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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1 납치
“저기… 합의해 줄 생각이 있어?”
슬며시 묻는 혜란. 그리고 순간 나는 그녀의 표정과 태도에 새로운 의문을 떠올렸다.
애초에 그 검은삵인가 뭔가 하는 녀석의 소식을 왜 이 녀석이 직접 와서 전하고 있는가? 그리고 평소 그 제멋대로였던 태도가 왜 이렇게 조심스러워졌지?
애매하다면 애매한 의문이었지만 나 역시 눈치라면 어디 가서도 빠지지 않는 만큼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했다.
“오호라…….”
그러고 보니 혜란과 검은삵의 조종사로 짐작되는 ‘나래’라는 녀석은 알바트로스함에서도 그리 많지 않은 한국식 이름을 가진 존재다. 알바트로스함에 다른 ‘지구’의 승무원이 많이 타고 있다고 했으니 한국과 비슷한 뿌리를 가진 국가를 가졌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
“왜, 왜 그런 표정으로 봐?”
“아니, 별건 아니고. 합의하면 뭘 해주는 건데?”
“아, 당연히 합의금으로 보상할 생각이야. 대충… 이 정도.”
그렇게 말하며 손목에 차고 있는 통신기를 조작한다. 허공에 홀로그램이 떠오르고, 거기로 숫자가 표시되었다.
‘크군.’
절대 작지 않은 금액이다. 지구 관점에서 보면 어지간한 복권 당첨 금액에 맞먹는. 일반인이라면 죽을 때까지 노력해도 모을 수 없는 금액.
그러나 그녀에게는 안타깝게도, 요새 내 금전 감각은 미쳐 돌아가는 중이다.
“애걔. 이거 어따 써. 그냥 교도소 가라고 그래.”
“뭐, 뭐?”
“그리고 내 신변은 기밀인데 이런 문제를 여기로 가져오다니. 기밀 서약 같은 건 신경도 안 쓰냐? 뭔 군인이 이래.”
쯔쯔 하고 혀를 차자 혜란이 발끈한다.
“네 신변은 어디에도 안 흘렸어! 다만 네 신변을 찾을 길이 없어서 나래가 꼼짝없이 처벌을 받을 위기니 어쩔 수 없잖아!”
“아니,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왜, 녀석이 억울하대?”
“그, 그런 건 아니지만…….”
머뭇머뭇 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어깨를 으쓱인다.
조금 더 놀리면 궁지에 몰수 있을 것 같았지만 내가 변태도 아니고 작은 소녀의 모습을(실제 나이는 어떻든 간에) 하고 있는 그녀가 당황하는 모습을 즐기지는 않는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내 인적 사항을 드러내지 않고 합의하는 것도 가능해? 설마 법원에 출두해 달라. 뭐 이런 건 아니지?”
“그런 건데…….”
“그럼 꺼져.”
안타까운 일이지만 내 인적 사항을 광고하고 다닐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난 이미 돈도 벌 만큼 벌었고 결국에는 지구로 돌아갈 생각이니까.
기가스에 타면 강력한 조종 실력을 자랑할 수 있다고 해봐야 초월자 만나면 아무것도 못하고 사망하는 건 똑같다.
몇 번 정도 초월자를 목격하면서 느낀 것이, 이것들은 도저히 감당 불가능한 괴물이라는 것이다.
‘사실 여기까지 알려진 것도 불안하지만…….’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서 나서지 않았다면 알바트로스함과 함께 같이 죽는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그리고 그렇게 내 능력과 정체가 알려진 이상, 싸우기 싫다고 몸을 사려서 미움을 사느니 차라리 적극적으로 움직여 공을 세우는 게 낫다.
사실 천현일 소장이 신사적인 성향이어서 다 죽을지도 모르는 비상 상황에서도 배려가 이어지는 것이지 함선 안에서 왕이나 다름없는 함장이 제멋대로의 인물이었으면 상황이 꽤 고달파졌을 것이다.
“으으, 그러지 말고 다시 한 번 생각해 봐라, 응? 나래는 파이넬 아카데미에서도 차석을 차지했을 정도의 인재란 말이야. 그런 조종사가 전쟁에서 빠지면 큰 손해라고.”
나름 간절한 목소리였으나 나는 코웃음을 쳤다.
“인재는 무슨 인재. 조종 실력은 그저 그렇고 판단력은 내 목숨을 위협하던데.”
“웃… 다른 녀석이 그랬으면 웃기는 소리라고 했을 텐데.”
그러나 지금 나, 정확히 말하면 알바트로스함을 위기에서 구한 전쟁 영웅 [유령]은 승무원들 사이에서 슈퍼맨이나 배트맨에 맞먹는 스타로 부각된 상태였다.
지구와 전쟁 정보에 대한 취급이 다른 건지 전투 화면들이 수집&편집되어 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걸 열람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방송 비슷하게 함선 곳곳에 있는 디스플레이어로 재생도 되더라.
‘뜬금없이 전쟁 영웅이 되어버릴 줄이야.’
가볍게 한숨 쉬며 안절부절못하는 혜란을 바라본다. 이렇게 보니 조금 불쌍하기도 하다.
“흠. 대체 뭔 관계기에 이러는 거야? 아는 사이?”
“…동생이야.”
“어이구야.”
왜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나 했더니 상상 이상으로 가까운 사이였다.
“그럼 이름이 권나래? 아, 그러고 보니 여자인가?”
“당연히 여자지! 얼굴은 못 봤겠지만 목소리는 들었을 거 아냐!”
“아아, 그때 녀석은 남자 여자 문제가 아니었던지라.”
인간이냐 트롤이냐의 문제였지, 하고 중얼거리며 잠시 고민한다.
“흐음. 하지만 법원에 출두하는 건 싫은데. 그냥 용서하는 쪽으로는 안 돼?”
“그, 글쎄. 과정이 복잡하지는 않지만 민사도 아니고 전투 관련이라서 적어도 법원에 출두해서 자신의 입장을 상부에 밝히는 과정 정도는 필요할 텐데. 합의서도 제출해야 할 테고.”
“…싫은데.”
“으으, 제발 부탁해.”
이제는 눈물까지 글썽이는 그녀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린다. 평소 그 막가는 성격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징계가 얼마나 세게 들어갔기에 그래? 결과적으로 피해도 없었고 잘 풀렸는데도 큰 벌을 받는 거야?”
“아냐. 사실 징계 자체는 굉장히 사소해. 네 말대로 피해도 없었고 나래가 악의를 가졌다기보다는 순간적인 판단을 잘못한 거니까.”
“그런데 뭐가 문제야?”
“그야 나래는 가주 승계권을 가진 후계자 중 하나니까… 이런 식으로 빨간 줄이 그어지면 다른 후보들한테 너무 불리해진단 말이야.”
“복잡하구만. 뭐, 어쨌든 그러면… 알았어. 일단 함장한테 말해볼게. 정상 절차는 아니겠지만 함장이라면…….”
“뭐, 뭐?! 그건 안 돼! 이게 뭐라고 함장님께 말씀드려? 미쳤어?!”
펄쩍 뛰는 그녀의 모습에 당황한다.
“왜? 하지만 그게 빠를 거 아냐?”
“빠르기야 당연히 빠르지만 함장님이 나래 이름을 완전 안 좋은 쪽으로 기억하시게 될 거 아냐! 알바트로스함의 최고 지휘자이신 천현일 소장님께 그런 식으로 이미지가 박히느니 차라리 빨간 줄이 나아!”
얼굴이 새하얗게 변해서 고개를 흔드는 그녀의 모습에 휘파람을 분다.
이거 내가 생각한 것 보다 그 곰탱이 위치가 대단했구나. 별로 군기가 안 보이는 우주 시대라고 해도 지위 차이가 이 정도 심하게 나면 별로 다를 것도 없는 모양이다.
“거참, 귀찮게 하기는.”
“으으, 부탁해……. 그, 합의금을 올려줄까? 요, 요번에 부품을 좀 많이 사서 여유가 그리 많지는 않지만.”
녀석의 말에 잠시 고민한다. 하긴 생각해 보면 그리 무리한 부탁은 아니다.
“좋아. 대신 그거 좀 줘.”
“그거?”
“그거.”
내가 가리킨 것은 혜란이 종종 쓰곤 하는 두꺼운 테의 안경이다. 두껍다고는 하나 제법 유려한 디자인으로 만들어져 있어 남자가 써도 여자가 써도 잘 어울릴 것 같은, 명품으로 보이는 물건이다.
“…뭐? 하하? 왜, 왜 안경을 달라고 그래. 너 변태야?”
“응응. 변태 할 테니까 그 안경 내놔. 그럼 합의서 써줄게.”
“자, 잠깐만. 왜 굳이 쓰고 있는 걸 달라고 그래. 내가 새거 하나 줄 테니까…….”
더듬거리며 몸을 돌리는 혜란이었지만 나는 그녀가 수작을 부리기 전에 어깨를 붙잡았다.
“내놔.”
“…….”
당연한 말이지만 그건 그냥 안경이 아니다. 나름 위장을 잘 했지만 그래 봐야 사물의 칭호를 보는 나에게는 무용지물이다.
[권혜란 제작]
[마도병기 우자트]
이미 몇 번이고 확인해 성능이나 효과 등등 대략적으로 다 파악한 상태다. 다만 알고만 있지 얻을 수 있다고는 생각 못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다니 참 고마운 일이다.
“왜. 아무래도 안 돼?”
“아, 그게, 사실 이거 금지물품이거든? 파괴병기이기도 해서 개인이 소장하면 안 되는 병기야.”
“하지만 넌 평소에도 툭하면 쓰고 다니잖아.”
“그거야… 몰래……. 아니, 그보다 어떻게 알아본 거야? 잔향 처리도 완벽하게 했는데! 연대장님들도 눈치 못 챌 정도였는데!”
절규하는 그녀에게 성큼 다가가 안경을 살짝 빼버린다. 그녀는 움찔했지만, 그렇다고 못 가져가게 막지는 않았다.
“가져간다.”
“으… 대, 대신 그걸로 사고치고 내가 만들었다고 하지 마! 절대 함구하는 거야! 기가스 부품들로 만든 거라 걸리면 위험해.”
“명심하지.”
“으으, 명심하는 거 같지 않아. 귓등으로도 안 듣는 거 같아. 하지만 나래가… 으으.”
불안해하는, 그러나 그러면서도 결국 잡지 못하는 혜란을 버려두고 승강기에 올라타 작업실로 이동한다. 오늘도 전투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멀리 가지는 못하고 잠시 아레스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열려라 참깨.”
언제나 그랬듯 간단하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사실 이건 내 [명령]의 힘이기 때문에 참깨 따위는 필요 없지만 그냥 말버릇처럼 붙이게 되었다.
[왔군. 오늘도 나폴레옹 녀석 어빌리티가 영 별로였나?]
“아냐, 오늘은 나쁘지 않아. 다만 당장 전투가 없어서 놀러 왔지.”
아레스의 기본 초월기 [전신의 보물창고]에는 온갖 무구가 들어차 있다. 신병이기(神兵利器)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는, 무인들이 본다면 눈이 뒤집힐 만한 명품이 가득한 것.
그러나 식칼 하나 제대로 다룰 줄 모르는 나는 별 감동 없이 그중 한 갑옷에 걸터앉았다.
처음에는 기겁하던 아레스도 이제는 포기한 듯 무심히 말을 이었다.
[다음 전투에는 나가지 마라.]
“그래, 다음 전투에는… 뭐라고?”
뜻밖의 말에 의문을 표하자 아레스가 자못 진지하게 말한다.
[느낌이 좋지 않다. 그리고 나처럼 영성(靈性)이 발달한 존재의 느낌은 어지간하면 틀리지 않지. 전쟁 중에 이런 느낌이 드는 걸 보면 적들이 뭔가를 준비하고 있는 모양이야.]
아닌 게 아니라 슬슬 비인 녀석들이 반격을 할 타이밍이긴 하다.
우리보다 더 많은 세력을 가지고 있는 주제에 너무 당하기만 했으니 화가 잔뜩 나 있겠지. 우리가 번개 구름 속에서 잘 숨어 다닌다 해도 어떻게든 찾으려 할 것이다.
“흠. 뭔가 정확히 알 수는 없어?”
[쯧. 내가 그렇게까지 알 수 있으면 그건 그냥 예감이 아니라 초월기지. 예지능력은 희귀하고 높은 레벨의 능력이야. 명중률이 낮은 반푼이 예지라면 모르겠지만.]
차분한 아레스의 설명에 눈살을 찌푸린다. 지금까지 많이 싸워도 이런 경고는 한 번도 없던 녀석인지라 나 역시 불안감이 들었다.
“뭐, 계속 싸워왔으니 한 번쯤 안 나가는 거야 문제도 아니지만……. 그래 봤자 한두 번이야. 계속 안 나가기에는 우리 편이 너무 열세니까.”
우리 편이 완전히 엉망이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크게 유능하지도 않다는 게 문제.
우리 수급 기가스가 적 수급 기가스랑 만나면 비등비등하고 우리 기급 기가스가 적 기급 기가스하고 만나면 비등비등한데 숫자가 압도적으로 밀리니 위태로운 것이다.
“에휴. 하다못해 네가 좀 멀쩡한 상태면 좋을 텐데.”
[푸하하. 그러면 상황이 확 다르지. 같은 초월병기라 해도 기가스와 전함의 전투력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으니까.]
테라급 이상의 전함은 대부분 초월병기로 만든다. 왜냐하면 한 대 제작하는 데 천문학적인 재화가 들어가는 테라급 전함을 ‘순수한 과학력’으로만 만들면, 초월자나 초월병기를 가진 적에게 너무나 맥없이 당해 테라급 전함을 만드는 데 들어간 그 엄청난 재화를 홀랑 날려 버리는 사태가 벌어지기 때문이다.
과거 마법이나 영능에 기대지 않고 만들어졌던 수많은 ‘순수 과학력’ 전함들이 폐함되거나 개조되어 평화로운 지대에서만 이용되는 것이 바로 그와 같은 이유.
애초에 거대 전함들이 초월병기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바로 아이언 하트와 초월병기들의 등장 때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예전처럼 손쉽게 해치울 수 없을 뿐 여전히 기가스가 더 강하단 말이지.’
같은 등급의 기가스와 함선을 비교하자면 아무래도 전함보다는 기가스 쪽이 더 강력하다.
전함은 엄청난 인력과 물품을 품고 초장거리 이동을 하는 것도, 수많은 승무원을 거주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여러 가지 작업이나 광범위 포격에 특화되어 있고 종류에 따라서는 점령지 안정이나 테라포밍을 시도할 수도 있는 것.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온갖 기능이 다 달린 전함보다야 전투 하나에만 특화시킨 기가스가 더 강력한 게 당연하다.
“아, 그러고 보니 아레스.”
그런데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고개를 든다.
문득 변한 분위기를 느낀 것일까? 아레스가 나를 바라보았다.
[왜?]
“아, 별건 아니고. 명령한다.”
기잉--!
말에 힘을 담자 묘한 파동이 퍼져 나간다. 몇 번의 경험으로 제법 익숙해진 상태. 나는 아레스의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지금 내 앞에 완전한 상태로 현현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