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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5 전신 강림
“청원, 당신은 새롭게 태어날 황족의 몸을 빼앗을 생각을 하고 있죠?”
확정적인 내 말에 모든 사람의 표정이 얼어붙는다. 그만큼 심각한 이야기였고, 더불어 그 가설이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청원이 당황해 횡설수설하는 사태는 벌어지지는 않았다.
“멍청한 소리를 하는군. 신선인 내가 모든 걸 포기하고 고작 인간 아이의 몸을 빼앗는다는 게 있을 법한 이야기라고 보나?”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 너무나 평온한 표정으로 응대한다. 당연한 일이다. 그도 긴 세월을 살아온 신선인데 어찌 그 속을 어설프게 내보이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별로 동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상관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자백도 증거도 필요 없어.’
그렇다. 필요 없다. 나는 그와 법정 싸움 같은 걸 하려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설득력이고, 나는 그냥 이 사실을 널리 퍼뜨리기만 하면 된다. 내 시점에서는 참 다행이도 마침 여기에는 청원이 절대 해칠 수 없는 6황자와 그의 아내가 될 예정이라는 천사까지 와 있는 상태가 아니던가?
“맞아요. 고위 신선인 당신이 고작 [보통] 인간의 몸을 빼앗으려 할 리가 없지요.”
내 말에 사람들의 표정이 묘하게 변한다. 왜냐하면 레온하르트 제국의 황족은 황금사자신의 피를 이은 일종의 신족(神族)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10살이 되기 전에 황금사자기라는 특수한 기운을 다룰 줄 알게 되고 개중 핏줄의 힘을 강하게 타고 난 이들은 몇 개의 권능을 깨우칠 정도니까.
물론 지금 그들이 떠올리는 핏줄의 힘은 겨우 그 정도가 아니리라. 고작 그 정도의 힘을 하루아침에 문명을 파괴하고 별을 날려 버릴 수 있는 초월자가 탐낼 거라고 보기는 힘들었으니까.
“…청원이 최초 황실과 계약을 하게 된 건 초대 레온하르트 황제께서 가지고 있는 힘 때문이었어. 그분은 신보다도 드문 진짜 신족이었거든.”
여태 조용히 있던 세레스티아의 설명에 의아해한다.
“신족에 진짜 가짜도 있어?”
“그래. 우리의 안에도 신의 피가 흐르고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그만한 힘은 없으니까. 말이 좋아 신족이지 그냥 특수능력 좀 가진 상위 종족? 그 정도가 한계일 거야.”
“그럼 청원이 하는 일이라는 건?”
“…그 강대한 힘과 미래를 보는 혜안으로 다시금 초대 황제 같은 [신의 핏줄]을 만들어내는 것이지. 노블레스보다도 위대한, 태어날 때부터 신의 힘을 가지는 진짜 신족. 청원은 그 사명의 내용으로 인해 황실로부터 황족들의 결혼이나 만남에 관여할 권한을 얻은 거야.”
그렇다. 그것이 바로 청원의 칭호. [혈통 관리인]이 가지고 있는 뜻이었다.
“6황자, 언제까지 이런 바보 같은 역사 공부를 듣고 있을 셈입니까?”
온갖 제약에 묶여 제대로 우리를 방해할 수 없는 청원이 6황자를 재촉한다. 그러나 6황자는 환한 금발이 휘날릴 정도로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었다. 모양만 보면 참 귀여운 녀석이었지만, 그 표정에 떠오른 짙은 미소는 그 속을 알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왜요. 재미있는데 좀 더 들어보죠.”
“…….”
청원이 표정을 굳히고 나를 바라보고 있다. 주변 분위기 때문인지 대놓고 살기를 내뿜지는 못했지만 아마 경고의 의미일 것이다. 더 떠들면 재미없을 거라는…….
‘웃기고 있네.’
그러나 어림없는 소리다. 이미 목숨을 노려놓고 이 무슨 개수작이란 말인가? 녀석은 내가 비인들에게 잡혔다가 돌아온 걸 가볍게 생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나는 녀석 덕택에 온갖 고문과 고난을 겪다 돌아온 몸이다.
“너도 느끼고 있겠지만, 청원은 뒤를 보지 않고 움직이고 있어. 사명을 교묘하게 왜곡하고 회피할수록 그에게 가해지는 금제는 점점 심해질 텐데도 아랑곳하지 않지. 황실과 계약을 했으면서도 널 해치려 한 것만 해도 그래. 마치 다 상관없다는 것처럼 급하게 6황자를 지원하고 있는 거야.”
“시간에 쫒기고 있는 걸 수도 있겠네. 뭔지는 모르지만… 청원은 예지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그걸 본 거겠지.”
“그래. 그리고 짐작이지만.”
나는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결심했다. 이미 [적]이라고 할 수 있는 청원이 알고 있는 걸 숨기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
하지만 내가 입을 떼기도 전에 세레스티아가 말한다.
“네가 끼면 예지가 뒤틀린다고?”
“…알고 있었어?”
“당연하지. 우리가 이렇게 멀쩡히 살아온 게 그 증거야.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신선 중 하나라는 청원이 일을 이렇게 처리할 리가 없으니까.”
세레스티아는 나를 ‘읽을’수가 없다고 했다. 지구에서 처음 만났을 때 나에게 접근해 왔던 것 역시 바로 그 때문. 심지어 이건 중급 신위를 가진 초월자인 청원에게도 적용되어서 그는 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어쨌든 청원은 너를 처분하거나 치워놓으려고 했어. 하지만 그러지 못하자 부랴부랴 6황자와 황자비를 데리고 왔지. 아마 적당한 사탕발림을 하지 않았을까? 세레스티아 황녀가 살아 있으면 큰일이 생길 것이라는 미래를 보았다. 그 미래를 막기 위해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다. 대신 도와주면 나 청원이 그대를 지지하리라. 뭐 이런 식으로 말이야. 어차피 그의 핏줄을 강탈하기 위해서는 지원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면서 말이야.”
말은 세레스티아와 하고 있지만 시선은 청원과 6황자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마치 그들을 압박하려는 자세이지만 사실은 실시간으로 변하는 칭호를 살피며 이런저런 디테일을 첨가하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와. 나 사기꾼 돼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물론 지금 가설들은 사기가 아니지만 이 모든 걸 직관으로 파악하는 척을 하고 있으니 사기나 다를 바가 없으리라. 사실은 답지를 보고 줄줄 읊는 것에 불과한데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놀라운 통찰력을 가진 존재로 보고 있는 게 느껴진다.
“…와아. 마치 우리 대화를 옆에서 본 것 같지 않아요? 다만 그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니 통찰이란 말인데, 진짜 대단하네요.”
“쓸데없는 허언에 귀 기울이지 마시오, 6황자. 저와 황실과의 계약은 그런 터무니없는 짓을 벌일 정도로 느슨하지 않소.”
차분한 응대였지만 6황자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저 말을 들어보니 지금까지 미심쩍어하던 모든 게 딱딱 들어맞네요. 사실 황실에서도 그리 반길 리 없는 우리 사랑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실 때부터 이상하다고는 생각했거든요. 거기에 구태여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오신 것도 그렇고, 그 많은 지원을 약속하신 것도 그렇고, 우리 제국에서도 미처 파악하지 못한 [보물섬]을 다섯 개나 알려주셔서 막대한 재정을 가지게 한 것도 그렇고. 아! 그렇군요.”
6황자는 짝 하고 손바닥을 치며 말했다.
“당신의 목표는 제 아들로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그전에 우리 가문의 입지를 탄탄하게 하기 위해 저를 지원하신 거죠?”
“…….”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하는 청원의 모습에 내심 주먹을 불끈 쥐었다. 됐다. 약간은 도박이었는데 성공적으로 그들 사이의 관계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아무리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해도 태어날 자기 자식의 몸을 뺏겠다는 괴물과 함께할 수는 없다. 하나의 목적을 위해 무리하게 일을 벌이던 청원은 지금부터 역풍을 맞게 될 것이다. 잘은 모르지만 비밀로 하려던 걸 보면 이 사실이 선계에 알려졌을 때 그에게 징계 같은 게 내려올지도 모르지.
“나쁘지 않네요.”
그런데 나는 한 가지 실수를 했다.
“마침 저도 보통의 자식은 시시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6황자가 어떤 인간인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잠깐… 아니, 잠깐. 뭐라고? 엘리언, 너 설마?”
가만히 지켜보던 세레스티아가 심각한 표정으로 묻는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기라도 한 것처럼 무시한 6황자가 청원을 바라본다.
“저는 딸이 좋을 것 같은데, 조절해 줄 수 있나요?”
“…6황자?”
그 담대하던 청원조차 당황해 6황자를 바라본다. 나 역시 경악해서 그 귀여운 얼굴의 금발 황자를 바라보았다.
아니, 이건 또 뭐 하는 미친놈이야?
“흐음. 엘, 이 노친네가 우리 자식이 되는 거야? 너무 못생기지 않았어?”
“물론 지금은 이 모양이지만 꽤 귀여워질 거야. 너와 나 사이에서 태어날 테니까.”
“마음에 안 들지만… 엘이 좋다면 나도 좋아.”
새하얀 날개에 반짝이는 은발을 가진 천사 역시 고결한 외모로 태연히 미친 소리를 뱉고 있다. 이 금은 커플 둘 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잠깐! 잠깐! 엘리언 너 미쳤어!? 청원에게 태어날 아이의 육체를 넘겨주겠다고?”
“스스로가 황실의 일원으로써 살아간다면 상관없죠. 뭐 물론…….”
계속 싱글싱글 웃던 6황자의 눈이 일순간 서늘하게 빛난다.
“이 사실이 널리 알려지는 건 당연히 안 되지만 말이에요.”
“…….”
섬뜩한 살기다. 그 곱상한 외모에서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살벌한 기운이 주변을 짓누르고 있었다.
“푸후, 푸하하! 푸하하하하!”
그리고 그 모든 장면을 보고 있던 청원이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린다. 뭐가 그렇게 웃긴지 그 점잔은 눈가에 눈물마저 맺혀 있다.
“세상에. 정말이지 나이를 헛먹었구려. 통찰도 예지도 절대적으로 맹신하면 안 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서. 딸도 괜찮나요?”
“하하하! 좋소. 오래된 숙원을 이루는데 그깟 성별 따위가 무슨 상관이겠소?”
그렇게 말하며 가볍게 손을 내젓자 묘한 파동이 주변을 휩쓸고 지나간다. 영문을 몰라 그를 바라보자 청원이 6황자에게 설명하는 모습이 보인다.
“모든 기록물을 파괴했소. 지금까지 우리의 대화는 세상 그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오.”
“직접 들은 사람들은?”
슬쩍 우리를 바라보는 6황자의 모습에 청원이 대답한다.
“그건 부탁드려야겠구려.”
“하하. 못된 아이군요. 벌써부터 아버지를 이렇게 번거롭게 하다니.”
천진하게 웃으며 그대로 몸을 돌린다. 마치 더 이상 여기에 볼 일이 없다고 말하는 것 같은 태도에 기다렸다는 듯 청원이 빛으로 된 부적들을 만들고.
팟!
그대로 그들의 모습이 선내에서 사라져 버린다.
“뭐야? 이대로 돌아간다고?”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짓는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뭘 어쩌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 그런데 고개를 돌려보니 세레스티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이 보인다.
그녀가 말했다.
“어차피… 어차피 죽을 것들한테 더 말 걸 필요도 없다는 뜻이야.”
“어차피 죽을 것들? 우리가?”
“그래. 엘리언이 여기에 왔다는 건.”
쿠우웅--!
그때 바닥이 진동한다. 깜짝 놀라 움찔하는 나에게 세레스티아가 너무나 익숙한 이름을 입에 담았다.
“섬멸 전함, 라이징 스톰(Rising Storm)역시 왔다는 뜻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