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머리 위에-12화 (12/249)

0012 / 0117 ----------------------------------------------

chapter4 무너지는 일상

초보는 아무것도 모르기에 약한 캐릭터를 고른다.

중수는 강한 캐릭터를 알아 이기기도 지기도 한다.

고수는 자신에게 맞는 캐릭터를 찾아내 승리를 쌓아간다.

그리고 초고수는! 그 로망은!

‘최약체 캐릭터를 골라서 모든 강자를 쓰러뜨리는 것이지!!’

레버를 움직인다.

좌삼삼, 우삼삼, 상하상하, 좌우상하, 그리고 AB버튼!

-홀홀홀홀! 연구 시간이군!

히든 캐릭터(Hidden Character) 싸이코 박사.

그 존재를 알지 못하면 고를 수 없는 백발의 노인이 시험관을 들어 올리며 미소 짓자 뒤에서 구경하고 있던 청년 중 하나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아앗? 숨겨진 캐릭이잖아? 밸런스도 있는데 이런 캐릭이 있으면 안 되지. 갓오파는 전 세계를 대상으로 팔아먹는 게임인데 이래도 돼?”

숨겨진 캐릭터나 숨겨진 아이템, 숨겨진 스킬이나 숨겨진 사기급 직업들은 흔히들 생각하고 내가 얻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할 만큼 뻔하디 뻔한 콘텐츠이지만 집에서 혼자 하는 RPG게임이라면 모를까 모두가 다 하는 게임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요소를 집어넣는 건 문자 그대로 미친 짓이다.

힘들게 만든 게임을 스스로 죽이는 자살행위라고나 할까.

똑같이 돈 내고 하는데 누군 박박 기며 고생하고 누구는 사기 캐릭터로 큰 이득이나 재미를 본다고 한다면 과연 누가 그 게임을 하려 하겠는가?

돈을 더 쓰면 더 강해진다는 나름대로의 형평성이라도 존재하는 캐쉬 시스템조차 너무 심해지면 유저들이 우르르 떠나는 판국에 운이나 비결로 막대한 이득을 취하는 히든 시스템이라니.

그러나 그렇게 불만을 토하는 사내의 친구가 고개를 흔든다.

“아, 저기 있잖아. 저 싸이코 박사는 그런 캐릭터가 아니야. 물론 히든 캐릭터인 건 사실이지만…….”

사이코 박사는 히든 캐릭터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그가 사기 캐릭터라는 말과 동의어는 아니다.

애초에 대전 게임에 그런 캐릭터를 만들어놓을 리가 있겠는가?

사이코 박사는 히든 캐릭터이지만 그 어떤 게이머들도 그 존재를 불만으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재미있는 히든 시스템이라고 칭찬할 정도인 것이다.

왜냐하면 사이코 박사는…….

-어이쿠!

주먹질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쓰레기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철푸덕!

주먹질만 내질러도 넘어진다.

발차기를 하면 아예 1초 정도 누워서 일어나질 않는다.

공격력은 나름 강한 편인데, 이 사이코 박사의 공격은 선딜(공격 전의 딜레이)과 후딜(공격 후의 딜레이)이 실로 어마어마하다.

주먹을 내뻗기 전에 붕붕 허공에 두 번 휘두르고 휘두른 후에는 넘어지고.

발차기는 드롭킥을 하듯 날린 다음 누워서 허리를 잡고 1초간 뒹군다.

뿡!

방귀를 뀌면 적의 피를 절반 이상 깎는 무지막지한 화염방귀(연구 중에 먹은 약물이 방귀로 뿜어진다는 설정이다)를 뀌는데, 이 역시 맞는 사람이 없다.

왜냐하면 마주 보고 싸우는 대전게임인데 게임 중 천천히 뒤돌아서(심지어 돌아서며 허리 두 번 두드리는 모션까지 뜬다) 합, 하고 힘을 주니 눈먼 장님이 아닌 이상 누가 맞겠는가?

그러나…….

“악!!! 그걸 맞았어!!”

“이런! 방귀 으악!!!”

“와, 저 쓰레기 평타로 견제한 다음에 들어오는 타이밍에 확정타로 방귀라니 이 무슨 악마적인 심리전!”

“싸이코 박사로 이 미친 연승은 뭐야!?”

“싸이코다!! 싸이코가 나타났다!”

“이런 미친! 이놈 보고 사람들이 싸이코 박사가 좋은 줄 알고 막 고르고 그러는 거 아냐?”

적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의표를 찔러 치명적인 일격을 가한다.

싸이코 박사는 두말할 여지가 없는 쓰레기 캐릭터로 그 어떤 공격도 명중시키기가 힘들지만 공격력만큼은 그가 지금 하고 있는 게임, 갓 오브 파이터의 보스라고 할 수 있는 인비저블 맨(Invisible man)에 맞먹을 정도다. 그러니 두세 번 공격을 성공시킬 수 있다면, 더럽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커맨드로도 충분히 승리를 따 올 수 있는 것.

-패배하였습니다.

“아, 이런 아깝다…….”

물론 그렇다곤 해도 예전처럼 무한정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대전게임에서 사이코 박사처럼 커맨드 자체가 한정적인 캐릭터는 움직임 자체가 파악되면 모든 게 끝이니까.

성능 자체의 부족을 메꾸기 위한 심리전의 방식에도 한계가 있으니 결국 싸이코 박사의 움직임을 완전히 파악하고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죽는 모습을 보면서 [답]을 어느 정도 궁리한 고수 유저를 만나 지게 된 것이다.

아무리 싸이코 박사의 모든 스킬을 완전히 파악하고 적의 빈틈을 노린다 해도 애초에 싸이코 박사의 한계는 명확하다.

실력으로 메꾸는 것도 어느 정도지 적이 싸이코 박사의 특징을 파악해 버리고 심지어 방심마저 버려 버리면 아무리 나라도 엎치락뒤치락할 수밖에 없다.

“좋아. 충분히 했고.”

당연하지만 재도전 따위는 하지 않는다. 애초에 몸 풀기를 목표로 딱 목숨이 끝날 때까지 하기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필드 진입. 헤르메스 시스템의 작동을 시작합니다.

헬멧과 장갑을 착용하고 지폐를 투입하자 부드러운 여성의 목소리와 함께 전면 화면이 확 하고 밝아지고, 그 직후 급작스러운 전투가 시작된다.

처음 게임을 하는 사람을 시작하자마자 사망하게 만들어 멘붕을 유발시키는 사악한 패턴이었지만-

쿠르릉! 쾅!

폭음이 귓가로 들리자마자 왼손으로 버튼을 누르며 오른손을 획 잡아당긴다. 화면이 빙글빙글 돌며 전장이 순식간에 멀어지기 시작한다.

말하자면 후퇴. 그러나 단지 그뿐이 아니다.

“핸더! 실드 에너지 전부를 주무장으로 집중!”

-경고. 실드 에너지를 전부 소모할 경우 적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됩니다.

“아, 넌 왜 한 번에 말을 듣는 경우가 없니. 명령이야!]

-실행합니다.

황당하게도, 이 오락기에는 인공지능이나 다름없는 프로그램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그 조종방법은 무려 [음성]이다.

설정에 의하면 내가 지금 타고 있는 기가스, [하얀 뱀]의 관제인격으로 전체적인 시스템을 제어한다고 한다.

관제인격은 조종사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하고 잘못된 명령의 경우 경고를 날리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명령에는 반드시 복종한다.

사실 설명서에는 가급적 관제인격의 지시를 어기지 말라고 되어있을 뿐 이렇게 관제인격이 복종한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없는데, 실제로 명령이라고 하면 따르는 걸 보면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는 이야기다.

“웃차!”

가볍게 기합을 토하며 양손을 움직여 하얀뱀의 에너지를 광자포에 집중한다. 그리고 정면에 적이 등장하는 순간 발사!

콰콰쾅!!!!

“트리플 킬~!”

정면에서 날아다니던 적들이 일렬로 쫙 늘어서는 순간을 정확하게 노려 광자포로 휩쓸어 버린다.

물론 녀석들도 나름대로의 회피기동을 했지만, 그래 봤자 뻔히 보이는 루트.

출력 자체가 약해 일격에 강한 위력을 낼 수 없는 하얀뱀이었지만 실드 에너지를 모조리 공격에 쏟아부어 버리자 일순간에 동급의 기체 3개를 파괴하는 기염을 토할 수 있었다.

“그리고… 후퇴.”

-아직 후퇴 명령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전장으로 돌아가십시오. 조종사님.

하얀뱀의 관제인격, 핸더의 경고가 들렸지만 어차피 움직임 자체를 제어하는 건 내 쪽이다.

녀석은 관제인격일 뿐 나를 강제할 권한이 없는 것.

하지만 녀석은 포기하지 않고 떠들었다.

-조종사님. 전장 이탈은 중대한 범죄행위입니다.

-경고합니다.

-조종사님. 조종사님. 지금 당장…….

전장에서 멀어진다는 텍스와 함께 화면이 붉게 깜빡였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최고 속도로 전장을 이탈, 전장에서 한참 떨어져 있는 거대한 전함(戰艦)을 향해 날아간다.

결국 포기한 것일까?

전장에서 정도 이상 멀어져 버리자 핸더도 화면도 잠잠해졌고 나는 정면의 화면에 집중할 수 있었다.

“라이징 스톰(Rising Storm)…….”

우주를 지배한다는 연합.

그리고 그 안에 속해 있는 21개의 세력 중 하나라는 레온하르트 제국(帝國)의 제13번함. 라이징 스톰의 그 위풍당당한 모습이 화면에 비춘다.

내가 지금 타고 있다는 하얀뱀이 크기가 8미터라는 설정을 가지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화면에 보이는 저 전함 하나가 어지간한 시(市)보다도 두 배 이상 크다는 걸 알 수 있다.

콰광! 쾅!

이러니저러니 해도 전투 중이었던 만큼 요란스러운 것은 라이징 스톰 주변 역시 마찬가지다.

새까만 우주가 환하게 밝아질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포격과 그 포격을 막아내고 있는 에너지 실드를 잠시 구경하다가 갑판 위로 내려선다.

만약 내가 타고 있는 것이 적기(敵機)였다면 라이징 스톰의 실드에 가로막힘은 물론 쏟아지는 포격에 벌집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식별코드를 가지고 있는 하얀뱀은 별다른 문제없이 갑판에 내려설 수 있었고, 이내 기이잉 하는 소리와 함께 선내 깊숙한 곳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빠이빠이!”

-조종사님? 조종사님!

푸쉭!

그리고 도착과 동시에 핸더의 부름을 가볍게 무시하고 하얀뱀에서 내린다.

물론 그렇다는 [설정]이니 내가 오락기에서 내린 건 아니다.

다만 화면의 시점이 좁아지고 내가 타고 있던 하얀뱀의 모습이 보이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하얀뱀에서 내린 나는 안쪽의 격납고로 달렸다. 인간 상태라고는 하지만 달리는 방식은 기가스 조종법하고 똑같다.

“히든피스(Hidden piece)라. 정말이지 있을 건 다 있다는 말이지.”

히든피스.

숨겨진 조각이라는 뜻을 가진 이 단어는 게임 속에 숨겨진 요소나 시스템 등을 지칭한다.

숨겨진 보스나 직업. 혹은 최강의 무기 등등이 바로 히든피스라고 할 수 있겠지.

그리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게임,대전쟁(The Great War)에도 그런 요소가 존재한다.

이렇게 전장에서 탈출해 라이징 스톰으로 돌아오게 되면, 라이징 스톰에 자리하고 있는 다른 기가스로 갈아탈 수 있는 것!

그리고 그렇게 도착한 곳에는…….

-뭐냐. 왜 황자님도 황녀님도 아닌 일개 조종사가 이곳에 있는 거지?

거대한 황금(黃金)의 거인(巨人)이 있었다.

황금성좌(黃金星座). 골드리안.

기가스는 신성인수기(神星人獸器)로 등급이 나뉜다.

그중 신(神)급은, 잘은 모르겠지만 운명을 초월한 신적인 강자들, 그러니까 초월자들이 탑승하는 초월병기(超越兵器)라고 한다.

그 힘이 너무나 강해서 작게는(?) 태양 같은 항성(恒星)을 파괴하고 크게는 아예 항성계(恒星系) 그 자체를 말아먹는 무지막지한 기체라나?

지금 내 앞에 있는 골드리안은 바로 그 아래 속하는 성(星)급의 기체다.

사실상 초월지경에 오르지 못한 존재가 탈 수 있는 가장 강한 기가스로 레온하르트 제국에도 딱 5기밖에 없다는 최고급 기체!

아, 참고로 내가 타고 있던 하얀뱀은 신성인수기에서 맨 뒤 바로 앞에 위치한 수(獸)급이다.

그래서 하얀[뱀]인 것이다. 짐승이니까.

-다시 묻겠다. 황녀님은 어디가고 네가 여기 있는 거지?

황당하지만 나에게 말을 걸고 있는 건 골드리안 그 자체다.

대량생산되어 단순히 기체를 관리하는 관제인격에 불과한 핸더와 다르게 골드리안은 고유한 자아를 가지고 있는 것.

‘확실히 먼치킨 기체는 먼치킨 기체야.’

나는 골드리안을 딱 한 번 타봤다.

그리고… 그 한 번의 기회에 난 레온하르트 제국의 적, 테케아 연방의 3군단 전체를 다 밀어버리고 그들의 전함 [징벌]을 포획(적장도 아니고 어지간한 시보다도 거대한 전함을!)했다.

‘솔직히 골드리안 너무 사기야. 혼자 다 해먹을 정도니 원.’

그리고 그렇기에 더 이상 골드리안에게 관심이 없던 나는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골드리안에게 손을 흔들 수 있었다.

“아, 여기 지름길이라 통과하는 거야. 전쟁은 곧 끝날 테니 쉬고 있어.”

-뭐라고?

“바이바이~~”

황당해하는 골드리안을 지나쳐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출구 쪽으로 이동한다.

“도착이군. 망할 놈들, 남는 기체는 좀 갑판 근처에 좀 놓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기가스의 등급은 다섯으로 나뉘며 그 등급마다 차이가 극명하다.

신(神), 별(星), 사람(人), 짐승(獸), 도구(器).

골드리안에 비하면 하얀뱀은 하찮다고밖에 볼 수 없는 성능을 가지고 있지만, 그조차 아무나 탈 수 있는 기체는 아니다. 적어도 장교급이나 탈 수 있는 고급품인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내 앞에 있는 것이 그런 수(獸)급 보다도 아래 등급인 기급(器).

공장에서 대량생산되는 양산기로, 설명서에는 이 기급을 가리켜 병사들의 기가스라고 불렀다.

물론 이조차도 병사 중 엘리트, 혹은 하사관들이나 타는 기체이지만, 기가스 중에서는 가장 저열한 성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리라.

“시스템 기동!”

기이잉…….

탑승과 동시에 가만히 쭈그려 있던 기급의 기가스 R-13이 3.5미터 정도 되는 신장의 몸을 일으킨다.

기급의 기가스였기에 관제인격조차 없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나는 이 기체를 골랐다.

혹시 이 기체에 숨겨진 힘이 있느냐고?

“무슨 섭섭한 소릴.”

가볍게 손가락을 푼다. 정신을 집중하고 설계를 시작한다.

아무래도 화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으니, 적장을 잡는 방향으로 가야겠다.

기급의 기가스는 누가 뭐라고 해도 쓰레기 기체지만, 나름 무장도 충실하고 우주공간을 비행(느리지만)하는 것도 가능하니 한정된 공간에서 경우의 수 자체가 별로 없는 싸이코 박사의 경우에 비하면 훨씬 양호한 상황.

초보는 아무것도 모르기에 약한 캐릭터를 고른다.

중수는 강한 캐릭터를 알아 이기기도 지기도 한다.

고수는 자신에게 맞는 캐릭터를 찾아내 승리를 쌓아간다.

그리고 초고수는!

그 로망은!

“최약체 캐릭터를 골라서 모든 강자를 쓰러뜨리는 것이지!!”

-탑승자 인식 완료. 헤르메스 시스템을 기동합니다.

부드러운 여성의 목소리와 함께 R-13이 움직인다. 나 스스로가 정한 [최고 난이도]의 도전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