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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1 납치
화악-!
거의 폭발한다고 해도 좋을 기세로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의 얼굴이 당혹감과 부끄러움으로 뒤죽박죽 범벅이가 되어버린다.
내가 처음으로 본,
그녀의 진짜 표정이었다.
“푸훗!!”
잠시 주변이 적막에 휩싸였을 때, 뒤쪽에서 웃음이 터진다. 새빨개진 얼굴을 하고 있던 세레스티아는 단번에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며 뒤쪽을 돌아보았다.
“하지 마.”
서늘한 목소리였지만 상대는 피가 강이 되어 흐르는 전장에도 웃으며 걸어 들어가는 전투계열 초월자다. 고작 그 정도 위협이 통할 리 없지.
“푸훗! 푸하! 푸하하하하!!!! 설마 차이다니! 우주 아이돌로 유명한 별빛의 여왕이 차이다니! 심지어 당연히 상대가 자길 좋아할 거라고 확신했는데 틀렸어! 크하하하하! 아, 나 미치겠다. 죽을 거 같아, 크크크크크!”
“시, 시끄러워, 이 곰탱아!!”
“푸하하하하!”
세레스티아가 뭐라 하든 말든 유쾌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린다. 내 뒤에서 조용히 서 있기만 하던 보람이 깨소금이라는 표정으로 웃는다.
“꼭 저렇게 세상 사람들이 다 자길 사랑할 거라고 믿는 공주병이 있다니까요.”
“실제로 공주보다도 대단한 황녀지만 말이지. 시비 걸지 말고 조용히 좀 있어. 경호한다고 와서 싸움 붙일 거야?”
“으… 그건 미안해요, 선배. 이상하게 저 녀석만 보면 화가 나서.”
갑옷을 입었을 때만큼 심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의 증상(?)을 보이는 보람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다시 세레스티아를 바라본다.
그녀는 여전히 상기된 얼굴을 수습하지 못한 상태였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더니 청원을 바라본다.
“어쨌든 평가해 줘요, 할아버지.”
“결국 강제인 거냐?”
“어, 어쩔 수 없잖아! 살긴 살아야 하는데! 일단 여기서 살아나간 다음에 거절하든지!”
빼액 소리 지르고 청원을 바라보자, 청원이 고개를 끄덕인다.
“황녀님의 요청이라면.”
대답과 동시에 허공에 빛줄기가 떠오르더니 순식간에 몇 개의 문자를 만들어낸다. 순식간에 허공에 그려진 빛의 부적은 잠시 주변을 맴돌다가 청원의 눈에 스며들었다.
“어때요? 이 정도면 우리를 황성으로 데려가 줄 수 있겠죠?”
“황성으로 데려간다고?”
난데없는 말에 의문을 표하자 세레스티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매파 할아버지는 사명에 관련된 일에만 물질계에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제약이 있거든. 하지만… 내가 신혈을 강화할 만한 반려를 발견하고 그래서 그가 상대가 충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되면 황성으로 데려가 혼인 절차를 받게 할 수 있지. 그건 사명에 관련된 일이니까.”
“그렇군… 그리고 그렇게 황성에 가면 저 신선이 굳이 더 돕지 않아도 우리가 연합에 신고할 수 있다?”
“바로 그렇지.”
일단 지금 상황을 외부에 알리기만 하면 상황이 해결된다. 비인들은 연합의 적으로 규정된 리전을 병기로 사용했고 그 증거는 알바트로스함에 잔뜩 남았다. 그 증거들을 가지고 신고한다면, 틀림없이 연합 측에서 제재에 들어갈 것이다.
키잉!
우리가 그렇게 대화하고 있을 때 청원의 몸에 깃들어 있던 기운이 유리가 깨지듯 흩어진다. 어째서인지 청원의 표정이 꽤나 심각하다.
“어때요, 할아버지?”
“…알 수 없소.”
묵직한 목소리에 나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애매한 기분을 느꼈다.
물론 이런 느닷없는 결혼 이야기는 싫었지만, 이렇게 아웃되면 결국 적에게 포위당해 있는 풍전등화의 사태는 해결되지 않기 때문. 그러나 세레스티아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됐어!”
“되긴 뭐가 돼. 모르겠다고 했으니 안 되는 거 아냐?”
“안 되는 사람은 안 된다고 해. 애초에 신혈을 강화할 인재는 거의 없으니 모르겠다고만 하셔도 엄청난 평가야. 과연! 사자안을 별로 연마 안 한 나도 처음 볼 때부터 심상치 않다고 느낄 정도였으니!”
살았다는 생각 때문인지 약간 밝아진 세레스티아의 모습에 슬쩍 뒤통수를 긁었다.
어쨌든 잘되었단 말인가? 그러니까 이 녀석과 혼인을 하러 황성이라는 곳에 가야 한다고?
그런데 뜻밖에도 청원이 고개를 흔들었다.
“미안하게 됐구려.”
“음? 할아버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안 되는 거?”
“평소라면 충분히 합격이오. 설마하니 미래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니……. 저의 눈을 가릴 수 있는 존재는 그리 많지 않으니 틀림없이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가진 존재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럼 된 거잖아요. 이제 우리를 황성으로 데려가 주면.”
“그러나.”
가볍게 말을 끊으며 청원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제6황자에게서 9할에 가까운 가능성을 보았소. 변수를 만들고 싶지 않구려.”
그의 눈동자가 회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세레스티아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소리쳤다.
“…천현일 소장!”
파앗, 하고 어느 정도 떨어져 있던 천현일 소장의 몸이 공간을 뛰어넘어 우리와 청원의 사이에 끼어 들어온다. 그의 전신을 휘감고 있는 청색의 기운은 보기만 해도 다리가 떨릴 지경이었지만, 그는 감히 청원을 향해 주먹을 내밀지도 못한다. 청원 역시 그가 덤비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아는 듯 태연한 표정이다.
“정말 안타깝구려.”
“억지 부리지 마요! 이건 할아버지한테도 부담 가는 일이라고요! 아무리 사명을 향해 가는 길이라도 이건 월권이에요! 계약을 무시한 반동은 절대 가볍지 않을 텐데!”
어느 정도 걱정이 섞인 목소리였으나 청원의 목소리는 확고하다.
“그렇지 않소. 이건 사명을 더욱 확실하게 완성하는 방법이니까. 나는 충분히 그 정도 판단을 내릴 능력과 유연함이 있다오.”
그렇게 말하며 한 발짝 한 발짝 앞으로 나선다. 천현일 소장은 세레스티아의 앞을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셀! 이 녀석에게 자기 방어의 사명이 있어?”
“응! 하지만 방어뿐이지 공격은 불가능해! 심지어 자기 방어의 사명이 있다는 걸 밝히고 경고까지 해야 반격이 가능하고. 타인을 강제하는 것도 안 되고 멋대로 물질계의 운명에 간섭해도 안 되는데!”
“하지만 그런 것치고 너무 당당히 다가오잖아!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냐?”
인간을 가볍게 내려다보는 덩치의 천현일 소장이 험악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자 그것만으로 엄청난 패기가 뿜어져 나왔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자리에서 졸도해도 이상하지 않을 기세 속에서 청원은 너무나 태연히 걸음은 내딛고 있다.
‘힘의 차이가 너무 명백해!’
천현일 소장은 초월자로서 하나의 문명을 파괴할 수 있는 힘을 갖춘 초월적인 존재였지만, 그른 그에게조차 상대는 대적 불가능의 괴물이다.
“미안하구나.”
여태까지의 존대를 버린 청원의 눈에 일순간 죄책감이 실린다. 그리고 그걸 느낀 것일까? 세레스티아가 애원한다.
“…할아버지, 이러지 마요.”
“미안하다. 나는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구나.”
그렇게 말하며 오른손을 들어 올리자 그의 주변으로 빛으로 이루어진 수십 개의 부적이 떠오른다.
천현일 소장은 강기를 일으키며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빛으로 만들어진 부적들은 가볍게 그를 스쳐 지나가 나와 세레스티아를 감싸고---
파앗!
“뭐, 뭐야!? 이놈들 어디에서 나타난 거야!?”
“크르륵! 인간이다! 인간 놈들이 배 안에 들어왔다!”
“침입이다! 모두 집결해!!!”
우리는 비인들의 모성. 대천공(大天空)에 도착해 있었다.
*
마치 잠자리 같은 날개를 가진 두 명의 부자가 대로를 걷고 있다. 인간을 닮았지만 인간은 아닌, 페린족이었다.
“아빠아빠! 저기저기 엄청나게 큰 갑옷이 있어요!”
“후후후. 우리 알터가 신의 유해(遺骸)를 봤구나.”
“유해라니, 갑옷이 아닌 거예요?”
그들이 걷고 있는 성 셀마크론의 중앙에 있는 종전의 광장에는 마치 산처럼 거대한 무언가가 자리하고 있다. 마치 두터운 판금으로 만들어진 갑옷처럼 생긴 그것은 약간은 기울어진 상태로 광장 중앙에 서 있는 것이다.
“후후, 알터. 한번 저 유해의 안을 들여다보겠니?”
“잠깐만요!”
파라락! 하는 날갯짓 소리와 함께 소년의 몸이 날아오른다. 그리고 그는 잠시 허공을 유영하다가, 신의 유해라 불린 갑주의 팔 부분을 보고 다시 땅으로 내려왔다.
“아빠아빠! 저 갑옷 안이 가득 차 있어요! 게다가 그 안이 뭔가 이상해요! 기계 같은 것들이 잔뜩 들어 있고 그 안에서 스스로 빛나고 있어요!”
“후후. 그게 저것이 신의 유해라고 불리게 된 이유란다. 누가 봐도 갑주처럼 생겼지만 안은 가득 차 있고 마치 살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맥동하고 있지. 게다가 잘 보면 몸의 다른 부분과 이어지는 부분들이 보인단다. 때문에 신들의 전쟁에서 패하고 머리와 사지를 잘린 신의 몸통이라고 부르고 있지.”
“헤에… 하지만 저렇게 빛난다면 뭔가 보물 같은 게 아닐까요? 들고 나오면 안 되는 거예요?”
“후후. 신의 유해가 여기에 떨어진 건 아직 성 셀마크론이 지어지기도 전이었단다. 약 200년 전에 떨어진 신의 유해에 관심을 가진 존재는 매우 많았지만… 그동안 그 누구도 신의 유해를 만져 보지조차 못했지. 신의 유해를 감싼 강력한 역장은 황실의 대전사들도 흠집조차 내지 못할 정도란다.”
“헤에…….”
아버지의 설명에 소년은 신기하다는 눈으로 신의 유해라 불린 거대한 몸통을 바라보았다.
말이 좋아 몸통이지 도시의 어떤 건축물보다도 거대한 크기다. 거짓말 조금 보태면 그 안에 수십 명이 들어가 살아도 될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크기.
주변을 둘러보니 자신 말고도 수많은 사람이 신의 유해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인다. 신의 유해가 있는 종전의 광장은 성 셀마크론의 명소 중 하나였던 것이다.
“…어라? 아빠.”
“응? 왜 그러니, 알터.”
느닷없는 부름에 부친이 고개를 숙이자 알터가 말한다.
“저기 저 몸통, 움직였어요.”
“흠? 하하하! 말도 안 되는 소리란다, 알터. 지금까지 그 어떤 존재도, 심지어 황제조차도 신의 유해를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단다. 알겠니, 알터? 신의 유해는…….”
크그긍…….
그러나 그때 거대한 몸통이 움직인다.
“…뭐라고?”
“어? 뭐야? 지금 신의 유해가 움직였어!”
“잘못 본 거 아냐?”
“아냐! 틀림없이… 우왓!?”
구우우웅----
주변으로 퍼져 나가는 묵직한 기운과 함께 200년 이상 바닥에 박혀 있던 거대한 몸통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종전의 광장에 모여 있던 이들은 모두 충격에 빠져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것을 바라보기만 했다.
“떠, 떠오른다!”
“신의 유해가! 전신의 몸통이!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다!!”
사람들의 비명대로 거대한 몸통이 천천히 하늘로 날아오른다. 그 최초 속도는 열기구가 떠오르듯 느릿느릿했으나, 점점 빨라져 최후에는 빛살처럼 하늘 끝까지 솟구친다. 모든 사람이 멍하니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잠깐 사이에, 거대한 몸통의 모습은 점이 되어 사라져 버린다.
“…아빠. 신의 몸통이 사라져 버렸어요.”
“나도… 나도 봤단다, 알터. 하지만 대체.”
신의 유해가 사라져 버린 하늘을 보며 그가 신음한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
아스트랄 드라이브(Astral Drive).
그것은 4문명의 끝에 도달한 캔딜러 성인들이 만들어낸 초과학과 마법의 합작품이다. 광속이라는 일종의 [한계를 넘기 힘든 물리법칙의 제약]에서 자유롭기 위한 결과인 것이다.
물질이 빛보다 빠르려면 무한대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하지만 대상이, 물질이 아니면 어떨까?
아스트랄 드라이브는 우주선 자체를 아스트랄계로 이동시켜 중첩가속(重疊加速)을 시행한다. 어느 정도 속도가 올라가면 저항에 부딪히는 물질계와 다르게 물리법칙의 영향 밖에 있는 아스트랄계에서는 속도가 빨라진다고 우주선을 막아서는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아스트랄 드라이브를 가속하면 최초에는 극도로 느린 속도를 내게 된다.
우주선도 아닌 비행선에 불과한, 극히 느린 속도.
그러나 가속(加速)이 중첩(重疊)되기 시작하면 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일주일, 보름, 한 달, 심하면 년 단위까지 계속해서 속도를 더해가기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가속이 계속되면 우주선은 물질계에서는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소모되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광속을 가볍게 넘어서며.
마침내 광속의 수십 배, 수백 배, 수천 배 이상 가속한다.
이론상 중첩가속은 무한정 속도를 높일 수 있다. 물론 그만한 에너지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스타게이트의 도움 없이 수십 개의 은하를 넘는 게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바로 그 아스트랄 드라이브를 가동시키는 존재들이 있었다.
쿠구구궁!!! 쾅! 파악! 퍼엉!
땅속 깊숙한 곳에 박혀 있던 거대한 [왼팔]이 대지를 꿰뚫고 하늘로 날아오른다.
대수림 안에 떨어져 있던 [오른팔]이 숲을 헤치며 하늘로 날아오른다.
바다 속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왼발] 역시 하늘로 솟구치고.
용암 속에 빠져 있었던 [오른발] 역시 하늘로 솟구쳤다.
그것들은 온 우주에 흩어져 있었다. 같은 은하에 있는 부위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그것들 간의 거리는 상상을 초월했지만 완벽히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쿠오오---!
그것들은 그렇게 모이기 시작했다.
신의 명령에 따라.
-당신의 머리 위에 2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