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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1 납치
‘맙소사, 초월자라니. 그것도 천현일 소장보다 훨씬 더 강한…….’
기겁하는 나에게 청원이라 자신을 소개한 노인이 말했다.
“엘로힘(Elohim)에서 나왔소.”
느껴지는 힘은 아득하다. 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
천현일 소장이 하나의 문명을, 하나의 행성을 파괴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졌다고는 해도 그걸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해야 할 거라고 예상된다. 할 수 있다뿐이지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니라는 것.
하지만 이 노인은 상황이 전혀 다르다. 그에게서 전해지는 힘은 살벌하기 짝이 없어서, 진지하게 힘을 쓰면 일격에 행성을 파괴하고 작정하면 별들조차 부수는 게 가능한 초월적인 존재라는 게 느껴지는 것이다.
농담이 아니라, 이쯤 되면 신이나 다름없다.
‘아니, 신이 맞나?’
순간 그렇게까지 생각하다가 이제야 그의 말을 이해한다.
“엘로힘이라고요? 그 신선들의 단체라는?”
“신선들은 엘로힘의 일부일 뿐이지만… 적어도 내가 신선인 건 맞소. 기나긴 세월 동안 수행 중이지.”
노블레스와 엘로힘.
사실 지구 출신의 나는 그들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온갖 전투를 해온 요 일주일간 그 이름들은 질리도록 들었다.
‘겁낼 필요 없다. 비인들은 리전과 손을 잡았어! 그 사실만 연합에 알리면 모든 게 끝이다!’
대체로 그렇게 말하면서 노블레스가 어쩌구, 엘로힘이 어쩌구, 전룡단(戰龍單)이 어쩌구, 선경(仙境)이 어쩌고 떠들어댔던 것이다.
‘그래. 우주를 지배하는 세력이라는 말이지.’
정확히 말해 우주를 지배하는 건 연합이지만 바로 그 연합을 양분하는 세력이 바로 노블레스(Noblesse)와 엘로힘(Elohim)이니 그리 크게 틀린 말은 않겠지.
어쨌든 연합을 양분하는 두 세력 중 하나인 노블레스는 [귀족]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존재들이 모인 집단이다. 흔히 말하는 [혈통의 고귀함]을 타고난 자들.
당연한 말이지만 그 안에 인간은 없다. 인간은 우주에서 [가장 흔한 종]이니까.
노블레스에 들어가는 건 수십 미터에서 수백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덩치를 가지고 있다는 용종 드래곤(Dragon)이나 슈퍼컴퓨터 이상의 지능과 물질계 최강의 초능력을 타고난다는 프라야나(prajna), 그리고 다른 고위종족들조차 감히 재현하지 못하는 고위 과학기술을 유지하고 있는 켄딜러 성인 등이다.
그리고 그중 켄딜러 성인은 내가 유일하게 본 노블레스인데 알바트로스함의 기술부장으로 일하고 있는 니단이 바로 그 켄딜러 성인이다.
‘그리고 이 녀석이… 엘로힘 소속의 신선.’
노블레스가 [혈통의 고귀함]을 타고난 존재들이라면 엘로힘은 [스스로 완성된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긴 시간 동안 도를 닦아 신선이 된 자들이나 극한의 단련이나 수행으로 초월지경에 이른 존재가 바로 그들인 것.
나는 슬며시 그의 머리 위를 훔쳐보았다.
[봉래도]
[혈통관리인 좌자]
‘혈통관리인?’
누가 봐도 서양인인 그가 동양인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거야, 뭐 어차피 지구도 아닌 우주이니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겠지만 칭호 자체는 상당히 기괴하다.
이런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 존재가 고작 혈통이나 관리한단 말인가?
“셀, 무슨 일이야? 저 사람은 여기에 어떻게 들어왔고? 우리 물 샐 틈 없이 포위된 상태 아니었어?”
“아, 물론 그렇기는 한데… 그런 포위가 별로 상관없는 사람이거든. 아, 소개할게. 이분은 청원(淸原), 나는 매파 할아버지라고 불러.”
“…매파 할아버지?”
본명이 아닌 가명을 소개받는 거야 흔하디흔한 일이라 신기할 것도 없지만 이 호칭은 혈통관리인보다 더 해괴하다. 매파라니.
“매파라니. 독수리파 매파 호랑이파 할 때 매파?”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당연히 연인들을 짝지어주는 매파를 말하는 거지.”
“…그 매파는 혼인을 중매하는 할머니를 나타내는 단어거든? 중매 매자에 할미 파인데.”
어이가 없어 반문했지만 세레스티아는 아랑곳하지 않는 얼굴이다.
“뭐 어때, 어울리면 그만이지. 어쨌든 매파 할아버지, 이 녀석으로 움직일 수 있을 거 같아요? 지금까지 중에 가장 가능성이 높은 편인 거 같은데.”
“아니, 잠깐.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설명부터 해야지. 그리고 저 사람이 매파라면 왜 굳이 나한테 소개하는 거지?”
“그건 내가 설명하겠소.”
청원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그는(본명은 좌자였지만)정중한 표정으로 사람 좋게 웃었다.
그렇게나 신적인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매파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세레스티아의 태도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다.
‘이게 뭐야. 아무리 황녀라지만… 이런 무시무시한 괴물을 함부로 대할 수가 있다고? 게다가 이 노인 레온하르트 황가에서 일하고 있는 분위기잖아? 아무리 우주에 존재하는 제국이라지만 이런 신적인 존재를 아래에 둘 정도로 강력하단 말이야?’
농담이 아니다. 지금 이 노인이 나서면 알바트로스함이고 적군이 끌고 온 우주모함이고 다 박살난다.
별다른 근거는 없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마치 하룻강아지들 사이에 사자가 끼어 있는 것처럼 이 녀석의 격이 지나치게 높다.
“아, 소개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관대하라고 합니다.”
꾸벅 인사한다. 녀석의 힘을 정면으로 느끼고 있는 만큼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렀지만 주변 사람들이 다 아무렇지 않은 분위기에 잠시 긴장하던 보람과 동민도 얌전해진 상태였기에 나도 태연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허허, 너무 그렇게 예를 취할 필요는 없다오. 황가와 작은 연이 있는 방랑자일 뿐이니.”
“일단 다 앉지.”
천현일 소장의 말에 따라 모두가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청원이 설명을 시작했다.
“나는 엘로힘 소속이지만 레온하르트 제국 소속이기도 하오. 말하자면… 파견을 나온 상태라고 할 수 있겠군. 레온하르트 황가의 혈통에 담긴 힘을 되살리겠다는 사명(使命)을 맡은 상태니.”
“황가의 혈통에 담긴 힘?”
의아해하는 나를 보며 청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누구도 함부로 손댈 수 없는… 언터쳐블(Untouchable)의 힘을 후대로 넘길 수 있는 가능성을 찾는 게 바로 나의 일이지.”
그렇게 말하며 가볍게 손을 움직이자 머릿속으로 간단한 정보가 전달된다. 숨 쉬듯 가볍게 이루어진 술법. 그리고 그렇게 전해진 정보가 가리키는 방향성에 황당해한다.
“…신?”
“그렇소. 언터쳐블은 바로 그 신을 가리키는 명칭이지.”
후륵, 하고 언젠가 나 역시 마셨던 만령차를 마시며 그가 말했다.
“우리가 흔히 신이라 부르는 존재들은 오롯이 완성된 존재이기 때문에 자손을 만드는 게 불가능에 가깝고 설사 낳더라도 제대로 된 신이 아닌 어정쩡한 신족에 불과한 경우가 많소. 하지만… 아주아주 드물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요. 레온하르트 제국의 제1대 황제가 바로 그런 경우였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피는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만약 그 피가 제대로 이어지는 게 가능했다면 레온하르트 제국은 그냥 제국이 아니라 노블레스나 엘로힘에 맞먹는 세력이 되었을 것이다.
청원이 전해준 정보는 황제의 후손들은 단지 비범할 뿐 신적인 존재는 아니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리고 그의 목표가 마치 노블레스처럼 대대로 압도적인 신혈을 이어가는 것이라는 것 역시.
“그럼 세레스티아가 당신을 매파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가 혹시?”
“그렇소. 나는 레온하르트 제국의 황족들의 혼사 문제에 관여해 왔소. 나는 미래를 보는 능력이 있고 신혈을 깨우는 방향으로 이끌기 원했으니까. 다만 그러면서도 황족들이 크게 반발하지 않는 방향을 잡다 보니 저런 별명을 가지게 되었구려.”
“자자, 설명은 거기까지 하고 이야기 좀 해줘. 이 녀석으로 움직일 수 있을 거 같아?”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 세레스티아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잠깐.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나로 움직인다니?”
의아해하는 나를 보며 세레스티아가 설명했다.
“매파 할아버지는 선인이야.”
“…그게 뭐?”
“그게 뭐냐고 묻는다면 물질계에서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다는 뜻이라고 답해주지. 매파 할아버지는 레온하르트 제국의 혈통에 관련된 일만 관여할 수 있어. 그것이 사명이니까.”
“아니, 그럼 우리가 지금 공격당하고 있다는 걸 밖에 알리는 것도 못 해준단 말이야?”
기가 막혀서 돌아보자 청원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 역시 물질계에 영향을 끼치는 일이니 당연한 일이오. 거기에 걸맞은 사명을 가진 선인들이라면 몰라도 적어도 나는 거기에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소.”
“헐.”
외부의 존재가 함선 내부에 들어온 걸 보고 상황이 다 해결되었다고 생각했던 내가 기막혀 헛웃음 짓자 여태 조용히 있던 보람이 묻는다.
“아니, 그럼……. 대체 여긴 왜 온 거예요? 도와주지도 않을 거고, 소식을 밖으로 전해주지조차 않을 거면?”
“황녀님에 의해 [인식]되었기 때문이지요. 신혈을 강화할 만한 반려를 발견하면 무조건 저에게 전달되니까요.”
“…아니, 아니, 잠깐만요. 설마?”
당황해 세레스티아를 바라보자 세레스티아가 언제나 그랬듯 화사하고 아름다운 미소를 피워 올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네가 내 부군이 될 수 있다는 뜻이야.”
“으엑…….”
절로 인상이 찡그려진다.
무, 물론 일단 살아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안다. 지금 알바트로스함은 위기 상황이고 자칫 잘못하면 모든 사람이 다 죽을 수 있다.
지금 이 상황을 밖에 알려야 한다.
모든 사람이 연합에 소식만 전하면 된다고 확신하는 걸 보면, 아마 소식을 전하는 것만으로도 상황은 크게 나아질 것이다.
게다가 부군이 될 수도 있다는 거지 강제로 시키지는 않지 않을까? 너무 안이한 상상인가?
한참 고민하고 있는데 나를 바라보고 있는 세레스티아의 모습이 보인다.
그녀의 표정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있다.
“뭐야, 너 왜 그래?”
“너, 지금 진심으로 싫어했어.”
“…뭐? 그럼 진심으로 싫어하지 가식으로 싫어해? 별로 친하지도 않은 여자랑 갑자기 결혼해야 할지도 모른다는데.”
당연한 말이었는데 세레스티아에게는 당연하지 않았던 듯 그녀의 바다 같은 눈동자가 크게 흔들린다.
‘이 녀석은 또 왜 이래?’
당황하는데 갑자기 그녀의 눈동자에 황금색 사자 문양이 떠올랐다.
“다시 묻겠어. 이 결혼이 맘에 안 들어?”
“응.”
“나한테 관심 없어?”
“그래. 아니, 그걸 뭘 구태여 지금 와서 다시 물어? 여태 말하고 표현했었잖아?”
당연한 답변에 세레스티아가 버벅인다. 언제나 자신감 넘치고 당당한 그녀의 모습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모습이다.
“그, 나, 나한테 관심 끌려고 쿨한 척한 거 아냐?”
“…그게 무슨 정신 나간 소리야?”
어이가 없어 반문하자 그녀의 눈동자에 떠올랐던 황금색 사자 문양이 팡, 하고 사라진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화악-!
거의 폭발한다고 해도 좋을 기세로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의 얼굴이 당혹감과 부끄러움으로 뒤죽박죽 범벅이가 되어버린다.
내가 처음으로 본,
그녀의 진짜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