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머리 위에-54화 (54/249)

0054 / 0117 ----------------------------------------------

Chapter 12 형틀 속의 전쟁

‘아, 별건 아니고. 오랜만에…….’

나는 나를 고문하던 비인 녀석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좀 정색하고 좀 해보려고.’

뒷일이고 뭐고 화딱지 나서 안 되겠다.

[텐! 살아 있었구나!]

그런데 그때 머릿속으로 익숙한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잠시 그게 누구 목소리인가 하고 고민하다가, 이내 내 옆으로 다가오는 기체를 보고 그가 천둥룡의 조종사 알렉스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레스, 이거 통신 되나?’

[아, 가능은 하지만 상황상 네 목소리를 담을 수는 없어. 영체 상태에서 영상이나 음성을 기록할 수는 없거든.]

‘하긴 그렇겠군. 그럼 네가 전해줘.’

내 부탁에 따라 아레스가 내 말을 R-13의 통신장치를 통해 전달한다.

‘미안한 말이지만 기가스가 망가져 있기에 잠시 빌렸다. 그 텐이라는 녀석은 이미 늦었고.’

[…유령? 유령님이십니까?]

전쟁 영웅이면서도 그 정체가 베일에 싸여 있는 천재 조종사, 알바트로스 안에서만큼은 배트맨이나 슈퍼맨 부럽지 않은 인지도와 명성을 쌓은 [유령]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원거리에서 기가스를 조종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것은 아레스의 어빌리티로 가능한 일이었지만, 뭐 어차피 나에 대한 정보는 극히 제한되어 있는 만큼 사람들은 그걸 내 능력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상황에 ‘오 그래요. 제가 바로 그 유령이죠!’ 하며 담소를 나눌 시간 따위는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적의 포격이 날아들고 있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지휘권은 필요 없고, 함교에 보고와 지원을 부탁해.’

어차피 방어전으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적 기가스와 전투기를 막고 있는 상태에서 굳이 내가 더 뭔가를 지휘해 봐야 의미가 없다. 이 경우에는 차라리 직접 움직이는 게 나은 것이다.

우웅-!

어빌리티 <저격>을 광자포에 적용한다. 공격의 사거리를 증가시키고 배리어 관통 능력을 늘리는 저격은 매우 실용적이면서도 강력해 조종사들에게 널리 쓰이는 어빌리티지만, 당연히 제약이 존재했다.

일반적인 힘이 실린 포격이라면 아주 난사하면서 쏟아낼 수 있는 기가스라도, 저격 어빌리티를 발동하면 한순간이라도 거기에 완전히 집중해야만 어빌리티를 가동시킬 수 있다는 것이 바로 그것. 즉 한순간의 공격력 자체는 급감하기에 기습으로만 그 의미가 있는 어빌리티인 것이다.

기껏 힘을 모아 한 발을 쐈는데, 그게 빗나가면 한순간에 생사가 결정되는 전장에서 무의미한 시간을 낭비하게 된 셈이 되지 않겠는가? 때문에 일단 정면으로 적을 마주하고 전투가 시작되면 더 이상 저격 어빌리티는 의미가 없다고 봐도 될 것이다.

‘뭐, 하지만.’

[안 빗나가면 된다 이 말이지?]

‘정답.’

피식, 하고 웃으면서 포격을 가한다.

수많은 광자포와 탄환, 그리고 미사일들이 사방을 뒤덮는 전쟁터를 한 줄기의 빛이 가로지른다.

쾅!

또 가로지른다.

쾅!

또다시 가로질렀다.

쾅!

일격일살.

R-13이라는 출력 자체가 매우 한정적인 기급 기가스의 공격에 순식간에 세 대의 기가스가 전투 불능이 되어 우주를 떠도는 잔해로 화한다.

사실 기급 기가스 한 대로 지금 이 한순간의 전과만 해도 무시 못 할 활약이다.

흔히 우주전이라고 하면 생각하는, 수천수만 대의 기가스와 수십만 대의 전투기가 우주를 가득히 메우는 전투는 절대 없다.

정확히 말하면 과거에는 있었다고 하는데, 아이언 하트가 도입되기 시작하면서 전쟁의 양상이 바뀌어 버린 것이다.

아이언 하트로 인해 상위 에너지라고 할 수 있는 영자력 배리어와 영자력 포격이 가능해진 전투기와 기가스들은 그렇지 못한 기존의 전투 병기로는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괴물이라고 할 수 있다.

[뚫을 수 없는 방어막]과 [방어 불가능한 공격]을 날리는 적을 무슨 수로 상대한단 말인가? 심지어 아이언 하트는 주어진 연료를 다 소모하면 작동을 멈추는 그런 개념의 병기가 아니다. ‘영자력 발생기’라는 이름처럼, 힘을 낭비하지만 않으면 조금씩 힘이 회복되어 무한정 싸우는 게 가능한 기체.

때문에 숫자와 물량이 중요하던 기존 전쟁의 패러다임은 소수의 엘리트가 더욱 중요해지는 쪽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기존의 병기야 자원과 재화만 충분하면 대량생산이 가능하지만, 아이언 하트와 그 아이언 하트와 동조가 가능한 조종사는 대량생산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기에 현대 우주전은 과거에 비해 그 규모가 작아 한 번에 싸우는 기가스나 전투기는 많아 봐야 수백여 대에 불과할 정도에 불과하며, 지금 전투의 경우에는 그보다도 작은 규모의 병력만이 움직이고 있다.

즉 지금 한순간 파괴된 7대의 기가스와 전투기는 비인들로서도 절대 무시할 수 있는 타격이 아니라는 뜻이다.

[아, 저 멍청이들. 뭘 쏘는 대로 다 맞나. 그냥 머리를 가져다 대주네, 대줘.]

‘그게 아니라 내가 잘 맞춘 거지, 바보야. 예측 샷 모르니, 예측 샷? 이 놀라운……. 웃차!’

말을 하다가 R-13을 뚝 떨어지게 움직여 쏟아지는 광자포를 피해낸다.

적들이 나의 존재를 깨닫고 집중사격을 시작했다.

고작해야 기급 기가스가 수급 기가스가 포함된 아군의 전력을 왕창 깎아낸 것에 당황하고 있겠지만, 적들도 바보가 아니니 아군에 위협적으로 보이는 적을 우선적으로 처리하려 하는 것이다.

피피핑! 쾅쾅!

미사일과 광자포, 그리고 탄환들이 소나기처럼 쏟아진다.

나는 R-13을 복잡하게 움직여 그 모든 공격을 피해냈지만, 결국에는 피할 수 없는 각도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한 손이 열 손을 당할 수 없는 법이고 적들의 연계도 매우 뛰어난 편이었다. 여기저기에서 돌아다니던 적들이 일순간 나를 향해 내 모든 방위를 점하는 화망(火網)을 만들어내니 계기판이 일순간 시뻘겋게 물들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R-13은 기급 기가스일 뿐이고 비행 속도에도 한계가 있어서 화망이 구성되기 전에 포위망을 빠져나오기는 불가능하다.

[대하, 조심해!]

‘아, 걱정 마시죠.’

…그러니까 <점멸>이 없다면 말이다.

파앗!

공간을 뛰어넘는다.

모든 회피기동을 염두에 두고 쏟아진 화망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내가 이동한 거리는 고작(?) 수백여 미터에 불과하지만, 그것만으로 R-13은 깔끔하게 안전지대로 빠져나온 것이다.

쾅!

그리고 저격.

쾅!

또 그리고 저격.

[…늘 느끼는 거지만 무슨 전쟁이 이리 쉬워 보이냐. 기체가 강한 것도 아닌데.]

‘뭐, 결국 안 맞고 적을 칠 수만 있다면 기체가 문제는 아니지. 아니, 사실 문제긴 문제인가?’

지금 이 순간까지만 하더라도 적이 입은 피해는 막대하다고 할 수 있다. 저격이 불을 뿜을 때마다 적 기체가 하나씩 파괴되고 있다.

무슨 저격을 눈앞에서 당당하게 하는 나도 그렇지만 그 저격을 빤히 보면서 하나도 못 피하고 죄다 얻어맞고 있는 적은 얼마나 속이 터질 것인가?

펑!

그리고 그러다 마침내 저격이 안 통하기 시작한다.

‘이제야 자존심을 버렸군. 너무 늦어.’

[하지만 상식적인 반응이긴 하지.]

지금 내가 배리어에 쓸 영력을 공격에 더하는 것처럼 당연히 공격에 사용되는 영력을 배리어에 집중하는 것 역시 가능하다.

물론 배리어에 힘을 집중하면 공격 능력이 크게 떨어지게 되어 영력이 거의 깃들지 않은 포격만을 해야 하지만, 어차피 영력을 전부 공격에 사용하고 있어 배리어가 없는 나는 일반적인 탄환이나 미사일을 맞아도 위험하다.

펑!

다시 명중시켰으나 통하지 않는다. 적들이 배리어에 영력을 집중해 그냥 저격을 얻어맞으며 접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저격 어빌리티가 사기처럼 보여도 무적은 아니다. 같은 기급이 배리어에 전 영력을 집중하기만 해도 관통시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관통은 되는데 이어 기가스의 장갑까지 꿰뚫을 정도는 아니니까. 기껏해야 좀 찌그러지고 휘청거리는 정도니 치명적인 타격은 들어가지 않는다.

하물며 수급 기가스는? 배리어를 깎아 적의 영력을 좀 소모시키는 이상의 의미가 없다.

파앗!

점멸을 발동해 나를 향해 덤벼들던 적 기가스를 오히려 넘겨 버린다. 짐승의 머리를 달고 있는 적의 기가스는 황급히 속도를 줄였으나 날아들던 관성이 있었던지라 순식간에 거리가 멀어진다.

쾅!

그리고 그때 폭음과 함께 R-13이 한 차례 흔들린다.

적의 공격을 맞은 것은 아니다. 지금 상태에서는 적의 공격을 단 한 차례만 맞아도 즉시 사망이니까.

다만 적이 무차별로 발사한 미사일이 여기저기에서 폭발하며 충격파가 전해진 것이다.

[배리어를 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군.]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무슨 게임 속 NPC도 아니고 기급 기가스 따위가 아군의 방어를 뻥뻥 뚫어대는데 그 위력을 의심하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일이겠지.

당연한 말이지만 나 말고 배리어의 에너지를 100% 무기에 집중하는 이는 거의 없다. 배리어가 없는 기가스란, 바꿔 말하면 아이언 하트가 없는 기가스나 마찬가지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물리적인 탄환으로 탄막만 만들어도 나는 목숨이 위험해진다. 재수 없으면 다른 기가스라면 신경조차 쓰지 않는 탄환 한 발이 기가스를 전투 불능 상태로 몰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 이래서 기급 기가스가 싫어. 아군이 받쳐 주지 않으면 한계가 명확하잖아.’

나는 레온하르트 제국군이 조종사를 뽑기 위해 지구로 내려 보낸 전투 시뮬레이션 [대전쟁]에서 몇 번이고 기급 기가스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왔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군 NPC들의 존재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전투를 잘해봐야 기급 기가스 혼자서 전장을 휩쓰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출력 자체가 약한데다가.

‘아레스, 잔여 영력은?’

[3% 정도.]

‘아, 역시… 너무 팍팍 썼지?’

만일 내가 내 진짜 몸으로 R-13에 타고 있었다면 절대 이딴 식으로 싸우지 않았을 것이다. 단시간에 많은 적을 무찌른 것은 좋지만, 이렇게 적의 시선을 잔뜩 끈 상태에서 잔여 영력이 이만큼 밖에 없으면 후퇴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영력 발생기인 아이언 하트가 있으니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회복이 되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생길 리가 없는 상황.

그리고 바로 그때 아레스가 말했다.

[대하. 녀석이 왔다.]

‘오, 그래? 그럼 비상 탈출 장치를 부탁해.’

[오케이.]

대답과 동시에 R-13의 조종석이 통째로 분리되어 떨어졌고 나는 그 순간 마지막 남은 에너지로 가까운 적들에게 저격을 가했다.

조종사가 탈출하는 줄 알고 급히 달려들던 적들이 뜻밖의 공격으로 멈칫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대로 자폭 코드가 발동했다.

콰앙-!!

폭음과 함께 시점이 변한다.

[파트너! 괜찮은 거냐? 인질로 잡혀 갔다고 하던데!]

시점이 변하기가 무섭게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알바트로스함에 존재하는 유일한 인급 기가스 나폴레옹이 조종사조차 없이 발진해 우주로 뛰쳐나온 것이다.

당연하지만 처음부터 녀석이 올 거라고 예상하고 있던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애초에 전장에 돌입하면서 굳이 알렉스라는 녀석에게 보고를 부탁한 게 바로 이런 상황을 의도해서였으니까.

‘일단 전투부터 할까? 상황이 별로 안 좋아.’

[아, 알았다. 그나저나 원격조종… 그렇군. 이 기색이 바로 아레스인가.]

[그래, 나다. 반갑다, 애송이.]

[하! 머리통 밖에 없는 반푼이가 애송이?]

[뭐?]

‘아, 둘 다 조용히 해.’

만나자 마자 티격태격 하는 두 관제인격을 침묵시키고 정신을 집중한다.

나와 나폴레옹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거리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나폴레옹의 어마어마한 영력이 느껴진다. 자주 사용한 주제에 미안한 말이지만 R-13과는 비교조차 불가능한 힘이다.

‘아, 역시 이 정도는 되어야 혼자 쓸어버릴 만하지.’

피식 웃으며 공간을 넘는다. 2차전의 시작이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