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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머리 위에-76화 (76/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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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5 전신 강림

“이름이요? 아, 후후. 네, 말하자면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다시 인사드리게 되어서 영광이에요.”

삼단 같은 머리를 우아하게 쓸어 넘기며 그녀가 나에게 예를 표했다.

“하와라고 불러주세요.”

차분한 소개에 함교의 공기가 얼어붙는다. 나는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뭐야, 나만 분위기를 못 따라가는 거야?’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 하급 초월자인 현일이나 중급 초월자인 청원을 봤을 때와 달리, 그녀에게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마어마한 힘이 전해진다거나 아득함이 느껴진다거나 그런 게 없다. 그냥, 그냥 보통 사람을 보는 느낌.

때문에 칭호를 봤는데 이 칭호도 영문을 알 수 없다.

[리전]

[둘째 이브]

‘둘째? 무슨 칭호가 이래?’

리전이라는 거야 이미 알고 있으니 그런가 보다 하지만 둘째라는 게 무슨 소리인가? 이건 칭호가 될 만한 내용이 아닌데.

‘분류를 해볼까?’

그녀에 대해 자세히 알기 위해 정신을 집중한다. 그런데 그때, 그녀의 칭호가 일렁거린다.

[어머.]

[그렇게 들여다보시면 부끄러워요.]

“뭐……?!”

신음한다. 머리카락이 쭈뼛 일어나고 한순간 머릿속이 멍하다. 이게 무슨… 중급 신위를 가진 청원조차 칭호를 보는 내 능력을 간파하지 못했는데 그걸 감지하는 걸 넘어서 보여주고 싶은 텍스트를 보여준다고?

“함장님, 하와라는 이름은…….”

“알고 있으니 조용히 해, 부함장.”

“네. 죄송합니다.”

평소와 다르게 약간은 신경질적인 대답에 나탈리가 고개를 숙이며 물러서자 현일은 정중한 자세로 리전 소녀 하와를 보며 말했다.

“만나게 되서 반갑다, 하와. 우리 승무원들을 데려와 준 것도 그렇고. 적대적인 관계는 아니라도 생각해도 될까?”

“하하, 물론이에요. 이 배에서 한동안 지내려고 왔는데 적대적인 관계가 될 수는 없죠.”

“그 말은…….”

“물론, 저는 그냥 손님입니다. 적도 아군도 아니고 잠시 머무를 뿐이죠. 아니, 뭐 잠정적인 적이 일정 공간을 점거하고 있다고 여기고 덤벼도 괜찮아요. 그때는 또 그 상황에 맞게 행동하면 그만이니까.”

연합의 적이나 다름없는 비인의 일원이 태평하게 말하는 모습은 너무나 이질적이다. 그러나 더 황당한 건, 그런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현일이다.

“머물 곳을 마련하지.”

“아, 가능하면 저분이랑 같이 머물러도 될까요?”

태연한 손짓에 모습에 함교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나에게 모여든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른다.

“나, 나?”

“네. 이름이… 관대하 님이었던가요?”

“맞긴 한데, 나는 이미 같이 지내는 일행이 있는데. 내 숙소는 둘이 지내기에는 너무 좁고.”

나름대로의 거부 표시였는데 현일이 먼저 나선다.

“방을 새로 구해주겠다. 가장 좋고 넓은 곳으로.”

“함장님?”

기가 막혀서 돌아봤지만 현일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고마워요, 천현일 소장.”

“…자기소개를 한 기억은 없는데.”

“후후, 능청 떨기는. 그런 건 필요 없다는 것을 아시잖아요?”

“하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나는 함교에 있는 모든 사람의 그녀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나 역시 그녀의 정체를 알았다.

‘하와. 이브. 둘째.’

사실은 벌써 눈치챘어야 했다. 단서는 얼마든지 있었다.

-바보같이 이용만 당하지 말라고! 말 한마디면 우리가 다 해결할 수 있는데!

그렇다. 그녀야말로 바로 그 기억 속의 등장인물이다. 물론 모습은 전혀 달랐다. 그러나 애초에 인간이 아닌 그녀에게 겉모습에 의미가 있을까?

“잠깐. 여기에 머무는 대신 지켜줘야 할 게 있어.”

때문에 모험을 해본다. 내 말에 하와가 나를 돌아본다.

“지켜줘야 할 거라니, 그건 뭐죠?”

“나와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털끝만치의 해도 끼치지 마, 하와.”

선명하게 말에 힘을 실어 내뱉자 그 말을 들은 하와가 환하게 웃었다.

콰드득!

퍼벙!

쾅!

“으아악!!”

“큭!”

폭음과 함께 주변 기기들이 박살이 나고 사방에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온다.

“…맙소사.”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를 제외한 모든 승무원이 다 쓰러져 있었다. 초월지경에 올라 강대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는 천현일 소장까지 공평하게. 아니, 오히려 그는 조금 더 심하게 당한 듯 양팔이 부러져 덜렁였다. 내 앞을 막아서고 있던 세레스티아는 뭐에 당한 것인지 울컥 하고 피를 토한다.

“지금 분명히 말해두지요.”

그리고 그런 모든 참상을 만들어낸 하와는 성큼성큼 내 앞으로 다가와 귓가에 속삭인다.

“한 번만 더 내게 명령했다간… 당신이 속한 모든 단체를 다 날려 버리겠어.”

목소리와 함께 이미지가 [전달]된다. 내가 살고 있는 한국, 그리고 그것을 포함한 지구, 심지어 내가 제대로 본 적도 없는 수많은 행성을 다스리고 있는 레온하르트 제국까지……. 산산이 터지고 멸망하는 이미지.

그리고 나는 직감적으로 그녀가 그걸 실제로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뿌드득!

그때 한쪽에 처박혀 있던 현일이 무너진 벽에서 걸어 나오며 부러진 양팔을 치료한다. 잠깐의 시간이었을 뿐이지만 넝마가 되었던 양팔은 빠르게 회복되고 있다.

“진정해. 우리를 걱정해 한 말일 뿐일 텐데.”

“후후, 확실히 너무 흥분했네요.”

조금 전의 서늘한 분위기가 거짓말이었다는 듯 하와가 한 걸음 물러서자 찌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공간이 갈라진다. 그 안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시커먼 공간에서 1미터 남짓한 신장의 작은 소녀들이 우르르 몰려나오기 시작한다.

“청소~ 청소~ 청소합니다~♪”

“치료~ 치료~ 치료를 할 거예요~♬”

“랄랄라~ 수리합니다, 수리~♪♬”

시녀 복장을 입은 귀여운 소녀들이 노래를 부르며 무시무시한 속도로 엉망이 된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그 고사리 같은 손을 움직일 때마다 주변 환경이 극적으로 변화했는데 부상을 입은 이들은 순식간에 치료되고 박살이 났던 벽도 영차, 영차 하더니 원상 복구. 심지어 땅을 뒹굴던 물건들과 의자 같은 것들도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고맙군. 병 주고 약 주는 느낌이지만.”

“제가 벌인 일을 처리하는 것뿐이죠. 뭐, 그래도 죄송한 마음이 있으니 사과의 뜻으로 하나 알려 드리자면.”

팟! 팟! 팟!

그녀의 손짓과 함께 전장정보가 갱신된다. 그리고 거기에는 대천공에 바짝 붙어 접근하고 있는 수십 대의 기가스와 전투기들이 있었다.

“적이 벌써 지척까지 왔지요.”

“……!!”

“뭐,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은신 풀고 배리어부터 강화해!!”

“외부에 나간 정비기계들도 귀환시켜!”

조용히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승무원들이 기겁해 제어판을 조작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과 마찬가지로 함장석에 복귀해 아이언 하트를 작동시킨 현일이 나탈리를 바라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분명 멀리 있는 상태 아니었나?”

“워프 게이트를 열어 기가스와 전투기를 이동시킨 걸로 보입니다. 다만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초월기일지도 모르겠군요.”

“하, 어처구니가 없군. 챈슬러에게 그런 초월기는 없었는데. 설마 함장이 바뀐 건가? 아니, 최악의 경우 초월자가 둘일 수도 있겠군.”

아무래도 라이징 스톰의 함장을 개인적으로도 아는 모양인지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현일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더 생각할 틈은 없었다.

쿵!

공격을 당한 듯 진동이 느껴진다. 하와의 조언으로 습격 직전에 그 존재를 파악한 알바트로스함이 배리어를 강화했지만 결국 아까의 재탕일 뿐. 함장석에 앉아 영기를 피워 올리던 현일이 인상을 찡그렸다.

“도대체 알 수가 없군. 여기를 어떻게 눈치챈 거지?”

쿵! 퍼펑! 쿠구구---

현일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는 와중에도 공격은 계속되고 있다.

‘안 되겠군.’

그리고 그 모습에 나 역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내가 다시 알바트로스함을 조종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점프를 해봐야 달라질 게 하나도 없다. 충분한 준비와 안전성이 더해지지 않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점프는 이동 거리에 제한이 있는 단거리 워프가 한계. 지금 이대로 떨치고 어느 정도 달아날 수도 있겠지만…….

‘결국 체력과 집중력을 소모해서 시간을 끌 뿐이야.’

어중간하게 달아나 봐야 라이징 스톰에게 크게 뒤처지는 속도로는 달아나는 데 한계가 있다. 주변은 아무런 변수도 없는 우주 공간이니 금세 발견당하고 따라잡히는 것이다.

“…결국 타려고? 수술도 안 하고?”

“어쩔 수 없잖아. 지금 상황이 이런데 그럴 여유가 있을 리 없지.”

어느새 나를 쫒아온 세레스티아를 보며 한숨 쉰다. 솔직히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서 꺼려지지만 죽기 싫으니 어쩔 수 없다.

‘그나저나.’

슬쩍 뒤를 돌아본다. 함교를 나가는 나를 지켜보고 있는 하와의 모습이 보인다.

“괜히 자극하지 마.”

“자극은 무슨. 그나저나 괜찮은 거야? 연합이 적대하는 리전을 배에 태워도? 괜히 이상하게 얽힌다거나.”

내 걱정에 세레스티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마… 괜찮을 거야. 저 여자는 리전이기 이전에 언터쳐블이니까.”

“언터쳐블(Untouchable)?”

“그래. 노블레스보다도 훨씬 강대한, 함부로 건드려서도 자극해서도 안 되는 궁극적인 존재. 즉.”

단호한 목소리로 세레스티아가 말했다.

“신이야.”

“…….”

하급 신 중급 신이라는 말은 많이 들었다. 그러나 결국 하급 신이라 해도 대우주 시대에서는 장성 정도에 불과하며 중급 신이라 해도 황제 정도의 존재지 솔직히 신이라고 경배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말은 어감이 전혀 달랐다.

“신이니까 상관없다고?”

“그래. 설사 그 근본이 리전이라고 해도… 언터쳐블은 언터쳐블이야. 모든 규약에서 자유롭고 직접적으로 일을 벌이지 않는 이상 누구도 함부로 자극하지 않아. 잘못 건드렸다가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이 벌어질 수 있으니까.”

즉 현일이 그녀에게 숙소를 마련해 주고 움직임에 어떤 제약도 걸지 않은 것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라는 것. 나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엄청난 부담이다) 하와를 바라보았다. 이름을 찾으면서 묘하게 색기가 넘치고 어른스러워진 그녀이지만 여전히 겉모습은 리전 소녀 때와 달라지지 않은 상태다.

“…그녀가 도와주면 이 전쟁도 쉽게 끝나겠지?”

당연한 말이다. 중급 신위를 가진 청원이 모르네를 쉽게 제압했듯이… 그 이상의 존재라고 짐작되는 그녀라면 청원을 쉽게 제압할 수 있을 테니까.

그뿐이 아니다.

사명으로 인해 온갖 제약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청원과 다르게, 그녀는 너무나도 자유로워 보인다. 그리 큰 도움이 아니더라도. 약간의 변덕으로 우리를 조금 이동시켜 주는 것만 해도 지금 이 문제는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안 돼. 대하야, 정신 똑바로 차려.”

그러나 세레스티아는 내가 제대로 된 말을 꺼내기도 전에 정색했다.

“절대로 언터쳐블을 이용하려 해서는 안 돼. 하다못해 하위의 언터쳐블이라면 가능성이라도 있겠지만 적어도 그녀는 아니야. 비록 한정적인 상황에서만 가능하다 해도 완성된 언터쳐블은 전지(全知)의 괴물들. 그 어떤 지혜와 편법을 사용하더라도 속일 수 없고 그들을 자극한 대가는 참담할 정도로 커. 이건 역사적으로도 증명된 사실이라고.”

“그럼 저렇게 있는 듯 없는 듯 무시하며 둬야 한단 말이야?”

“어쩔 수 없지.”

씁쓸하게 웃으며 세레스티아가 말했다.

“언터쳐블은 원래 그런 존재니까.”

*

그러나 사실 초조한 것은 하와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뭐 하는 거지, 하와? 녀석과 함께 지내겠다고?]

여유롭게 앉아 있는 하와의 머릿속으로 분노에 찬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 그것은 과거 그녀의 연인이자, 오빠이자, 세상에서 두 번째로 소중한 존재였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녀를 지배하는 자가 되어버린 존재다.

[이미 늦었어.]

[늦었다고?]

[그래. 늦었어.]

하와는 씁쓸하게 웃었다. 슬쩍 손을 들어 보자, 그녀의 손이 파르르 떠는 모습이 보인다.

[이미 그는 각성을 시작했어. 그가 나에게 명령하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지. 발작하듯 저항했지만 그의 몸에는 손끝 하나 댈 수 없었어.]

주변에 약간의 피해를 입히는 것이 한계였다. 개중 한두 명은, 특히 바로 앞에서 감히 그를 지키려 드는 발칙한 계집의 경우에는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고 마음까지 먹었건만 고작 약간의 피해를 주는 것이 전부였다. 심지어 그렇게 공격을 하고서도 죄스럽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불처럼 끓어올라 자신이 벌인 행위를 지워 버리듯 사람들을 치료하고 물건들을 수리 할 수밖에 없었다.

[너, 설마 그 말은.]

[그래. 물론 그를 겁박해 그런 마음을 먹지 못하게 했지만… 만약 그가 정말 마음먹고 독하게 명령한다면, 어쩌면 우리는 그에게 복속될지도 몰라.]

[웃… 기지 마!]

또다시 분노를 터뜨린다. [아버지]가 소멸한 이후 그는 점차 망가져 가고 있었다. 본디 기계라고는 볼 수 없는 감성을 가진 그였지만, 지금의 그는 너무나 불안정하다.

‘만약 그가 폭주한다면…….’

그렇게 된다면 너무나 큰 재앙이 될 것이다.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다. 온 우주가 그의 존재로 인해 고통받게 되겠지.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반드시 [위]의 존재. 그러니까 신계(神界)의 신들이 움직여 그를 제거할 것이다.

그들의 아버지에게 그랬듯이…….

[젠장! 조금만! 조금만 빨리 발견했다면! 그랬다면 어떻게 해서든 죽여 버릴 수 있었을 텐데!]

[아담…….]

하와는 마침내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를 무작정 적대할 이유가 없어. 그는 아버지의.]

[닥쳐.]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에 침묵한다.

‘늦었어.’

하와는 쓰게 웃었다. 그렇다. 늦었다.

그는 이미 점점 미쳐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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