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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4 무너지는 일상
고백하건데, 사실 나는 게임 폐인이 맞다.
신체 건강하고 공부도 열심히 해서 전교 10%대의 성적을 유지하는, 나름대로 멀쩡한 학생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나이지만, 나와 오래 알아온 이들은 내가 진성 폐인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을 정도.
나는 새롭게 출시되는 대부분의 게임을 한 번 이상 해본다. 용돈에 그리 박하지 않은 아버지와 삼부자가 살기에 지나칠 정도로 넓은 집 덕분에 게임 타이틀만 모아놓는 방이 따로 있을 정도이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이미 내가 산 타이틀이 천 개가 넘을 정도로 오래된 취미생활.
나는 마음에 드는 게임을 찾는 그 순간부터 24시간 전부를 그 게임에 할애한다. 방학 때라면 두문분출이 기본이고 지금처럼 학교에 다녀야 하느라 그게 불가능하다면 머릿속에서라도 끊임없는 시뮬레이션을 반복한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전락을 연구하기 시작하고 수업을 들으면서도, 걸어가면서도 컨트롤에 대해 고민한다.
반복연습은 말할 필요도 없고 더 완벽하고 더 획기적인 방식에 대해 상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에, 내가 공략을 시작하면 레벨 노가다가 필요한 게임이 아닌 이상 절대 삼 일을 버티지 못한다.
반드시 그 안에 그 게임의 뼈대까지 파악해 버려, 그 누구보다도 완벽한 달인의 반열에 오르는 것이다.
농담이 아니라 대전게임이나 전략시뮬레이션, AOS게임 등을 하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그 동영상이 인터넷을 타고 돌아다닌다.
리플에 조작 소리가 끊이지 않을 정도여서 요새는 꽤 조심하고 있는 상태.
“그런데 그런 나한테 벌써 열흘이나 버티다니.”
항상 그러했듯 학교가 끝나자마자 오락실로 향했다.
아버지도 형도 별로 가족을 구속하는 성격은 아니어서 별다른 문제는 없다. 아마 예전이었다면 이렇게 매일 오락실에 가는 나를 재석이라도 따라왔을 테지만, 녀석은 어머니에게 붙들려 학원에 다니고 있는 상황이라 별다른 문제없이 오락실로 향할 수 있었다.
‘오늘은 뭘 해볼까나? 뭐, R-13가지고 [징벌]을 토벌하는 건 이미 했고. 아무리 나라도 R-13로 거대전함을 포획하는 건 불가능하니… 아, 그래. 오늘은 칼전을 해볼까?’
R-13의 주무장이라고 할 수 있는 광자포 대신 보조무기라고 할 수 있는 초진동 블레이드를 쓰기로 했다.
적들이 광자포를 뿅뿅 쏴대는 상황에서 단검 들고 설치는 건 죽여 달라고 사정하는 거나 다름없는 짓이겠지만 이 정도의 페널티는 있어야 게임이 재미있지 않겠는가?
기이이잉---
그런데 그때 기묘한 소리가 들렸다.
‘아… 한동안 조용하나 싶었더니.’
뭔가 나를 굉장히 귀찮게 할 것만 같았던 세레스티아는 의외로 한동안 별다른 접촉이 없었다.
당장 우리 집에 쳐들어와서 아버지를 보고 반한 다음 어머니가 되겠다고 설치는 거지 같은(?) 로맨스 코미디가 벌어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관광을 마저 하기로 한 건지 아니면 여행기간이 끝난 건지 아무 소식이 없었던 것.
그러나… 선명하게 공간을 울리는, 그러나 그러면서도 주변 누구도 인식하지 못하는 이 소리는 주변에 그녀가 나타났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아니, 잠깐. 그러고 보니 조금 다른 소리인데? 다른 외계인인가?’
웅-
의아해하고 있는데 몸 안에서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그러나 왠지 익숙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 알 수 없는 감각은, 나에게 [정보]를 전해주고 있다.
-저항하시겠습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정말 그런 텍스트가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너무나 선명하게 뭔가가 내 몸을 이동시키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며, 동시에 나의 판단 여부로 그것을 막아낼 수 있다는 것 역시 알았다.
다른 그 어떤 조건이나 자격, 힘의 소모 없이.
그저 나의 의사결정만 있으면 행사할 수 있는 일종의…….
‘이게 뭐야. [권리]라고? 능력이 아니라?’
황당해 했지만 그렇게 느껴졌다.
그렇다. 나에게 일종의 권리가 있었다.
그야말로 영문을 알 수 없는 정보였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이게 권리인가 능력인가 하는 점이 아니다.
과연 나는 이 영문도 모를 간섭에 저항해야 해야 할 것인가?
‘하지만 저항하게 되면 또…….’
나는 예전 세레스티아의 우주선을 보고 멈칫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역시 보이는군요’라며 후후후 하고 웃던 그녀의 모습 역시. 때문에 저항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순간 배경이 변한다.
파앗!
어느새 나는 어떤 방 안으로 이동해 있었다.
틀림없이 오락실 앞에 도착해 상당한 수의 학생들 사이를 지나고 있었지만 너무나 간단히 공간을 넘어 전혀 다른 공간에 와 있는 것이다.
“…뭐야 이거? 여긴 어디야?”
일단은 당황하는 모습을 연기해 보았다.
어쩌면 나를 이렇게 납치한 것이 세레스티아가 아닌 다른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도착한 방의 분위기를 말하자면, 이런저런 가구가 배치되어 있는 일종의 응접실이었다.
가구들의 모양새는 전체적으로 둥글둥글해 조금 이질적이었지만, 그렇다고 이해 불가능한 현학적인 디자인은 아닌데다 전체적으로 인간 정도의 신장을 가진 대상이 사용하기 편하게 되어있었다.
“반갑습니다. 예비 조종사님.”
“…깜짝이야.”
요번 건 연기가 아니라 진짜였다.
농담이 아니라 1초 전만 해도 아무도 없던 정면에 난데없이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하하, 정말 태연하시군요.”
“태연하게는 무슨. 심장이 떨어질 뻔 했거든요?”
최대한 날카롭게 답했지만 믿지 않는 눈치다.
놀란다고 [연기]를 했을 때에는 그나마 놀라는 분위기를 낼 수 있는데 진짜 깜짝 놀라니 오히려 극도의 차분함이 전신을 지배했기 때문.
그러나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내 앞에 나타난 여인이 환하게 웃으며 말한다.
“놀라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예비 조종사님. 이렇게 뵙게 되어 매우 기쁘군요.”
“…예비 조종사?”
묘한 단어에 의문을 표하며 반사적으로 그녀의 머리 위를 바라본다.
[레온하르트 제국 2군단 사령부]
[인사과장 레이나]
‘뭐야 이게.’
순간 멈칫한다. 내용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 선은 뭐지?’
칭호의 내용 자체는 평범(?)한데 그 중앙에 취소선처럼 직직 선이 그어져 있다. 마치 글자를 써놓은 다음 그 위에 선을 그어 그 글자를 지우려고. 아니, 취소하려고 한 것만 같은 모양새로, 난생처음 보는 방식의 칭호였던 것.
하지만 나를 납치한 상대는 내 당황 따위는 아무런 상관없다는 듯 척하고 가슴 위에 손을 올린다.
“황제 폐하를 위하여! 레온하르트 제국군 2군단 사령부 인사과장, 알레이나 대위입니다.”
“레온하르트 제국이라니…….”
제국(帝國). 중세시대에나 어울릴 단어지만 동시에 너무나 익숙한 단어이기도 하다.
새로 생긴 오락실에 있던 정체불명의 게임기에 설치된 대전쟁에서 나는 레온하르트 제국군에 속해 셀 수 없이 많은 적을 무찔러 왔었기 때문이다.
“그건 오락실에 있던 게임 내용인데? 라고 생각하시고 있겠군요.”
친절하게 웃으며 의자에 앉는 그녀는 농염한 기운이 확 풍기는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스스로의 소개로 보아, 그리고 입고 있는 제복으로 보아 여군이라고 짐작되는 그녀는 나와 거의 맞먹는 훤칠한 키에 탄탄하게 단련된, 그러나 그러면서도 육감적인 몸매의 소유자였다. 노출이 많은 것도 아니고 거의 전신을 싸매고 있다 해도 좋을 정도의 제복에서조차 선명하게 느껴질 정도니 사복을 입고 돌아다니면 온 거리의 시선을 다 빨아들일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니 세상에 뭐 이렇게 생긴 군인이 다 있어? AV기획물이냐?’
전체적인 모습을 보자면 30대 초반. 어쩌면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외모를 가지고 있는 그녀는 반짝인다고 해도 좋을 정도의 금발을 허리까지 늘어뜨리고 있는 게르만계(외계인에게도 이 분류가 적용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미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이게 진짜 모습인지, 아니면 인간을 홀리기 위해 설정한 모습인지는 아무래도 짐작하기 힘들었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또 외계인이라니.’
그렇다. 그게 문제였다. 세레스티아가 그러했듯, 그녀는 자신을 외계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설마, 그게 다 실존한다고 말할 생각은 아니시겠죠?”
“물론.”
빙긋 웃으며 알레이나가 말한다.
“설마 그게 다 실존한다고 말할 생각입니다. 대전쟁은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 사실을 기반으로 한 조종사 육성 시뮬레이션이니까요.”
“…….”
할 말을 잃었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 그녀가 슬쩍 의자를 가리켜 앉으라고 손짓한다.
아닌 게 아니라 그녀가 앉은 상태에서 나 혼자 서 있기도 어색한 상황. 즉시 자리에 앉자 그녀가 설명을 시작한다.
“말했다시피 당신이 플레이했던 대전쟁은 실제 기가스 조종법과 완벽하게 동일한 방식으로 조종하는 시뮬레이션입니다. 저희 레온하르트 제국과 테케아 연방 사이에 있었던 전쟁 정보를 넣어 만들었죠.”
부드럽게 설명하며 오른손을 들자 허공에 홀로그램이 떠오른다.
명백하게 [지구 외] 기술로 재현되어 있는 그것은 하도 많이 봐서 이제는 익숙하기까지 한 거대전함 [라이징 스톰]과 [격노], 그리고 그 사이를 날아다니는 기가스들과 전투기들이었다.
“저기, 죄송하지만… 그런 첨단 물품을 왜 지구에 던져 놓은 겁니까?”
“당연히 재능 있는 조종사를 선발하기 위해서입니다. 저희 레온하르트 제국에서는 저희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알스트론 은하 대부분의 행성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시뮬레이션 장치를 설치해 재능 있는 자를 선발해 왔지요. 시뮬레이션 장치에서 10만점 이상의 점수를 획득하게 되면 우주 공간으로 신호가 쏘아지게 됩니다.”
“…….”
즉 조종사 선발 시험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심지어 지구처럼 외계문명의 존재를 모르는 이들에게조차 주어지는 범 우주적 규모의 선발 시험.
“당연히 당황할 거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예상한 것보다 매우 침착하시군요. 작년에 모셔 갔던 분은 무려 이틀 동안이나 몰래카메라를 찾으며 소동을 벌였거든요. 34지구의 문명으로는 도저히 구현 불가능한 기술을 보여 드려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죠.”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또 너무 느리네요.”
“예비 조종사님이 너무 빠른 것도 사실이지만 말이죠.”
그렇게 말하며 품속에서 카드 정도 되어 보이는 크기의 투명판을 꺼냈다.
크리스탈과 비슷한 재질로 만들어진 듯 묘한 빛을 흩뿌리는 그 판은 마치 접힌 종이가 펼쳐지듯 그 크기를 키우더니 부드럽게 적당한 크기의 서류로 변했다.
“…이건?”
“계약서입니다. 여기에 서명하시는 순간 당신은 레온하르트 제국군이 될 수 있는 파이넬 아카데미 입학시험을 치룰 자격을 가지게 되죠.”
완전히 자기 멋대로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다.
내가 거부할 거라는 가능성 자체를 배제시키고 있는 것만 같은 태도.
“지구에서는 마음대로 납치해서 계약서를 내미는 상대를 흔히 노예 상인이라고 부릅니다만.”
황당하다는 내심을 감추지 않고 드러냈으나 그녀는 태연하게 웃었다.
“그러나 지금껏 이 제의를 받은 예비 조종사 90%가 승낙의 뜻을 보여왔습니다. 더불어 파이넨 아카데미의 입학시험에 합격하는 게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니 이건 일종의 가계약에 불과하죠. 한번 시도나 해본다는 의미이니 손해 볼 건 없으실 겁니다.”
즉 어차피 안 될 가능성이 높으니 김칫국 마시지 말라는 의미인 건가? 그러나 그렇다 해도 내 뜻은 변하지 않는다.
“죄송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건 게임이지 전쟁이 아니에요. 괜히 목숨 걸고 싶지 않으니 집으로 보내주시죠.”
깔끔한 거절이었지만 알레이나는 당황하지 않고 말한다.
“하지만 입학시험을 보는 것만으로… 이만큼의 보상을 드리는데요?”
그렇게 말하며 보여준 계약서에는 0이 10개나 달려 있었다.
다행(?)히 원 단위였지만 단지 시험을 치르는 것만으로 받기에는 어마어마한 재화다.
“보상은 블랙카드로 지급됩니다. 그 블랙카드는 세계 어디서든 자유롭게 사용 가능하고 완전하게 깨끗해 추적당할 일도 없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씩 하고 웃으며 알레이나가 말한다.
“입학시험에 합격할 경우 입학시험의 보상이 월급(月給)으로 변하며 이… 원()? 하여튼 이런 한정적인 화폐가 아닌 우주공용화폐인 게럴트로 지급이 됩니다. 더불어 파이넬 아카데미의 학생은 1급 이하, 그러니까 살인을 포함한 대부분의 범죄에 대한 감형권과 3급 작전권 가지게 되며 이는 이 작은 행성에 있는 나라들의 대통령 이상의 권위를 가지게 된다는 것을 뜻하지요.”
한마디로 그 파이넨인지 파이널인지 하는 학교에 들어가는 것만으로 인생 자체가 변할 것이라는 뜻이었지만…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헛소리지.’
아무리 좋은 조건을 내걸어 봐야 죄다 허울이다. 애초에 전투를 위해 만들어진 기가스의 조종병을 이만한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데려가려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써먹으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