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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5 전신 강림
술렁이는 사람들의 말을 자르고 비단옷을 입고 백우선(白羽扇)을 금발의 노인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야말로 우리를 비인들의 소굴에 던져 버렸으며 그러면서도 그들의 자부심을 짓밟아 두려움을 안겨준 존재.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엘로임의 신선, 청원이었다.
“너…….”
세레스티아의 기세가 사나워진다. 당연한 일이다. 청원은 레온하르트 황실의 강대한 조언자였지만, 알바트로스함에 온 그가 벌인 짓들은 하나같이 그녀의 인생을 망칠 종류의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기세를 일으키든 말든 청원은 별로 아랑곳하지 않았다.
“관대하.”
“…저요?”
뒤쪽으로 빠져 있다가 나를 부르는 청원의 모습에 멈칫한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영감탱이가 좀 부담스럽다. 아니, 사실 그걸 넘어서…….
‘좀 무서워.’
처음 만났던 그 순간부터 나는 그의 힘을 너무나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냥 바라만 보는 것만으로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아득한, 진지하게 힘을 쓰면 일격에 행성을 파괴하고 작정하면 별들조차 부수는 게 가능한 그 초월적인 힘.
천현일 소장이 아주 강한 능력자 정도의 느낌이라면 그는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재앙을 보는 것만 같다. 그에게 덕지덕지 붙어 있는 온갖 제약이 아니었다면 그는 자기 마음대로 활동한다 해도 막아설 존재가 몇 없을 것이다.
“잠깐 이야기 좀 하지.”
청원은 다른 사람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 역시 조용하다. 심지어 방금 전만 해도 으르렁거리고 있던 세레스티아마저 아무런 말이 없다.
“…이런.”
순간 나는 그들이 단지 말이 없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저 멀리에서 이쪽을 향해 달려오던 몇 명의 승무원이 달려오던 자세 그대로 정지해 있고 으르렁거리던 세레스티아 역시 서늘한 표정 그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슬쩍 시선을 들어보니 평소와 다른 칭호가 보인다.
[레온하르트 제국]
[시간정지 세레스티아]
그녀뿐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의 칭호가 동일하게 맞춰져 있었다. 심지어 고착칭호를 가지고 있는 이들조차 그러할 정도였으니 시간정지라는 게 얼마나 강한 상태인지 더 말할 필요조차 없으리라.
“집중하게.”
그리고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며 당황하고 있는 내 앞으로 청원이 다가온다. 이미 그와 나를 제외하고는, 심지어 6황자와 황자비가 될 예정이라는 여자 천사조차도 멈춰진 시간 속에 갇혀진 상태였기에 누구도 그의 말을 방해할 수 없었다.
“…어차피 집중 안 할 수 없는 상태이긴 하네요.”
“후후, 화가 나 있군. 뭐 당연한가. 셀이 느끼고 있는 배신감까지는 아니겠지만… 아마 자네는 내가 하는 짓들이 너무 제멋대로인 것처럼 보일 거야. 나 혼자 이렇게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불공평하게 느껴지겠지.”
나직한 그의 말을 굳이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닌데.’
그렇다. 아니다. 나는 그의 존재를 불공평하게 느끼지 않는다. 그의 힘은 너무나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는 데 반해 그를 얽매고 있다는 [사명]이라는 건 말로만 들었지 전혀 실감이 안 나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 그는 산속에서 만난 불곰과 비슷한 존재다.
우연히 산책을 하다 집채만 한 불곰을 만났다. 팔 한 짝이 내 몸의 두 배는 될 정도의 크기의 무시무시한 곰. 그런데 그 곰이 슬금슬금 다가와서 내 몸의 냄새를 맡다가 앞발로 내 뺨을 툭툭 친다고 했을 때.
거기서 ‘이 곰 새끼가 기분 나쁘게 뺨을 때려!?’라고 분노를 터뜨릴 미친놈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안 물어 죽이는 것만 해도 다행이다.’
그렇다. 그게 내 감상이다. 이런 무시무시한 괴물이 눈앞에 있다면 숨죽이는 것이 오히려 본능에 더 가까운 행동이겠지. 물론 그는 우리에게 악의를 가진 적이나 다름없는 존재니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그가 말하는 종류의 감정은 가지고 있지 않는 것.
그런데 그가 내 기분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시간을 멈출 정도로 초월적인 힘을 가진 녀석이 사람의 마음 하나 못 읽는다고?’
그러고 보면 대천공에서 나를 고문하던 녀석들도 도저히 내 정신을 읽어낼 수 없다고 했었다. 마인드 컨트롤도 안 통하고 자백제도 먹히지 않는다고 했었지. 막상 육체의 자유를 뺏는 것에는 저항할 방법이 하나도 없으면서 이렇게 정신만 자유로운 건 좀 억울하지만, 설마 그 방어가 중급 신위를 가진 청원까지 어찌할 수 없을 정도인지는 몰랐다.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거죠?”
일단은 물어본다. 시간까지 멈추고 말을 건 이상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짐작했기 때문이다.
“후후. 교묘한 거짓말을 해주고 싶지만 이미 계율(戒律)도 너무 많이 어겨서 그럴 수가 없군. 너무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날뛰었나.”
가볍게 한숨 쉰다. 그리고 그러더니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솔직히 네가 죽었으면 좋겠다.”
차분한 목소리로 내뱉은 목소리에는 먼지만큼의 살의도 없다. 그러나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격통이 밀려온다.
“큭……!”
누군가 심장을 잡아채는 것 같다. 숨이 턱 막히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눈앞이 깜깜해지는 순간.
훅.
기묘한 느낌이다. 마치 가볍게 바람이 밀려와 모든 고통을 휩쓸고 사라지는 것만 같은 감각. 어느새 완전히 멀쩡해진 몸 상태로 고개를 들어보니 안타깝다는 얼굴의 청원이 보인다.
“짜증 나는군. 이제 이 정도도 할 수 없단 말인가. 심지어 바로 치유해야 하다니…….”
말을 들어보니 그가 나를 공격하고 또 알아서 치유한 모양.
나는 어이가 없어서 그를 보며 물었다.
“사명 때문에 함부로 남을 해치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나요?”
“맞는 말일세. 그래서 직접 공격하지 않았지. 다만… 자네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바랐을 뿐이야.”
차분한 목소리에 소름이 끼치는 걸 느낀다. 나 역시 머리 회전이 느리지 않은 만큼 그가 하는 말이 가지는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바라면 이루어진다고……?”
“다만 지금의 경우에는 그것마저도 계율과 사명이 막아서는군. 그렇게나 많은 준비를 했는데도 후폭풍이 이렇게 거세다니. 역시 황녀가 가진 운명의 무게는 만만치 않다는 건가.”
안타깝다는 듯 한숨 쉬는 그의 모습에 어지간해서는 흔들리지 않는 나조차도 슬슬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그의 힘을 알기에 참아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지만 노리는 것이 목숨이라면 몸을 사려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대놓고 눈앞에서 날 죽이려고 든 주제에 이런 태도라고?’
기가 찬다. 아니, 이게 무슨 신선이야? 신선은 신선인데 무슨 마선(魔仙)같은 거라 흔히 생각하는 신선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안 된다는 건가?
그러나 끓어오르는 마음과 별개로 머리는 차갑게 식는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자꾸 그가 내가 화를 내도록 도발한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째서?’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다. 도대체 왜 나를 자꾸 도발하는가? 왜 무리수를 둬서라도 나를 죽이려고 하는 거야? 지금 그 태도는 마치.
“두려움……?”
“…무슨 소리냐.”
변하는 표정에 확신한다.
“두려워하고 있어요. 정확히는… 초조함이군요.”
당당히 눈을 마주하고 마치 그의 감정을 읽는 것 같은 태도를 연기한다. 물론 청원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서 금세 평온을 되찾는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로 날 떠보려고 하는 거라면 바보 같은 짓이라고 말해주고 싶군.”
“그러면 그냥 듣기만 하세요. 제 짐작이지만… 당신은 뭔가 중요한 목표를 가지고 있어요. 그것도 엘로힘 전체의 목표가 아니라 개인적인 목표를. 그리고 그 와중에 굳이 저를 치우려 했다면… 아! 당신은 예지 능력이 있군요. 그 예지 능력이 완전히 틀어졌나요? 그리고 그 이유가 나라고 짐작했고?”
그의 마음을 읽을 수는 없다. 그러나 칭호를 현재 상태로 맞추고 그 칭호에서 나오는 정보를 토대로 계속해서 말을 던지면서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물론 고위 신선으로 완벽한 부동심을 가진 청원의 표정은 전혀 변화가 없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칭호는 계속해서 바뀌며 새로운 정보를 전달한다.
그는 달아났어야 한다.
나와 마주 보고 있다는 것은 칭호를 노출하고 있다는 뜻이며, 칭호를 장시간 노출하고 있다는 것은 개인정보 역시 노출하고 있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단순히 [분류]만을 통해 모든 정보를 파악하려면 5분에서 최대 30분 이상 칭호를 보고 있어야 하지만 대놓고 그의 마음을 흔들며 표면의식에 변화를 주자 비교적 빠르게 핵심적인 단어에 접근할 수 있었다.
[봉래도]
[전생술의 유출을 고민하는 좌자]
‘전생술?’
내가 술법에 대해서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저건 명칭만 봐도 대충 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전생술이라는 키워드를 얻어내자 대략적인 그림이 그려진다.
“무리해서 갑자기 혈통을 만들어내려 한다… 는 건 그 혈통에 관련된 목표가 있다는 뜻이겠지요?”
“그만.”
마침내 청원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물론 이렇게 다 까발려서 그가 나를 죽여야 한다는 결심을 더 돈독히 할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죽이려고 드는 상황인만큼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단지 원래 사명 때문이라면 이렇게 몰래 할 이유는 없겠지요. 지금 그렇게 6황자 편을 든다고 완벽한 혈통이 완성될 리도 없고 새로 태어날 자손이 당신을 지지한다고 새삼스럽게 당신에게 도움이 되지도 않을 거예요.”
“그만해라.”
점점 청원의 목소리가 스산해진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당장 날 어쩔 수 없다. 그 스스로가 내 눈앞에서 그걸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결국 당신에게는 개인적으로 황족의 혈통을 발현시켜야 할 이유가 있다는 뜻이에요. 그건 바로.”
“그만!!”
순간 유리가 깨지는 굉음과 함께 내 머릿속이 욍욍 울린다. 그러나 괜찮았다. 버틸 만했다. 청원이 나에게 뭔가를 한 것 같았지만, 그가 내 머릿속을 읽을 수가 없듯 그것 역시 나에게 통하지 않았다.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대하야? 괜찮아?”
“청원 님, 뭘 하시는 거죠?”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 듯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나는 슬쩍 웃으면서 말했다.
“청원, 당신은 새롭게 태어날 황족의 몸을 빼앗을 생각을 하고 있죠?”
확정적인 내 말에 모든 사람의 표정이 얼어붙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