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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2 형틀 속의 전쟁
[그러니까 다른 녀석들이라면 말이지.]
‘그 말은… 나는 가능하다?’
[그래. 그러니 말해라. 나에게 명령해라. 이건 절대 불가능하고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기대감과, 약간의 설렘이 담긴 목소리로 아레스는 말했다.
[네가 명령한다면…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아레스를 바라본다. 양팔이 훤히 드러나는 조끼 모양의 판금갑옷을 입고 회색 머리칼을 치렁치렁 늘어뜨린 녀석의 모습은 어디까지나 녀석의 기능이 만들어낸 캐릭터 이미지일 뿐이었지만, 그럼에도 제법 그의 진심이 보인다.
그렇다. 진심(眞心)이다.
인공지능을 상대로 웃기는 감상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난 녀석에게서 진심과 믿음을 느꼈다. 녀석은 무조건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신뢰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아레스.’
녀석의 이름을 부른다. 거리 때문인지 아니면 대천공을 지키는 방위 시스템 때문인지 흐릿하던 그의 모습이 선명해진다.
‘바로 지금, 나와 연결되어라.’
나는 명령했다.
그리고 그 순간, 시야가 새하얗게 변했다.
*
[완성이군요.]
[그래. 그나저나 짜증 나네. 은퇴를 하면 뭐해. 100년에 한 번씩 꼬박꼬박 불러대는데.]
[죄송합니다, 교수님. 저희로서는 아이언 하트에 위상(位相)을 어리게 하는 게 불가능한지라.]
[쯧쯧. 그러니 어서 마음속의 세계를 확장시켜 하늘도서관에 닿으면 되지 않느냐? 우주를 지배하는 우리 캔딜러인 중에 중급 신위가 나밖에 없다는 게 말이나 돼? 도마뱀 녀석 중에는 셋이나 되는데.]
[하하, 난감하신 말씀을.]
은은하게 빛나는 빛 덩어리들이 내 주위에 모여 있는 것이 보인다. 아니, 느껴졌다. 이것은 내 시점이 아니었던 것이다.
[누구냐 너희는. 너희는 뭔데 나를 내려다보고 있지?]
나는, 아니, 내가 보고 있는 시점의 주인이 으르렁거린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대로 질려 버릴 정도의 기백이었지만, 빛 덩어리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 대화한다.
[호전적인 성향이 보이는군요. 어떤 신입니까?]
[아레스.]
[아레스? 아하, 올림포스 신족 중에서도 유명한 전쟁의 신이군요. 하지만 이미 죽어 허신(虛神)이 된 존재가 아닙니까?]
아쉽다는 감정이 전해지는 영언에 가장 밝게 빛나는 빛덩어리가 깜빡거린다. 잘은 모르겠지만 한심하다는 기색이 담겨 있는 것 같다.
[쯧쯧. 여전히 멀쩡한 신들의 위상을 막 써서 좋을 거 하나 없다. 괜히 심기를 건드려서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우리 애들이야 알아서 조심하지만 기가스를 사간 녀석들도 그런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거든.]
그렇게 말하는 빛의 모습을 보다가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렇구나. 이건 아레스가 태어났을 때 처음 본 광경이야.’
정확히 말하면 아레스의 아이언 하트가 제작되었을 때의 광경이다.
기가스의 알파이자 오메가, 모든 어빌리티와 초월기. 그리고 무엇보다 막대한 영력과 관제인격이 깃들어 있는 아이언 하트 말이다.
[대답해라! 너희는 누구지? 아니, 그보다… 뭐야, 나는 뭐지? 내가 왜 여기 있지? 난 누구야?]
짜증과 분노, 의문과 당혹감이 섞인 목소리와 함께 강력한 영력이 타오르듯 확산된다. 그리고 그렇게 시점이 확장됨으로써 나는 이제야 그의 아이언 하트를 볼 수 있었다.
‘아니… 이게 뭐야?’
그리고 난 그렇게 보인 아이언 하트의 모습에 당황했다. 아이언 하트의 모습이, 전혀 의외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
[됐어! 성공이야!]
환희에 찬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다. 주변을 둘러보니 매우 익숙한 풍경이다.
‘알바트로스함이잖아?’
[그래. 연결에 성공했어! 내가 느껴져?]
‘느껴져는 뭐야, 느껴져는. 하지만 확실히… 그렇긴 하군.’
아레스와의 연결은 분명히 느껴진다, 라는 영역에 속해 있다. 녀석이 보고 있는 것이 나에게도 보이고 내가 보고 있는 것 또한 녀석에게 전해지는 것이다.
[어때? 전신안의 완전한 상태가?]
‘정신없어.’
나는 내 뇌 속으로 어마어마한 정보를 쏟아내는 수십 개의 [시점]을 느꼈다. 평소라면 이 정도로 많은 정보를 접하진 않겠지만 지금 알바트로스함은 비인들에게 게릴라전을 걸고 있는 상태였기에 더욱 그랬던 것이다.
콰광! 쾅!
시점 중 하나에 집중하자 곧 정보가 구체화된다. 내 입장에서 느끼자면 직접 그 전장으로 순간이동한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오, 나폴레옹이다. 누가 타고 있는 거지?’
시점을 이동한다. 나폴레옹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키잉-!
그러나 튕겨 나간다. 약간의 두통에 멈칫하는 내 옆으로 아레스가 모습을 드러낸다.
[다른 기가스에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잖아. 그렇게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으면 적 기가스를 뺏어 타는 것도 가능하다.]
‘아, 맞아……. 그랬었지.’
주변에 전투가 벌어져야만 발동된다는 참 특이한 제약을 하나 가지고 있을 뿐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성능을 가진 전신안이지만 그렇다고 만능은 아니다.
실드처럼 에너지 장으로 이루어진 차단막이 존재하면 시야가 가로막히며 탐지 능력이 있는 적이라면 아레스의 [시점]을 감지해 내는 게 가능하다.
초월자 정도쯤 되면 그냥 눈으로 봐버리고 공격하는 것조차 가능하니 조심해야 한다.
대천공 안으로 아레스의 [시점]이 들어온 것도 사실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현재 내 이웃사촌(?)이라고 할 수 있는 리전 소녀가 뭔가 변수를 제공했기에 가능했다고 짐작될 뿐 가능한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럼 결국 망가진 기가스를 조종해야 하나?’
[당장 알바트로스함에 연락을 할 수 있다면 당연히 제공받을 수 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어려워. 곰탱이 녀석이 전력을 끌어낸 상태라서 근처에 접근도 어렵고. 날 볼 수 있던 황녀 녀석은 너랑 같이 잡혀 간 상태니까. 하지만 망가진 기가스라도… 너라면 상관없잖아?]
‘하긴.’
아레스의 말에 피식 하고 웃으며 감각을 확장한다.
‘맞는 말이야.’
기이잉---!
적의 공격을 받아 반파된 R-13의 눈에 불이 들어온다. 전면 장갑이 부서져 조종석이 외부로 드러난 상태였지만 어차피 원격으로 조정하는 이상 상관없는 일이다. 아이언 하트만 살아있으면 되니까.
[시스템을 제어하겠어. 기급이니 도움은 필요 없다.]
기가스 중 가장 낮은 등급에 해당하는 기급은 관제인격이라고 할 만한 게 없다. 물론 조종을 보조하는 시스템이 존재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높지 않은 수준의 인공지능인 것이다.
아레스의 만병지왕은 모든 병기를 제어하지만, 그 병기를 지배하고 있는 관제인격이 있다면 당연히 녀석에게 양해를 구해야 한다. 아무리 신급 기가스의 어빌리티라도 영력을 품고 있는 관제인격을 강제로 굴복시키기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예전 비인들이 쳐들어왔을 때처럼 리전에 의해 관제인격들이 셧다운당한 상태라면 또 모르겠지만 일반적인 전투에서 관제인격이 파괴될 정도로 타격을 입는 경우는 잘 없다. 그전에 조종사가 사망하거나 아이언 하트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이 파괴되어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지는 게 보통인 것이다.
물론 내가 근처에 있다면 명령을 내려 조종 권한을 얻을 수 있겠지만, 실제 내 목소리가 닿지 않는 원격조종으로는 명령을 내릴 수 없다.
[시체는 어떻게 할까?]
‘조종석에 잘 앉혀놓자. 나중에 회수할 수 있도록.’
우리는 망가진 기가스를 찾았고, 그렇기에 그 안에는 기가스의 조종사가 탑승해 있는 상태였다.
조종석이 외부에서 보일 정도로 파괴된 기가스였으니 조종사가 무사할 리 없다. 뭔가 근접 무기에 관통당한 듯 전면 장갑이 깔끔하게 뚫리면서 상체가 절반 이상 짓뭉개진 상태.
나는 아레스가 R-13의 제어권을 획득해 조심스레 시체를 수습하는 걸 잠시 보다가 오늘의 어빌리티를 확인했다.
<수리>
<절약>
<점멸>
<관통>
‘깔끔하군.’
레어 어빌리티라든가 유니크 어빌리티라든가 하는 희귀한 녀석들은 없었지만 문자 그대로 깔끔하게 공격, 회피, 보조 어빌리티가 다 갖추어져 있다. 방어 어빌리티가 없는 건 좀 아쉽지만 까짓것 잘 피해내면 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R-13의 기본 어빌리티도 확인한다.
<저격>
‘오케이.’
주먹을 불끈 쥐며(그래봐야 영체 상태였지만)아레스의 감각에 따라 뇌파를 연결한다. 아무래도 익숙한 조종 방식은 매직 핸드 쪽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가릴 생각은 없다. 좀 싸우다 보면 금방 익히겠지.
‘아, 그러고 보니 아레스.’
[음? 왜?]
‘너 말이야. 네 아이언 하트의 생김새를 본 적이 있어?’
[생김새는 별 의미가 없지. 아이언 하트의 형태는 모두 동일한데.]
‘…어떻게?’
[정육각형. 다만 크기는 모두 다르다. 작은 건 주먹만 하고 큰 건 어지간한 방 정도의 크기지.]
‘큰 건 그렇다고 치고 주먹만 한 것도 있다……. 하긴, 입을 수 있는 형태의 기가스도 있으니 작은 아이언 하트가 있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나는 아레스와 연결되면서 보았던 녀석의 [기억]을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렇다면 말이 되지 않는데? 게다가 분위기를 보니 정작 그는 태어났을 때의 기억을 잃어버린 것 같다.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의문이 일기는 했지만 지금은 기가스의 비밀이나 탄생 따위가 중요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정신을 집중한다.
주변에서는 격렬한 전투가 이어지고 있다. 그들 중 누구도 반파된 기급 기가스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지만, 전력을 갖추기 전에 폭발에라도 휩쓸리면 위험하다.
우우웅--
<수리> 어빌리티가 발동되고 파괴된 R-13가 조금씩 원래의 형태를 찾기 시작한다. 비록 떨어져 멀리 날아가 버린 부품들 때문에 완벽한 수리는 불가능했지만 움직이는 데 불편함이 없을 정도만 되어도 충분하다.
[준비됐어?]
‘물론이지.’
고개를 끄덕이며 전장을 살핀다. 아군의 기가스는 고작 2대. 전투기는 8대인 데 비해 비인들의 전투기와 기가스는 그 배가 넘는다.
[버린 돌이군.]
‘그래. 일종의… 방패야.’
전장을 살펴보니 어마어마한 기가스와 전투기의 잔해들이 떠다니고 있다. 이건 레온하르트 제국군이 잘해서 물리친 적들이 아니다. 적들을 파괴한 것은 알바트로스함에서 뿜어진 포격이다.
즉 여기 있는 기가스는 적들을 물리치기 위해 포진한 것이 아니라, 적 기가스가 알바트로스함에 근접하는 걸 막기 위한 방어 병력인 셈이다.
‘하지만 그래도 전멸시키면 안 된다거나 그럴 리는 없겠지?’
[당연한 소리를. 요즘 아주 다 죽을상이던데 희소식 좀 전해줘야지.]
아레스의 말을 들으며 광자포를 꺼내 어빌리티를 적용하고, 이어 실드 에너지를 모조리 집중했다.
콰앙!
레온하르트 제국군을 우회하려고 복잡한 회피기동을 취하던 적 기가스의 머리가 너무나도 가볍게 날아가 버린다. 심지어 그뿐이 아니다.
콰앙! 콰앙!
수급으로 보이는 기가스를 꿰뚫고 뿜어져 나간 광자포가 비스듬하게 뿜어져 올라가 두 개의 머리를 더 부수고 그 위에 있던 전투기의 몸통을 후려치고 흩어진다. 에너지의 잔량까지 완벽하게 활용한 공격이었기에 전투기는 비틀거렸을 뿐 이내 자세를 잡았지만, 이내 덮쳐 오는 아군 전투기의 포격에 얻어맞았다.
‘트리플 킬!!!’
소리치며 나를 덮쳐 오던 기가스의 잔해를 발로 걷어차 자세를 고친다. 나를 향해 쏟아진 몇 개의 빛줄기와 탄환들이 모조리 빗나가 버린다.
‘그리고 1어시스트!’
사실 전쟁에 참여하면서도 어느 정도 자제를 해온 나다.
제대로 싸우지 않으면 내 입장과 안전, 그리고 나아가 목숨까지 위험하다는 생각에 나름대로 열심히 해왔지만, 결국 군인이 아닌 민간인 내가 왜 목숨 걸고 적을 몰살하고 다니겠는가? 적이 아무리 인간이 아니라 해도 내가 무슨 사이코패스도 아닌데 마구 죽이고 다니면서 즐거울 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콰광! 쾅!
근접해 돌진하는 기가스의 팔을 부드럽게 잡아당겨 내 뒤쪽으로 빗겨 지나가던 포격으로 던져 버리자 폭음과 함께 녀석의 몸이 터져 나간다. 녀석의 몸에는 배리어가 둘러져 있었지만 관통 어빌리티를 손에 걸어두었기에 아주 한순간 배리어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을 수 있었던 것이다.
[어라, 대하. 너, 왠지 평소랑 다른데?]
삽시간에 수급 2기, 기급 3기의 적을 파괴해 버리자 당황하는 아레스를 느끼며 가볍게 웃었다.
‘아, 별건 아니고. 오랜만에…….’
나는 나를 고문하던 비인 녀석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좀 정색하고 좀 해보려고.’
뒷일이고 뭐고 화딱지 나서 안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