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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0 세퍼드 대전(大戰)
세퍼드는 레온하르트 제국과 테케아 연방 사이에 위치한 항성계(恒星系)이다. 두 나라 중 어디의 영역도 아닌 미개발지대.
지구인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의 항성계가 통째로 비어 있다는 건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겠지만 사실 우주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은하, 또 대부분의 항성계가 흔히 이런 식이다.
오히려 지성체들이 영역을 선포하고 살아가는 항성계가 전 우주의 1%도 되지 않을 정도인 것이다.
우주는 너무나 넓다.
만약 초월자급 마법사들이 만들어낸 스타 게이트나 4문명의 끝에 도달한 캔딜러 성인들의 아스트랄 드라이브가 없었다면 대우주 시대는 열리지도 못했을 거라는 것이 학자들의 중론일 정도.
이 넓은 우주에는 수천억 개의 은하가 존재하는데 그중 하나의 은하에서 하나의 은하로 가는데 광속으로 비행한다 해도 최소 10만 년, 심하면 100만 년, 1,000만 년이 걸려 버리니 어찌 우주 전체를 지배하고 운영할 수 있겠는가?
때문에 우주의 대부분의 은하, 대부분의 항성에는 별다른 문명도 지성체도 없다.
[연합법]은 일정 시간(규모에 따라 10년~1만 년) 지속적인 관리와 일정량 이상의 거주민을 유지하지 못하는 행성이나 항성을 해당 세력의 영지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새로운 항성을 발견해 깃발을 꽂아봐야 지속적으로 관리를 하지 못한다면 영지로 인정받지 못해 일어나는 현상이다.
만약 그런 연합법이 없었다면 대부분의 세력이 관리도 못할 우주의 영역을 탐사선으로 확인 한 뒤 자신의 영역으로 만들어 쓸데없이 덩치만 키웠을 것이다.
“녀석들의 위치는 파악됐나?”
“엘라-3행성에 널린 전기구름에 숨어들어 정확히 파악할 수 없습니다. 다만 방어선을 뚫고 가는 와중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으니 최소한의 전투만 하려 해도 두 달 이상의 정비 기간이 필요할 겁니다.”
“빠져나가려고 한다면?”
“이미 엘라-3행성의 전체를 감지하에 두었으니 대기권에서 벗어나는 그 순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비인들의 중심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공룡족의 강대한 대주술사 모르네는 부관의 보고에 인상을 찡그렸다.
모든 준비를 마쳐 실패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했거늘 정말 뼈아픈 실패다.
이번 실패로 신경 써야 할 사항들을 생각해 보니 천현일 소장과의 충돌로 인한 내상이 다시 도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군. 도대체 어떻게 리전의 주박을 푼 거지?’
설마 거기서 알바트로스함이 원상복구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이미 그들이 포획한 리전의 능력은 수없이 많은 실험과 실전을 통해 완벽히 잘 사용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시스템이 정상화된 것이다.
그야말로 함락 직전이었던 만큼, 그리고 비인들이 입은 피해도 절대 가볍다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만큼 미련이 남았지만 그는 당장 빠져나왔었다.
망설이다가 망할 관제인격이 자폭코드라도 발동시키면 문자 그대로 개죽음이었기 때문이다.
“그 기계년은 어떤 상태지?”
“모든 신호가 평소대로고 변화 역시 없는 상태입니다. 어쩌면 이 상황은… 저 기계년의 문제가 아니라 알바트로스함의 대처 때문일 수도 있지요.”
“드래고니안의 함선들조차 버티지 못했던 리전의 침입을 저까짓 놈들이 막는다고?”
“물론 가정일 뿐이니 확률은 높지 않습니다.”
“큭큭. 쉬울 거라 생각했던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이야.”
모르네는 뼛 소리가 나도록 주먹을 쥐며 화면을 바라보았다.
화면에는 세퍼드 항성계의 7번째 행성, 엘라-3행성이 비춰지고 있다.
“하필 저기로… 아니, 하필이 아니라 노리고 간 걸 수도 있겠군. 세퍼드 항성계에 대해서는 레온하르트 제국도 조사하고 있었을 테니.”
반지름 5만 킬로미터에 달하는 엘라-3행성은 세퍼드 항성계에서 가장 무거운 행성으로 대기층에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번개구름이 깔려 있어 그 어떤 감지 장치로도 그 안의 상황을 완벽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심지어 대기 중에는 항상 초속 수백 미터의 폭풍이 불고 있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강력한 실드를 가지고 있지 못한 소형 전투기나 정찰기들은 감히 대기권 안으로 들어갈 엄두조차 못 내는 곳이다.
“어쩌면 녀석들이 채광을 시도할 수도 있겠군요.”
“함선의 파손이 심각하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본래 세퍼드 항성계는 레온하르트 제국령도 아니고 테케아 연방령도 아닌 미개발 항성계였다.
두 세력의 사이 즈음에 위치한다고는 하나 그 위치가 어정쩡한데다 주변에 스타 게이트가 없어 발전 가능성이 없던 지역.
그러나 세퍼드 항성계의 엘라-1, 엘라-3 행성의 지질 정보가 알려지며 상황은 급변했다.
두 행성이 어마어마한 게럴트 매장량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대우주의 공용 화폐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게럴트는 [합당한 사념만 있다면 어떤 현상이라도 일으킬 수 있는] 희귀 금속이다.
물론 가공이 매우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일단 가공하는 게 가능하다면 온갖 방식으로 활용이 가능하며, 무엇보다 초월병기나 거대 함선을 초월 병기로 탈바꿈할 수 있는 핵심 부품을 제조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물질이었다.
때문에 미개발이었던 세퍼드 항성계는 가장 가까운 두 거대 세력, 레온하르트 제국과 테케아 연방의 분쟁지역이 되었다.
서로가 세퍼드 항성계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비록 그 어떤 스타게이트도 없는 외진 항성계라고는 하나 게럴트가 다량 묻혀 있다면 상황이 전혀 달라진다.
스타게이트를 새로 설치하는 한이 있더라도 차지해야 할 지역이 된 것이다.
“제길, 길어지겠군. 일단 채굴 포인트를 전부 파악해서 감시하에 집어넣어. 함선에서 나온 녀석들이 발견되면 모조리 파괴하고.”
“네, 함장님.”
꾸벅 예를 표한 부관이 함장실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혼자 남은 모르네는 화면을 쏘아보며 중얼거렸다.
“연합에 정보가 흘러가선 안 돼. 확실하고 철저하게, 그리고 누구도 모르게 손에 넣어야 한다. 하지만 도저히 손에 넣을 수 없다면…….”
모르네의 녹색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난다.
“행성을 통째로 날리는 한이 있더라도 파괴해 버리겠다.”
*
“끄응…….”
“왜 그래요, 선배. 어디 아파요?”
“아니, 별로 아프지는 않은데… 몸에서 열이 나네.”
천현일 소장과의 협의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던 난 점점 뜨거워지는 몸 상태에 당황했다.
두통이 느껴진다거나 오한이 온다거나 하는 건 아닌데 마치 사우나에 들어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이 후끈거린다.
“열이 나다니, 의무실이라도 가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지금 팔이 날아가고 온몸의 뼈가 박살나고 머리가 날아간 환자들이 즐비한 의무실에 몸에 열 좀 난다며 찾아가라고?”
온몸의 뼈가 박살이 나서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는 중상을 입고서도 침대도 달라고 못했던 게 얼마나 오래 전이라고 이런 말을 하는지.
내심 헛웃음을 짓다가 슬쩍 고개를 돌린다.
“그러고 보니 동민이 녀석 좀 들고 와줄래? 의무실에서 애매하게 얼어 있느니 차라리 숙소에 있는 게 나을 테니.”
“으으, 뭔가 심부름하는 기분이지만 불쌍한 동민 선배를 버리기도 그렇죠. 금방 갔다 올 테니 들어가 쉬고 있어요. 지금 어수선하니까 괜히 돌아다니지 말고.”
알바트로스함의 치안이야 당연히 최상이지만 지금처럼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는 장담할 수 없다.
피해자가 워낙 많아 승무원들이 분노에 휩싸인 상태고 절망이 모두를 지배하고 있으니 괜히 나대다가 죽으면 나만 손해인 것이다.
[관대하 정비관님… 신원 확인되었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때문에 보람의 말대로 굳이 나돌아다니지 않고 숙소 안으로 들어간다.
거주구역에서도 일부는 공격에 휩쓸리는 바람에 숙소가 없어졌다는데 다행히 우리가 머물던 곳은 멀쩡한 상태다.
두근.
그러나 그러다 멈칫한다.
다시 한 번 몸에서 열기가 몰아친다. 뜨거운, 그러나 고통을 동반하지 않는 열기가 몸에 나른하게 퍼지고 있다.
“이게 뭐야. 감기는 당연히 아닌 것 같은데.”
아닌 게 아니라 실제로도 체온이 올라가고 있는 느낌이다.
그냥 38도 40도 이 수준이 아니다.
세면대에서 물을 받아 몸에 살짝 발라보니 수증기가 일어날 정도다.
“뭐야, 이거 왜 이래. 심각한 거 아냐?”
순간 위기감이 들었지만 어디까지나 이성적인 위기감이었을 뿐 감각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아니, 문제가 없는 것을 넘어 뭔가 알 수 없는 힘이 온몸을 휘도는 것 같은 기분 좋은 고양감이 전신을 지배하고 있다.
두근, 두근.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감각이 폭주한다.
인체도를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내 몸 내부가 느껴지는가 싶더니 잠시 후에는 삽시간에 인지가 육체를 초월해 방을 벗어나 주변을 오가는 사람들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이게… 이게 뭐야……?”
생소한 감각이다.
전혀 알 수 없는,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감각.
나는 혼란에 빠져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 배경이 점점 변해간다.
금속으로 만들어진 벽이, 주변 가구들이, 건물 밖에서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하나둘 빛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아냐.’
순간 깨닫는다.
세상이, 다른 배경이 변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보는 내 [시점]이 바뀐 것이다.
“…문자?”
그리고 이내 나는 그 빛이 그냥 단순한 빛이 아니라 문자의 나열이라는 것을 알았다.
사람도, 물건도, 세상 모든 것이 문자로 이루어져 있다.
내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심지어 [기억]에서도 본 적이 없어 읽을 수 없는 문자.
‘아냐, 아냐. 이건 문자가 아니다.’
그렇다. 그것은 문자가 아니다. 다만 내가 문자의 형태로 이해했을 뿐이다.
그것은 말이었고, 세상을 이루는 모든 것이었으며, 신의 계시를 인간에게 전하는 최후의 수단이다.
투확!
순식간에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온다.
나는 본능적으로 방금 보았던 것들을 다시 보려 노력했지만, 그 고귀한 문장은 더 이상 내 눈에 보이지 않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내가 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의 다섯 감각. 오감을 벗어난 새로운 감각이 추가된 것이다.
나는 천현일 소장이 주었던 차를 떠올렸다.
‘마시면서 이야기하게. 귀한 영초로 달인 만령차(萬靈茶)야.’
당연한 말이지만 초월자인 천현일 소장이 [귀하다]고 평가하는 차가 흔한 물건일 리 없다.
그리고 이능을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그들이 마시는 차가 영약이어도 이상할 일은 전혀 없을 것이다.
“헐, 설마… 이렇게 허무하게 마나를 깨우친다고? 차 한 잔 마셔서? 아니, 보람이 녀석 것 까지 내가 마셨으니 두 잔인가?”
물론 마나라는 걸 느껴본 적은 전혀 없었지만 온 피부로 느껴지는 묘한 감각과 잠시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보이는 세계의 흐름은 아무리 생각해도 마나가 틀림없다.
만약 내가 그냥 평범하게 살았다면 이렇게까지 확신할 수 없었겠지만, 나는 알바트로스함에서 MMORPG류 게임이나 AOS게임을 몇 십 번이나 플레이하면서 이 감각을 가상으로 체험해 왔으니 아마 틀림없는 판단이겠지.
‘원래 이렇게 쉬운 게 정상인가? 단지 내가 알아보지 않았던 거야?’
마나가 없어서 불편하다는 생각은 종종 했지만 별로 그걸 새삼스레 배워볼까 하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무공이든 마법이든 어쨌든 그런 초능 계열의 힘을 그리 쉽게 배울 수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굳이 나에게 그런 걸 가르쳐 준다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기도 한데 막상 이렇게 허무하게 얻어버리니 너무 황당하다.
“게다가 아까 그건 뭐지? 왜 순간 온 세상이 글자로 보인거야?”
그것은 전혀 본 적 없는 광경이었지만, 동시에 매우 익숙한 느낌이기도 했다.
마치 내가 사람들 머리 위에서 보는 칭호와 비슷한…….
삑삑!
갑자기 왼쪽 팔목에 찬 통신기에서 알람음이 울린다.
몸을 후끈하게 달구던 기운은 어느새 가라앉아 있었기에 좀 진정한 후 통신기의 내용을 확인했다.
통신기에는 이런 텍스트가 떠올라 있었다.
[500만 게럴트가 입금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