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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5 I'm not your father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외계인들에게 납치당했던 그날로 대전쟁을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러고 고작 하루.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금단증상이 찾아왔다.
“딱 한 판만 더 하는 건데. 하다못해 칼전이라도 했으면……. 으으, 공략 다 세워놓고 실행을 못하다니.”
차라리 완벽하게 클리어하고 [이 게임은 이제 끝!]이라는 느낌이었으면 깔끔했을 텐데 내가 보기에 아직 대전쟁에서 즐길 수 있는 콘텐츠가 무궁무진하다는 점이 문제였다.
“무엇보다 기급이랑 수급 기가스의 가능성을 반도 실험 못 했다는 게 아쉬워. 게다가 R-13로 징벌 안에 있던 성급 기체랑 1:1도 못 해봤잖아? 물론 그 경우에는 주변 환경을 이용할 수밖에 없겠지만…….”
머릿속이 폭주한다.
R-13의 상세한 전력과 그것을 기반으로 한 온갖 전략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적의 전함 징벌의 구조와 형태가, 적들이 주로 사용하는 전략과 파해법이 차례로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다시는 외계인들과 접촉할 생각이 없는 만큼 다 쓸데없는 공략들이었지만, 원래 게임 생각이란 건 이성으로 막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아차.”
그리고 그렇게 잡념 가득한 걸음걸음을 옮기고 있던 나는 스스로가 어느새 오락실 근처를 헤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꾸벅꾸벅 조는 김유신을 평소 그가 뻔질나게 들랑거리던 천관녀의 집에 이끈 그의 말처럼 내 다리가 자연스럽게 오락실로 향한 것이다.
“이 멍청한 놈아. 짤려야 정신 차릴래?”
내 다리에 대고 헛소리를 하며 몸을 돌린다.
물론 집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오락실 근처를 돌아다니는 것만으로 문제가 터질 정도라면 집에서도 안심할 수 없어야 할 테니 의미 없는 조심성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계속 오락실 근처를 돌아다니다 순간 정신이 나가서 대전쟁을 시작해 버리면 어찌한단 말인가?
불안할 때는 그냥 몸을 사리는 게 상책.
그러나 그렇게 몸을 돌리려단 발걸음을 멈춰 세우는 목소리가 있었다.
“어? 또 만났네요?”
“…….”
“우와. 완전 신기해요. 요 열흘간 지구를 4바퀴나 돌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자주 만나죠? 설마 절 찾아오신 건가요?”
자연적으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마치 사진에서나 볼 수 있는 새파란 바닷물을 한 올 한 올 건져 올려 만든 것 같은 머리칼을 가진 절세 미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응시하는 모습이 보인다.
“무슨 되도 않는 헛소리를… 그때도 지금도 여기는 우리 동네거든?”
“엑? 전에 그 동네라고요? 와 비마나 이 녀석 아무리 아무데나 내려달라고 했다지만 왔던 나라에 왔던 동네로 데려왔단 말이야?”
뭔가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그러더니 ‘에? 진짜 건물 구조가 눈에 익어요!’ 따위의 말을 지껄이고 있었다.
“…나는 간다.”
“아, 왜 또 도망가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식사나 같이하죠!”
“내가 왜?”
“와! 지금 절 까신 거예요? 우주 제일의 미소녀인 저를?”
“…너 진짜 외계인 맞냐? 그냥 인간 아니고?”
솔직히 타이틀 때문에 쉽게 넘어가는 거지 그녀는 누가 봐도 그냥 인간이다.
물론 저게 본모습이 아닐 수도 있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지나칠 정도의 [인간스러움]이다. 게다가 외계인이면 미적관점도 당연히 다를 텐데 스스로의 미모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 같은 태도라니?
‘아니, 그러고 보니 그 레온하르트 제국 녀석들도 인간 모습을 하고 있었지? 심지어 복장도 그 몸에 맞춰져 있었어.’
순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레스티아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건 당연하다.
관광차 지구에 내려와 인간들 사이에 녹아들어야 하는데 지구인과 다른 모습을 하고 있으면 여러 가지 문제가 터지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온하르트 제국군 녀석들이 굳이 인간의 모습을 취해야 하는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래 뭐, 백번 양보해서 인간인 나를 놀라지 않게 하기 위해 그랬다고 치자. 굳이 군복까지 거기에 맞출 이유가 있는가?
‘게다가 대전쟁에 나온 NPC들도 다 인간 형태였던 것 같아. 그러고 보면 기가스 사이즈도 이상해. 누가 봐도 인간이 타는 걸 감안하고 만든 디자인 아닌가? 거기에 이족보행 병기이기도 하고.’
그러고 보면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혼란에 빠지자, 마치 내 마음을 짐작이라도 한 듯 세레스티아가 웃는다.
“호호호! 외계인이면 왜 인간이 아닌데요?”
“뭐? 그게 무슨 헛소리야. 외계인이면 당연히 인간이 아니지.”
“지구인이 아닐 뿐이죠.”
“뭐?”
순간적으로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멍한 표정을 짓는다.
지금 뭐라고?
당황하는 나에게 그녀가 말했다.
“인간은 대우주에 가장 흔한 종이죠. 솔직히 숫자로만 치면 전 우주의 모든 지성체 중 70%는 인간, 혹은 인간과 매우 흡사한 종족이라고 알려졌을 정도니까요.”
즉 인간이라는 종이 지구에만 존재하는 종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아니, 단지 그게 아니라 우주 전체에 퍼져 있는 매우 흔하디흔한 종이라는 말.
나는 황당해서 물었다.
“그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아니 설마 이 지구에 인간이 부흥하게 만든 것도 외계인들인가?”
“너무 멀리 가지 마시죠? 이 34지구의 존재들은 정상적으로 진화해 지금의 인간이 되었으니까.”
“아니 그러니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다는 거야? 외부의 간섭 없이 정상적으로 진화 절차를 밟았는데 우연히 외계인들하고 같은 종이 된다고? 그게 생물학적으로 말이 된다고 생각해?”
“생물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신학적인 문제라면 가능하죠.”
“뭐? 그게 무슨…….”
“자꾸 이런 재미없는 이야기만 할 거에요?”
전 신학자도 과학자도 아니에요, 라고 중얼거리며 눈을 치켜뜨는 그녀의 모습에 멈칫한다.
물론 미색이 워낙 뛰어난 그녀였기에 화난 표정을 지어봐야 매력적일 뿐이었지만, 내가 너무 그녀를 다그쳤다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망할 호기심!’
어릴 때부터 항상 궁금해하던 세계의 진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기회라고 느낀 것일까? 나도 모르게 정신이 나갔던 모양이다.
연관되지 않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에 대해 궁금해 하는 내가 있었다.
“흠, 미안해. 지구에서는 얻을 수 없는 정보여서. 그러고 보니 알려주면 안 되거나 하는 지식이겠구나.”
“문명 수준에 영향을 끼칠 정보는 아니니까 그런 건 없어요. 다만 저를 앞에 두고 그런 질문이나 하는 건 불쾌하네요.”
“그럼 어떤 질문을 해야 하는데?”
“쓰리 싸이즈? 취미 생활? 좋아하는 요리나 관심 분야?”
“…….”
이 여자가 뭐라는 거야. 공주병인가?
그런데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선배님!”
“응?”
고개를 돌려 보니 어깨까지 늘어진 물결 모양의 파마머리를 토끼 모양의 핀으로 고정한 소녀가 종종거리며 뛰어온다.
“안녕하세요!”
“아, 음. 무슨 일이야?”
“네? 물론 인사하러… 와아!”
내 쪽으로 다가온 보람이 세레스티아를 보고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러더니 종종걸음으로 내게 바짝 다가와 귀에 대고 속삭인다.
“와, 완전 예쁜 언니네요. 누구죠?”
“…….”
뚱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얜 나랑 몇 번이나 봤다고 이렇게 친한 척이야? 내 퍼스널 스페이스(The Personal Space)에 함부로 들어오지 마라.
“그냥 지나가다 알게 된 사이.”
“그럼 지금 약속은 없으신 건가요?”
“음? 말하자면 그렇지.”
당연한 말이지만 저 외계인하고 뭘 같이 할 계획 따위는 없던 만큼 고개를 끄덕이자 보람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냉큼 말한다.
“저 그럼 지금 관일한 선생님을 뵈러 가도 될까요?”
“…지금?”
“네, 지금.”
약간은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보람의 모습에, 그제야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본 보람은, 뭐랄까, 기본적으로 예의가 바르고 소심해 보이는 미소녀였다. 약간이지만 문학소녀 느낌이 난다고 할까?
그런데 지금 그녀는 뭐랄까 적극적으로, 그래, 마치 대쉬를 하듯 행동하고 있다. 심지어 내 옆에는 절세 미소녀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세레스티아가 있는 상태가 아닌가?
물론 그녀와는 아무 일정도 없고 그 어떤 관계도 아니지만 그 사실을 보람은 전혀 모르는 상태일 텐데 이런 무례한 태도를 취하다니…….
과연 세레스티아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한다.
“어머, 누구 마음대로 제 친구를 데려가는 거죠?”
“앗! 죄송해요, 언니. 하지만 딱히 친구는 아니신 것 같은데.”
“흐음~”
나는 시선조차 피하지 않은 채 서로 빤히 바라보고 있는 두 소녀의 모습에 식은땀을 흘렸다.
두 미소녀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아니, 사실 그건 진실이 아니다.
외계인 소녀와 마법소녀가,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뭐, 뭐야. 설마 이 녀석들 적대관계거나 뭐 그런 건 아니겠지?’
마법소녀와 외계인은 판타지와 SF로 전혀 다른 장르의 존재들이지만 잘 생각해 보면 세레스티아가 나를 보면서 마법사라는 존재를 언급한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세레스티아는 마법사라는 존재를 알고 있고, 내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걸 인식한 그 수단으로 보람의 정체 정도는 벌써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죄송한데 조금 급한 일이 있어서요. 가봐도 되나요?”
“흐음~ 뭐, 상관은 없지만.”
그렇게 말했지만 기분이 좋지는 않은지 눈을 가늘게 뜨는 세레스티아.
그러나 보람은 아랑곳 하지 않고 꾸벅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사과를 표시하고 내 손을 잡아끌었다.
“어서 가요!”
“영문을 모르겠지만… 그러지.”
솔직히 외계인이고 마법소녀고 다 꺼지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나마 나은 걸 고르라면 아버지와 친분이 있는 그녀 쪽이었기에 순순히 그녀를 따라간다.
같은 외계인이라 해도 세레스티아와 레온하르트 제국군은 전혀 상관없는 관계로 느껴지기는 하지만, 일말의 불안감이 그쪽과 아주 거리를 두게 만들고 있었다.
“조, 조금만 더 빨리 걸어주시겠어요?”
나보다 키도 작고 보폭도 훨씬 작은 주제에 성큼성큼 나를 이끌며 보람이 말한다. 무슨 이유인지 그녀의 안색이 제법 창백하다.
“왜?”
“아, 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저기 저 예쁜 언니는 아주 위험해요!”
“정말 이상하게 들리는군.”
뚱한 얼굴로 대답해 준다.
외계인들만으로도 골치 아픈데 마법소녀까지 와서 설치니 대략 난감한 상태.
그러나 그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내 손을 잡은 채 우리 집으로 항하며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저기, 선배님은 어머님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
“어머니? 돌아가신 내 어머니?”
“…네.”
“아니, 여기서 내 어머니가 왜 나와? 네가 우리 어머니를 알기는 또 어떻게 알고?”
정말 뜬금없는 이야기다.
차라리 세레스티아처럼 나에게서 [뭔가]를 느꼈다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하겠지만 어머니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 라니.
내가 살짝 인상을 찡그리자, 으으 하고 신음을 내뱉은 보람이 굳은 얼굴로 내게 얼굴을 가까이했다.
“아, 음.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은 전부 비밀로 해주실 수 있나요?”
“…어려울 건 없지.”
무시하기에는 너무 간절해 보이는 시선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지만, 보람은 그러고도 한참이나 더 망설였다.
‘말해도 될까?’ ‘괜찮을까?’ ‘하지만 상황이…’라고 중얼거리는 걸 보니 그녀에게 뭔가 급박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이 벌어졌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이봐?”
“아, 네. 흠, 아마 제 말이 미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그러고도 잠시간 더 망설이다가, 마침내 보람이 말한다.
“선배의 모친이셨던 함은정 님께서는 대마녀의 재능을 타고 나셨던 분이세요.”
“…….”
정말 미친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