발에 걷어차여 부하들의 품으로 되돌아갔다.
[…….]
[…….]
[…….]
전장에 침묵이 강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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