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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머리 위에-30화 (30/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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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8 각성(覺醒)

“리… 전(Legion)! 저 쓰레기들이 드디어 미쳤구나!”

모든 이가 내가 알지 못하는 단어를 외치며 분노하고 있었지만 나는 거기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아까 울부짖던 소녀의 모습이 마치 화인처럼 뇌리에 새겨진 느낌이다.

‘뭐지? 왜 이렇게 익숙하지?’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단지 개목걸이에 쇠사슬이 칭칭 묶여 있어서 못 알아보는 게 아니라 전혀 모르는 얼굴. 심지어 [기억]을 뒤져봐도 저런 꼬마 애를 본 적은 없었다.

-…리전이 뭐지?

-뭐야, 리전을 몰라? 뭐 하고 살았기에 일반 상식이 없어?

기막혀하며 아레스가 설명했다.

-리전은 순수하게 기계로만 이뤄진 단체다. 이제는 헤아리기도 애매할 정도로 먼 과거의 인공지능에서 탄생한 녀석들은 일반적인 인공지능과 다르게 [상상]이 가능한 존재지. 녀석들은 창의력은 물론이고 사고력까지 가지고 있어 스스로 생각해 문명을 발전시키는 게 가능해. 말이 좋아 기계지 종족으로서의 조건을 거의 다 가지고 있어서 기계족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는데……. 행보가 행보인지라 연합에게 공식적으로 인정받지는 못한 상태야.

놀랍게도 리전은 스스로 과학을 발전시키며 새로운 동포를 만들어내는 게 가능하고 그렇기에 자원만 있다면 무한히 증식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증식한 리전은 단지 프로그램으로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기가스, 심지어 전함의 형태까지 취할 수 있기 때문에 우주에서 그들을 상대하는 건 초월자들조차도 쉽지 않아 하는 일이라 한다.

-그럼 뭐야. 저 비인이라는 녀석들이 그 리전이라는 기계들하고 동맹을 맺었다는 거야?

-아니, 그럴 리는 없다.

-왜?

-리전은 생명체를 아주 싫어하거든. 비인은 인간이 아닐 뿐 생명체인 건 매한가지란 말이지.

콰광! 쾅!

주변은 난장판이다.

팽팽하던, 아니, 오히려 약간 유리하던 전황이 급변하여 알바트로스 군이 확연하게 밀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아레스는 그런 상황 따위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리전의 영혼은 불완전하지. 신의 가호를 받아 태어난 다른 영혼과 다르게 특수한 조건하에 자연 발생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야. 때문에 리전은 태생적으로 [완전한 영혼]에 대한 갈망을 가지며… 그렇기에 아무런 노력도 없이 태어날 때부터 완전한 영혼을 가지고 있는 생명체에게 본능적인 증오심을 품지. 뭐, 완전한 영혼을 획득해 이름을 가지게 된 높은 등급의 리전은 그런 본능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지지만 그 정도 산 녀석들은 이제 경험적으로 생명체를 싫어하고 말이야.

-아니, 그런데… 그래서 이 상황은 뭐야?

“젠장! 지니가 작동을 멈췄어!”

“내 관제인격인 탈린도 맛이 갔어!”

“수동 조종은 어때?”

“되긴 하는데 단순 기동도 아니고 수동 조종으로 어떻게 전투를……. 이런 제기랄!”

여기저기에서 비명이 터져 나온다.

기가스들은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샌드백처럼 적들에게 얻어맞고 있고, 올라온 자동병기와 타워들은 무방비로 부서지고 있는 상태.

그러나 아레스는 당연하다는 듯 말한다.

-여태 뭐 들었냐? 리전은 그 자체가 정보의 집합체이며 살아있는 기계생명체다. 컴퓨터 같은 기계문명 기반의 물건들은 물론이고 마법문명 기반의 방어벽조차도 일단 접촉만 하면 순식간에 크랙킹하는 게 가능해. 그리고 지금 이 경우에는…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인공지능을 날려 버렸군.

-그런…….

나는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지금까지도 병력 자체의 전력은 적들이 높았다.

비교적 쉽게 버틸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알바트로스함 전체를 제어하며 원하는 곳에 격벽을 내리거나 방어 장치를 가동하거나 하는 게 가능한 지니의 보조가 있었기 때문.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지니가 사라져 버린다면?

쾅!

두두두두--!!

“죽여라! 인간들을 죽여라!”

“닥쳐! 연합법을 무시하고 리전과 손을 잡은 쓰레기들이!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연합에서 가만히 있을 것 같나!!”

검술 완성자라는 중대장이 주변 공간이 일렁여 보일 정도로 선명한 기운으로 둘러싸인 검을 들고 포효한다.

그 말은 틀림없이 사실이었던 듯 일순간 적들이 술렁거렸지만, 새롭게 나타난 존재가 그녀의 말에 반박한다.

“크하하하하!! 겁쟁이들이 왈왈 짖어대니 시끄럽구나! 리전? 애초에 그 기계년은 도구일 뿐이니 상관없다! 연합이라면 껌뻑 죽어 질질 싸는 꼴이라니!”

새롭게 나타난 존재가 드리운 그림자가 땅에 길게 늘어진다. 너무나 거대한 덩치라서, 나는 순간 녀석이 기가스인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녀석은 틀림없이 생물이었다.

그것도 나에게조차 너무나 익숙한 외양을 가지고 있다.

-이게 뭐야……. 공룡이라니.

-오호. 설마 직접 넘어올 줄이야. 하긴, 어차피 인공지능을 죽여 버렸으니 자폭에 휘말릴 일은 없겠지.

-직접… 넘어올 줄이야?

순간 아레스의 뉘앙스가 의미하는 바를 깨닫고 기겁한다. 설마? 나는 공룡의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테케아 연방]

[대주술사 모르네]

-맙소사.

한 번 들어본 이름에 신음한다.

그러나 그런 내 반응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일단.”

티라노 사우르스에 가까운 외양을 가진 괴물이 입을 벌렸다.

“다 죽어라.”

[-----------!!!!]

전신의 눈이 또 풀렸다. 어느새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초월자.”

“그래. 공룡족의 대주술사 모르네다. 신창 알리에타로 벽을 뚫자마자 같이 넘어왔군. 처음부터 작정을 했어.”

“이런 미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다시 주저앉는다.

머리가 윙윙 울린다.

이건 전신의 눈을 타고 전해진 충격이 아니다.

황당하게도… 녀석의 포효가 [알바트로스 함 전체]에 영향을 주었다는 증거다.

‘죽어라, 라고 말했어.’

충격 때문인지 아니면 그 말이 뜻하는 말을 깨달아서인지 팔이 덜덜 떨린다.

그렇다. 녀석은 죽어라, 라고 말했다.

즉, 지금 방금 그 외침은, 녀석의 살의가 담긴 공격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때 녀석의 앞에는 보람과 동민이 있었다.

“전신의 눈을 다시 발동해 줘!”

[…거참. 내가 원래 이런 성격이 아닌데 왜 호구처럼 이러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며 녀석이 눈을 감자, 다시금 시야가 변한다.

“감히! 내 배에서!! 내 선원들을!”

“큭큭, 아깝군. 조금 늦게 왔으면 좋았을 텐데.

어느새 전장에는 새하얀 털의 북극곰이 도착해 거대한 공룡을 향해 으르렁거리고 있다. 나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우주… 정말 못 해먹겠군. 초월자가 일선에서 싸우는 전장이라니.”

“하하하. 우리 스승님한테 말해도 안 믿을 거예요.”

박살 난 타워 뒤쪽에 기대고 있는 보람과 동민이 보인다. 머리가 엉망으로 헝클어지고 입가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그래도 목숨에는 지장이 없어 보인다.

-다행이다.

-다행? 너무 섣부른 예측 같은데.

-뭐?

의아해하는 순간 구멍이 뚫린 벽 쪽에서 거주구역 쪽으로 한 무리의 적이 이동하는 모습이 보인다.

“모두 전열을 가다듬어라!”

“하지만 중대장님! 숙련자 이하의 모든 병력이 전사했습니다!”

“기가스도 전투를 수행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순순히 죽겠다는 거냐! 녀석들은 비인이다! 포로 따위는 받지 않아!”

전장에 절망이 흐르기 시작한다.

언제나 적들을 분쇄하던 강대한 초월자 천현일 소장이 그들 앞에 있었지만 그는 아군을 도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대주술사 모르네는 절대 그에 뒤처지는 존재가 아니다. 아니, 공식적인 랭킹에 의하면 틀림없이 그를 상회하는 존재. 그를 무시하고 전투에 끼어들었다가는 빈틈을 보여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전투에서 한쪽의 초월자가 죽게 된다면 그걸로 전투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함대전도 아니고 이런 백병전에서 비초월자가 초월자를 감당하기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캬캬캬! 아까의 기세는 어디 갔지?”

“쏴라! 다 갈아버려!”

두두두두!

피핑!

탄환과 빛줄기가 아군을 향해 쏟아진다. 아군 역시 최선을 다해 응사했지만, 애초에 병력 차이가 너무 심하다.

저 모르네라는 공룡 녀석의 공격 때문에 태반이 죽어버렸고 지니가 침묵하면서 방어 장치 전부가 먹통으로 변했다.

애초에 관제인격 자체가 공격당해 시스템이 죽어버리는 사태는 누구도 예상 못한 것이었기 때문에 수동으로 전환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함선 전체를 뒤덮는 EMP를 맞아도 멀쩡할 것이 알바트로스함 최심부에 존재하는 메인 시스템이었던 만큼 당연한 일이다.

‘도와야 해.’

이번에는 직접 전신의 눈에서 빠져나와 발걸음을 옮긴다. 아레스의 방을 나가기 위해서였는데,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아레스가 묻는다.

[어딜 가나?]

“친구들에게 가야겠어.”

당연한 말이었지만 아레스는 한심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웃기지도 않는군. 지금 네가 나가서 뭘 어쩌겠다는 건데?]

“그, 나는 기가스 조종사이기도 해. 아무 기가스나 타서…….”

[멍청한 소리. 지금 기가스들의 인공지능, 그러니까 관제인격이 다 날아갔다는 말 못 들었어? 아니, 그걸 떠나서 아군의 기가스까지는 어떻게 갈 생각인데? 아니, 설사 갔다 해도 너 하나 저기에 참여한다고 뭔가 바뀔 것 같나? 개죽음을 당할 뿐이다.]

녀석의 말대로 문제점이 수두룩하다.

나는 단 한 발의 총알로도 즉사할 정도로 약하며,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여기서 나가봐야, 아레스의 말대로 개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문득 심장이 크게 뛰는 걸 느낀다.

“또… 죽는 걸 방관하라고?”

[또?]

의아해하는 아레스를 무시한 채 이를 악문다.

친한 친구들은 아니었다. 동민과는 1년이나 같은 반이었지만 단지 그뿐이었고, 보람은 애초에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태다.

물론 알바트로스함에 같이 승선하고 생활하게 되면서 어느 정도 친해졌지만… 목숨을 바칠 정도로 깊은 친애의 정을 나눈 것은 아니다.

-아버지. 주인님. 저의 창조주시여.

가슴이 너무 아프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 그들은 다 죽고 말았다. 모두 죽어 그 어떠한 흔적조차 없었다.

“그냥 숨어서… 목숨만 보전하란 말이야?”

-사랑해요. 사랑해요 아버지.

“허억… 허억…….”

[음? 뭐야, 이 녀석. 죄책감과 두려움 때문에 패닉 상태에라도 빠진 건가.]

중얼거리는 아레스를 무시하고 주저앉아 거칠게 숨을 몰아쉰다.

머리가 깨질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내 고통 때문에 주저앉아 있을 때가 아니다.

“아레스, 너의 만병지왕이라면 주인이 없는 대부분의 병기를 제어할 수 있다고 했지. 그렇다면… 기가스 역시 [병기]에 들어가겠지?

당연한 말이다. 평소 전투보다 이런저런 잡일을 주로 하는 메탈바디조차 병기로 분류한다면 처음부터 전투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기가스가 병기로 분류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물론이지. 그래서?]

“전장 근처에 있는 기가스의 제어권을 획득해 줘. 조종은 내가 하겠어.”

[…거 참.]

그 거대한 눈으로 나를 잠시 바라보던 아레스가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이런 뻔뻔하고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하는데 자꾸 들어주고 싶다는 기분이 들다니 알 수 없는 일이군. 하지만 안타깝게도 안 된다.]

“어째서?”

[큭큭큭. 너 날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 아니냐? 아무리 내가 신급 기가스라지만 머리만으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어. 머리만으로 어빌리티를 쓰는 것만 해도 기적인데 다른 기가스를 마음대로 조종하라고?]

기가 차다는 아레스의 말에 이를 악문다.

그러기 싫다, 라고 말한다면 설득이라도 해보겠지만 할 수 없다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그때 기억이 떠올랐다.

-명만 내리소서. 한 줄의 명령만 있으면 저희는 무엇이든 할 수 있사옵니다.

-바보같이 이용만 당하지 말라고! 말 한마디면 우리가 다 해결할 수 있는데!

애원하는 사내가 보인다. 한없이 강하고 굳건해 보이는 사내.

화를 내는 여인이 보인다. 더없이 아름다우면서도 끝없는 힘을 품고 있는 여인.

그러나 내 뇌리를 장악한 것은 그들의 모습이 아니라 그들의 말이었다.

“한 줄의 명령.”

나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야, 너 괜찮은 거냐?]

퉁명스럽지만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묻는 아레스를 향해 나는 말했다.

“전장에서 가장 가까운 기가스를 제어해 줘.”

[뭐? 아니, 내가 못 한다고…….]

투덜거리는 아레스의 말을 끊고 들어간다.

“제대로 말하지.”

그렇게 말하며 아레스를 마주 본다.

내 키보다 조금 작을 뿐인 녀석의 거대한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고 있다.

나는 천천히, 힘을 실어 말했다.

“해라.”

[……!!]

순간 아레스의 표정에서 경악이 떠올랐다. 이어 의문이 떠오르고, 이어 공포가 떠올랐으며 마지막으로는 그 모든 것이 뒤죽박죽 섞인 표정이 되었다.

[이런… 이런? 이게… 어떻게……?]

구우우우우----

순간 주변이 환해졌다. 광원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아레스가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모습만이 보인다.

재미있는 표정이지만 시간이 없는 상황.

나는 최후통첩을 날렸다.

“즉시 시행해라, 아레스.”

[당신… 당신의…….]

빛이 더 강해진다. 아레스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내 뒤쪽에서 한 덩어리의 빛이 날아오더니, 아레스의 미간 사이로 스며 들어갔다.

우우우--!

아레스의 머리가 빛나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가 대답한다.

[당신의 명대로.]

그리고 그것으로… 나의 세계가 급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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