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머리 위에-52화 (52/249)

0052 / 0117 ----------------------------------------------

Chapter 12 형틀 속의 전쟁

[보인다! 보여! 대하! 대하, 내 목소리 들려!? 아니, 그보다 괜찮은 거야?]

머릿속으로 걱정 가득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당연히 소녀의 목소리는 아니다. 저 멀리, 알바트로스함에 있는 머리만 남은 신급 기가스.

아레스였다.

‘괜찮아. 아니, 정확히 말하면 괜찮지는 않은데 죽을 정도는 아냐. 넌 어디에 있는 거야, 아레스?’

반색해 소리칠 뻔했지만 가까스로 자제하고 마음속으로 말을 건다. 이 주변에 지켜보는 이는 없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감시 방법이 전혀 없으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외부와 통신할 수 있다는 게 알려지면 비인들이 절대 가만히 둘 리 없다. 물론 내가 아레스와 통신할 수 있는 것은 통신기 같은 걸 가져서가 아니라 아레스의 어빌리티 때문이니 쉽게 들키지 않겠지만, 이 망할 비인들은 낌새만 이상해도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녀석들인 것이다.

그러나 그때 앞쪽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린다.

“아레스? 그 녀석 친구야?”

순간 경악해 멈칫한다. 최대한 평정을 가장하며 고개를 들어보니, 쇠사슬로 속박되어 있던 흑발의 소녀가 창살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는 상태인 것이 보였다.

완벽하게 결박당해 움직일 수 없어야 하는 상태지만, 마치 굼벵이처럼 바닥을 기어 창살에 바로 얼굴이 보일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것이다.

“아레스, 라는 건 무슨 말이야?”

일단 시치미를 떼 보았지만 리전 소녀는 은은한 자색이 감도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방금 대화한 녀석.”

“…….”

식은땀이 흐른다. 이 녀석, 그걸 어떻게 들은 거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비인들 사이에 섞여있던 정신계 능력자들도 내 마음을 읽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렇게 당연하다는 듯 내 마음을 읽다니.

‘아니다.’

그러나 순간 나는 새로운 가설을 떠올렸다.

‘이 녀석이 읽은 것은 내가 아냐. 아레스다.’

정보의 집합체이며 살아 있는 기계 생명체인 리전은 컴퓨터 같은 기계문명 기반의 물건들은 물론이고 마법문명 기반의 방어벽조차도 일단 접촉만 하면 순식간에 크랙킹하는 게 가능하다. 그리고 그렇다면…….

“저기 있네.”

[이런.]

지금처럼 아레스의 [시점]을 보는 것 역시 가능하다. 알바트로스함에서의 천현일 소장이 그랬듯이 말이다.

과연 내 앞에 떠오른 반투명한 사내는 소녀의 모습을 발견하고 당황했다.

[뭐야, 대하. 왜 리전하고 같이 있는 거야?]

‘몰라. 같이 가둬놨더라고.’

굳이 소리 내서 말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은 나는 아예 벽에 등을 기대고 고개를 숙여 버렸다. 아레스가 걱정할 게 뻔했지만 몸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괜찮은 척을 할 수가 없었다.

“너.”

‘소리 내지 않고 말해줄래?’

지구에서 들었다면 ‘그게 뭔 개소리야. 소리 내지 않고 어떻게 말해?’라는 핀잔을 들을 소리였지만 다행히 리전 소녀는 별다른 저항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너.’

소녀는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 그리고 그렇게 잠시 고민하던 소녀는.

‘응. 너. 너 좋아.’

‘뭐가 좋아?’

‘좋아.’

‘……?’

보라색 눈동자를 깜빡이며 나를 빤히 바라보는 소녀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린다. 좋다니. 뭐가 좋다는 거지?

“아, 그러고 보니…….”

무심코 입을 열어 중얼거리며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소녀의 모습을 바라본다.

‘그렇군. 저 녀석 때문에 이 근처에 인공지능이 전혀 없어.’

컴퓨터 같은 기계문명 기반의 물건들은 물론이고 마법문명 기반의 방어벽조차 순식간에 장악하는 게 가능한 리전이니 주변에 기계장치를 둘 수 없었던 모양이다. 녀석들이 비록 지금 도구로 활용하고 있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리전의 위험성을 전혀 모를 리는 없을 테니까. 우주를 비행하고 있는 우주모함이 리전에 장악당하면 절대 좋은 꼴을 보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대주술사이자 초월자인 모르네가 옆에서 지키고 있다면 아무리 리전이라도 다른 수작을 부리기 어려울 테지만, 대천공의 함장으로서 공사가 다망한 그가 24시간 리전을 감시할 수는 없으니 이곳을 이런 구조로 만들어둔 것이리라.

‘그런데 나는 왜 여기 가둬둔 거야? 설마.’

순간 나는 대천공에 감옥 자체가 별로 없는 게 아닌가, 하는 가설을 떠올렸다. 애초에 식인(食人)을 즐기며 권장하는 비인은 포로를 안 두기로 유명한 족속이다. 애초에 포로를 둘 일이 없으니 감옥 자체가 별로 없는 것.

하지만 생각해 봐야 짜증만 나는 일이었기에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떨쳐내고 앞쪽 철창에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이봐, 너. 뭣 좀 물어봐도 될까?’

‘응.’

‘…묘하게 고분고분하군.’

리전이라고 하면 이놈이고 저놈이고 호들갑에 그 무시무시하다는 연합조차도 절대 접촉 불가를 외치는 것치고는 내 앞에 있는 이 [여자애]는 그냥 백치미가 좀 보이는 미소녀에 불과하다. 애초에 기계생명체라면서 굳이 왜 외모를 이렇게 수려하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모습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분위기도 굉장히 평온하고 안정적이다. 최초 그녀를 봤을 때의 슬프고 애절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어진 것이다.

아니, 그걸 떠나서, 이 녀석 굉장히 행복해 보이는 표정이잖아?

과연 그 녀석은 방긋방긋 웃으며 말했다.

‘기분 좋아.’

‘…무슨 영문도 알 수 없는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너는 비인들과 한편이야?’

‘아냐.’

‘그럼 한편이 될 가능성은 있나?’

혹시나 몰라 붙인 질문에 소녀가 묻는다.

‘녀석들하고 한편 해?’

‘아니. 그럼 곤란하지.’

‘그럼 안 할게.’

‘……?’

뭔가 얼빠진 대화에 순간 멍하게 녀석의 모습을 바라보고 만 나였지만, 어쨌든 녀석이 비인들과 같은 편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녀석이 거짓을 말했을 수도 있었지만, 칭호를 확인할 수 있는 나는 간단히 그녀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나저나 아레스, 알바트로스함은 근처로 왔어?’

[아니. 알바트로스함은 여전히 번개폭풍 안에 있다. 이 모함은 대기권에서 좀 떨어진 위치에 있고. 다만 비인 녀석들도 떠날 생각은 안 하고 있더군. 슬슬 아스트랄 드라이브의 수리가 끝나서 포위망을 푸는 즉시 도주가 가능해. 알바트로스함이 탈출하면 리전을 활용하고 있다는 정보가 연합으로 넘어갈 테니 울며 겨자 먹기겠지.]

아스트랄 드라이브는 함선들에 광속을 뛰어넘는 가공할 비행 속도를 선사했지만 그런 엄청난 속도를 내기 위에서는 거기에 걸맞은 [가속]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게 문제다.

몇십 초, 몇십 분, 뭐 그런 단위가 아니라 수십 시간 이상의 시간 동안 가속해야 하기 때문에 탐지망을 펼쳐놓고 있다면 빠져나갈 수가 없다.

‘다만 일단 가속을 하면, 절대 안 잡힌단 말이지. 추격자들도 가속의 과정을 밝아야 속도를 붙일 수 있으니 압도적인 엔진 성능이 아니면 먼저 출발한 녀석을 따라잡을 수가 없어.’

그리고 그렇기에 비인들 역시 긴장을 풀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 엘라-3행성을 포위한 병력 층을 얇게 했다가 알바트로스함이 그걸 뚫어버려 가속에 필요한 며칠의 시간을 벌어버리면, 그들의 아킬레스건이라고 할 수 있는 리전의 존재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될 테니까.

‘흠, 그러면… 구출 작전은 준비 중이야?’

[준비는 했지만 실행할 엄두를 못 내고 있어. 너보다는 황녀 때문에 다들 몸이 달아 있는데도 그렇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신선 녀석이 배신한 것 때문에 모두 혼란에 빠져 있다. 도대체 그 자식은 왜 황녀를 비인들에게 넘긴 거지?]

알 수 없다는 목소리에 나 역시 황당함을 느꼈다.

‘뭐야, 너. 그 자식이 우리를 여기다 판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내가 여기 잡혀 있는 걸 보고 짐작한 거?’

[그럴 리가. 비인 놈들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 황녀를 해칠 죽일 거라고 협박을 시작했으니까. 당연히 녀석들의 말을 믿지 않으니 안 나가고 있지만 함선 내부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상태야.]

‘한번 찔러보는 거군.’

어차피 비인들은 세레스티아를 해치지 못한다. 과연 가능할까 싶었지만 대주술사 모르네가 세레스티아와 정식으로 결혼해 그 사실을 세상에 공표해야 하는 처지니까.

때문에 나는 청원이 벌인 짓과 현재 상황을 아레스에게 간략히 설명했다.

[그렇군……. 하지만 사명을 그런 식으로 우회할 수 있다니, 그 청원이라는 녀석은 선인 중에서도 특별히 강력한 모양이야.]

‘다른 선인들은 그렇게 못하는 거야?’

[하하. 선인들이 그렇게 사명을 마구 곡해할 수 있었으면 노블레스가 설 자리가 없을걸. 사명은 강력한 금제인 동시에 선인을 선인이게 해주는 힘이야. 절대적으로 따라야 하는 법칙이지.]

나는 아레스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서로 필요한 정보를 전달하고 이런저런 경우의 수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물론 상황은 여전히 암담하다.

객관적으로든 주관적으로든 이 비인들의 모함 대천공과 알바트로스함 간의 전력 차이는 상당하다. 기가스의 숫자는 수배를 가볍게 넘어서고 전투기의 숫자는 그 이상 차이 나니 정면으로 붙었다가는 잠시도 버티지 못하겠지.

더불어 우리를 놓치면 테케아 연방이 끝장이라는 것 역시 중요한 문제다. 녀석들은 절대 방심하지 않고, 그야말로 국가의 존망을 걸고 우리를 잡으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고맙다.’

그러나 그럼에도, 희망이 생겼다는 게 중요하다.

태연한 척했지만 여기로 잡혀 오고 나서 받은 고문은 내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고 있었다. 만약 희망도 없이 이런 포로 생활이 계속되어야 했다면, 내가 정말 견딜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냥 고문만 받다가 결국 죽어야 한다면, 차라리 빨리 죽는 편이 고통이라도 덜 받지 않겠는가?

[뭐, 뭐라는 거야, 이 멍청이가. 헛소리 말고 나랑 뇌파 연결이나 해. 네 몸은 스스로 구해야지!]

“뭐라고?”

너무 놀라서 입 밖으로 말을 꺼내고 말았다. 그리고 그렇게 당황하는 나에게 아레스가 말했다.

[나와 연결해. 뇌파 조종을 해서 내 주변에 있는 기가스를 조종해. 여기 녀석들로는 방법이 없다. 너 스스로가 널 구해야 해.]

‘하지만… 그런 게 가능해?’

내가 아레스의 만병지왕을 이용할 수 있던 건 어디까지나 녀석에게 탑승했기 때문이다. 녀석의 조종석은 녀석의 머릿속에 있었고, 나는 거기에 탑승해 원거리에서 다른 기가스를 조종했었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멀리서도 연결을 하는 게 가능하단 말인가?

그러나 답변은 황당하다.

[무슨 멍청한 소리야. 당연히 불가능하지. 애초에 우리 사이의 간격이 수십만 킬로미터에 가까운데 뇌파 연결 따위가 가능하겠냐? 무엇보다 거기서 다시 만병지왕을 가동하는 건 문자 그대로 허무맹랑한 일이지.]

‘…….’

순간 진심으로 화나려는 찰나에 녀석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다른 녀석들이라면 말이지.]

‘그 말은… 나는 가능하다?’

[그래. 그러니 말해라. 나에게 명령해라. 이건 절대 불가능하고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기대감과, 약간의 설렘이 담긴 목소리로 아레스는 말했다.

[네가 명령한다면…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