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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2 형틀 속의 전쟁
‘망할 놈.’
그리고 그때를 회상하며, 나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그 자식은 결국 끝까지 내 처우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이 녀석 정말 잘 버티는군. 훈련받은 녀석이야.”
“그런 거 전혀 없는데? 일반인인데?”
나로서는 당연한 답변이었지만 고문 기술자인 까아라는 녀석이 코웃음 친다.
“큭큭큭. 그런 어린애도 안 믿을 헛소리를 할 셈이냐? 이런 고문에도 꿈쩍하지 않고 무엇보다 마인드 컨트롤도 자백제도 전혀 안 먹히는 녀석이 일반인이라고?”
“하지만 사실인 걸 어쩌나.”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 얼굴 근육을 씰룩이며 중얼거리자 악어의 머리를 가진 까아가 표정을 굳히며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다. 8개의 팔이 부르르 떨리는 걸 보니 아무래도 내 태도에 화가 나는 모양이다.
“…네 몸을 너무 상하게 하지 말라는 함장님 말을 믿고 이렇게 뻗대는 것이냐?”
“뭐 믿을 만 한 놈이라고 그놈 말을 내가 믿어? 그냥 늙은이한테 겁먹어서 사리는 주제에 선심 쓰는 척하다니 웃기지도 않는군.”
“이… 새끼가!!”
콰드득!
순간 분노를 참지 못한 까아가 내 어깨를 후려쳤고, 내 몸은 너무나도 쉽게, 마치 수수깡처럼 산산이 부서졌다.
애초에 이것들은 하나하나가 인간을 가볍게 부숴 버릴 만한 괴물이고, 거기에 더해서 강력한 이능을 수련한 능력자다. 굳이 작정하고 치지 않아도 내 목숨 따위는 풍전등화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까아!! 이런 미친 새끼가!!”
지금까지 가만히 고문 과정을 지켜보기만 하던 무투 오거 아도가 기겁하며 녀석을 나에게서 떼어놓는다. 그러나 상황은 이미 심각해서 한쪽 벽에 떠 있던 화면이 복잡하게 일그러지며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탈진 상태였던 몸에 힘이 급속도로 빠지기 시작하고 시야가 점멸(點滅)한다. 머리를 맞은 것도 아니고 어깨즈음을 맞은 것이지만 한순간 쇼크가 온 것이다.
이런저런 기묘한 초능력을 가진, 더불어 무적의 조종사라고 할 수 있는 나지만 맷집은 그냥 평범한 고등학생에 불과하다. 농담이 아니라 장난 삼아 쳐도 위험한데 한순간 공격에 살의가 담겼으니 치명적인 타격을 주는 게 당연하겠지.
“이런, 젠장! 당장 치료사 놈들을 불러!”
“이봐, 아도. 이까짓 인간 때문에 그렇게 호들갑을 떨 필요는…….”
“닥쳐, 멍청한 놈. 지금 이 상황에서 엘로힘이 정말로 끼어들면 우리 테케아 연방 입장이 어찌 될지 생각도 못해?”
“하, 하지만 그 선인이 입에 담은 것은 황녀뿐이었어. 이 녀석은 정말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고.”
당황하며 변명하는 까아의 말에 아도의 눈이 붉게 타오른다.
“크르르륵!!!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그래서 괜찮을 거다? 큭큭큭! 그래! 확실히 그럴 확률이 높지. 하지만 함장님이 멍청해서 이 녀석을 크게 상하지 않는 선에서 심문하라고 하셨다고 생각하나? 그 알량한 가정에 우리 테케아 연방을 다 걸어도 괜찮을 정도의 확신을 가지나?”
여태껏 흥분하는 쪽은 까아였고 그걸 말리던 쪽이 아도였지만 아도가 정색하고 으르렁거리자 오히려 까아가 주눅 들어 제대로 눈조차 마주치지 못한다.
내심 통쾌한 광경이었지만 이내 그 광경조차 깜빡깜짝빡 흐려진다.
‘아, 정말 죽나…….’
순간 드는 생각에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온다. 나름대로 조심해서 살아왔는데 이리저리 휩쓸리다가 무력하게 죽어야 한다니 기가 찬다. 내가 무엇을 하든 상관없다고 운명이 비웃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샤아아앙---!
그러나 몸에 긴장을 풀고 축 늘어지던 순간, 온화한 빛이 내 몸을 휘감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옆에 악어… 아니, 정확히는 도마뱀 쪽에 가까운 파충류의 머리를 가진 비인의 모습이 보인다.
“거참, 살다 살다 내가 인간을 치료하는 날이 올 줄이야…….”
비인들은 세레스티아에게 어떤 해도 끼칠 수 없다. 비록 청원이 세레스티아를 그들에게 넘겨 버렸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안전에 대한 철저한 보호를 강요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후손을 만들어야 하는 [목적] 때문에 강간까지는 허용했지만 다만 거기까지였다. 그 와중 그녀의 몸이 정도 이상으로 상하면 안 되며 그녀의 정신을 현혹하는 것도 안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죽음은 절대로 금지였다.
그리고 그것들을 지키지 못한다면, 그 대가는 바로 테케아 연방의 멸망이다.
‘하지만 나는 상황이 전혀 다르단 말이지.’
청원은 결국 내 처우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세레스티아에 대한 이야기만 하다 떠나 버렸고, 그렇기에 여기 있는 녀석들은 내가 누군지도. 청원이 왜 굳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는지도 모른다.
만약 평상시에 이런 일이 있었으면 나는 즉시 능지처참되어 녀석들의 먹이가 되었을 것이다. 이 망할 우주모함에서 끌려다니면서 느낀 것이, 비인들은 상상 이상으로 식인(食人)을 즐겨 한다는 것이다.
돌아다니다 만난 비인 중 태반이 나를 극상의 진미를 보듯 바라볼 정도였으니 더 말할 필요조차 없겠지.
‘그나마 녀석들이 청원에게 겁을 먹고 있다는 게 유일한 생명줄인 건가.’
그렇다. 그게 내가 여태까지 살아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청원은 내 안전을 전혀 보장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나에게 무슨 짓을 해도 된다는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비인들이 ‘혹시나 모를’ 상황이 걱정되어 나를 해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이 배에 존재하는 최강자이자 대주술사인 모르네 역시 마찬가지여서 그는 나를 가둬서 심문하라고 했지만, 그러면서도 몸을 상하게 하는 것은 피하라고 명령했다. 청원의 힘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체감했을 이가 바로 그일 테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우우웅--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는 사이 전신에서 격통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도마뱀의 머리를 가진 것치고는 거의 인간에 가까울 정도로(피부색은 전혀 다르지만)깔끔한 손가락을 가진 비인의 손에서 빛이 뿜어질 때마다 부서진 뼈가 원래대로 붙고 흐르던 피가 다시 몸 안으로 흡수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몰려오는 격통은 긍정적인 반응이다. 방금 전에는 죽음 직전까지 몰려 고통조차 느끼지 못했는데 지금은 고통을 느낄 만큼 회복되었다는 뜻이니까.
“쯧. 치료사로서 조언하자면 심문은 그만둬라. 적어도 오늘은 더 이상 안 돼.”
“하지만 치료했잖습니까?”
“미안하지만 치료술은 만능이 아니다. 무엇보다 치료술을 계속 받아들이기에는 이 녀석 몸이 너무 약하기도 하고. 인간들이 약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이 녀석은 개중에서도 정말 약하군. 마나량도 너무 형편없어서 스스로 회복할 능력이 없다.”
“…제길. 결국 뭐 하나 알아낸 게 없는데.”
바득바득 이를 가는 까아의 모습에 아도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회복도 시킬 겸 다시 가둬두고, 잠시 나를 따라와라, 까아.”
“으음… 알겠다.”
잔뜩 주눅이 든 까아가 아도를 따라가자 치유사 녀석도 나를 버리고 어디론가 가 버린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기잉 하는 소리와 함께 철창이 내려온다.
“으으…….”
그리고 나는 모두가 사라진 감옥 안에서 몸을 웅크린 채 온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 제길… 아파…….”
[기억]에서 지옥 같은 고통을 셀 수 없이 경험한 나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픈 건 아픈 거다.
특히나 지금 내 몸 상태는 농담으로라도 좋다고 할 상황이 아니어서 치유술을 받았음에도 후끈후끈 열이 오르고 살갗이 찢어지는 것만 같은 고통이 전신을 질주한다.
“왜 내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거지.”
뒤늦은 생각이지만 아레스가 느낀 [불길함]의 정체가 바로 청원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다 소용없는 일인 것이, 아무리 눈치가 좋아도 아레스가 말한 [불길함]이 알바트로스 내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몇 번이고 전투를 해오는 상황이었던 만큼 당연히 전장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예지한 거라고 생각하는 게 정상일 테니까.
‘이미 지난 일은 관두고… 여기서 탈출해야 해.’
물론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이곳은 알바트로스보다도 훨씬 큰 규모를 가지고 있는 엑사(Exa)급 우주모함(Carrier)인 대천공(大天空). 단지 감옥에서만 탈출하는 게 문제가 아니다. 어지간한 도시 몇 개를 합친 것보다도 거대한 우주모함 안쪽이니 기껏 감옥에서 탈출해 봐야 적진 한가운데에 있는 상태인 것이다.
게다가 무엇보다.
“열려라.”
조용히 중얼거린다. 그러나 반응이 없다.
“열어!”
명령한다. 그럼에도 소용이 없었다. 닫힌 철창은 아무런 반응 없이 고요하다. 이미 삼 일의 시간 동안 몇 번이고 확인한 내용이다.
‘어떻게 된 거야. 비인 녀석들은 인공지능을 안 쓰나?’
내 [명령]을 듣는 것은 오직 인공지능들뿐이다. 정확한 기준은 모르겠지만 몇 번의 실험 결과 적어도 내 말을 인지하고 이해할 정도의 기능을 가진 인공지능들만이 내 명령에 반응한다는 것을 알아냈었으니까.
‘그런데 반응이 없어.’
기본적으로 이런 거대 함선이라면 관제인격이 존재하는 게 당연하고 관제인격이라면 함선의 대부분을 자신의 인식 범위로 둔다. 감옥이 무슨 개인 프라이버시를 지켜야 하는 공간이 아닐진대 관제인격이 인식하지 못한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래서는… 방법이 없다.’
몇 번이나 반복된 절망이 엄습하는 것을 느낀다.
그렇다. 방법이 없었다.
내가 살아날 수 있는 경우의 수 자체가 보이지 않는다.
지금 여기에서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그 망할 난쟁이 괴물 자식이 와서 또다시 고문을 시작할 것이다.
일반인들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에 강한 나였지만, 그렇다고 내가 무슨 무감인 같은 건 아니다. 고문을 당하면 당연히 고통스럽고 너무나도 힘들다.
어차피 내가 뭘 하더라도 녀석들의 태도가 똑같다는 걸 눈치 챘기에 뻗대는 것이지 이미 나는 한계에 봉착한 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다못해 아레스에게 말이라도 전할 수 있다면…….”
아레스의 전신안은 어마어마한 범위의 우주를 둘러보는 게 가능하다. 만약 이 근방에 전투가 발생해 이 배가 녀석의 [시선] 안에 들어올 수만 있다면 녀석은 충분히 대천공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그의 시선이 대천공을 발견할 수 있다면.
있다면…….
“…제길.”
순간 중대한 문제점을 깨닫고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대천공을 발견하는 게 문제가 아니다. 객관적으로 알바트로스함은 대천공에 비해 전력이 약해 숨어 다니고 있는 판국인데 지금 녀석들을 발견한다고 뭘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나마 이곳 행성의 번개 구름 때문에 잘 숨어 다니며 소규모 접전을 벌인 것이지 전투기나 기가스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부족한 우리가 정면 대결을 하면 단번에 몰살당하고 말 것이다.
“…형틀.”
“음?”
느닷없이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주변에 있는 비인 녀석들이 다 빠졌는데 들린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여기는 지키는 간수조차 없는 장소가 아니던가?
“왜 형틀을 메고 있어?”
나는 그제야 내 맞은편에 있는 철창 속에 누군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차르릉!
개목걸이를 한 그녀는 전신을 쇠사슬로 결박당해 있는 상태다. 신장의 2배는 됨직한 긴 흑발은 그냥 마구 풀어헤쳐 바닥에 늘어뜨리고 두 손 역시 커다란 강철 수갑으로 묶여 있는 상태다.
“너는…….”
아는 이 하나 없어야 할 리전의 모함이었지만, 놀랍게도 익숙한 얼굴이다. 그녀는 알바트로스함에 침입해 그 안에 있던 모든 관제인격을 엉망으로 만들었던 리전이었던 것이다.
웅-
그리고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묘하게 머릿속이 울리는 느낌이 들었다. 동양인이라고도, 서양인이라고도 말하기 미묘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틀림없이 인간으로 보이는 모습을 하고 있는 그녀를 통해, 내 감각이 [확장]해 가는 느낌이 들었다.
[보인다! 보여! 대하! 대하 내 목소리 들려!? 아니, 그보다 괜찮은 거야?]
머릿속으로 걱정 가득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당연히 소녀의 목소리는 아니다. 저 멀리, 알바트로스함에 있는 머리만 남은 신급 기가스.
아레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