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머리 위에-8화 (8/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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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2 별로 원하지 않는 만남. 연속

들려오는 것은 잔잔한 음악이다.

현악기 특유의 깊은 소리는 아마도 바이올린으로 짐작된다.

악기는 하나다.

독주.

수많은 악기와 전자기기로 만들어지는 음악들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는 단조롭게 들릴 수밖에 없는 음률.

“아……?”

하지만 멈칫한다.

가느다란 음률. 웅장하게 큰 것도 아니고 뭔가 특이한 효과를 사용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단지 그 음률을 접한 것만으로도 눈물이 날 것만 같다.

자랑은 아니지만 난 정말 감성이 제대로 메마른 현대인 중 하나라서 아무리 슬픈 영화를 봐도, 아무리 슬픈 책과 음악을 접해도 코웃음밖에 안친다.

그런데…….

차르르르르릉…….

마치 모래알이 굴러가는 것 같은 소리에 온몸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정말이지 가슴이 떨린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만 같은 지고(至高)의 음률(音律).

단언한다. 베토벤이 와도, 모차르트가, 슈베르트가 와도 이 음율 앞에서는 패배감에 몸부림칠 수밖에 없다.

물론 나에게 음악에 대한 높은 이해 같은 건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지만, 세상에는 아마추어이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것이 있는 법이다.

곡이 점점 더 빨라진다.

절정에 달하고.

마침내 마무리.

상당한 시간이었지만 곡이 끝날 때까지 움직이지도 못한다.

그냥 현관에서 멍하니 서 있다가 연주를 끝마치고 눈을 뜨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있다.

“아, 왔니?”

“네. 그런데 그 곡… 제목이 뭐예요?”

대단한 곡이다. 단순히 연주를 잘해서가 아니라 곡 자체에 혼이 실려 있는 느낌.

물론 아버지가 아닌 다른 사람이 연주하면 그 느낌이 확 줄어버리겠지만 그래도 정말 대단한 명곡임에는 틀림없다.

이런 곡이 안 알려졌을 리가 없는데.

하지만 아버지는 말했다.

“이 곡? 아침에 만든 거라서 제목은 아직.”

네가 만든 곡이었냐!!!!!!!!!!

“하… 하.”

정말 허탈감에 웃음밖에 안 나온다.

진짜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냐.

정말이지 신은 너무 불공평하다. 한 인간한테 이렇게 다 몰아주는 건 정말 너무하는 거 아냐?

이 한 인간의 재능만 쪼개고 쪼개도 각 방면의 ‘역사적인 천재’가 1,000명은 나올 것 같다.

“왜 그래?”

“아뇨. 아뇨, 별로. 뭐 별일 없었죠?”

“그냥 언제나 그렇듯 평화지. 오랜만에 옛날 생각에 빠졌더니 시간이 금방 가는군.”

그렇게 말하며 바이올린 같이 생긴 악기를 케이스에 넣어 정리한다.

가벼운 티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단단하게 단련된 근육이 그 매끄러운 윤곽을 드러낸다.

가끔 생각하는 건데, 이 인간은 뭘 해도 그, 뭐라고 해야 하나? 위압감? 오오라? 하여튼 그런 게 있다.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를 하고 있어도 문득 문득 ‘이 인간이라면 효도르와 싸워도 이기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문득 묻는다.

“아빠, 혹시 마법이나 외계인, 무공, 뭐 이런 거에 대해 아는 거 있어요?”

“흠… 미안.”

“네?”

갑자기 사과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의아해하는데 말씀하신다.

“난 요새 개그는 잘 몰라서. TV프로에 나오는 거냐?”

“…아뇨. 그냥 해본 말이에요,”

손을 내저으며 무마한다. 애초에 너무 무리한 이야기였기 때문.

사실 여기서 아버지가 ‘그래. 사실 나는 9서클 대마법사이자 이기어검을 사용하시는 절대고수이시지!!!’라고 말해도 웃기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지만 그럼에도 가끔 생각한다.

‘아버지는 보통 인간이 아닌 게 아닐까?’

종종 생각해 왔다.

아버지는 뭔가 특별한 존재가 아닐까?

사실 어딘가의 외계인이라거나, 혹은 과거 세계를 구한 적 있는 용사라거나, 현직 마왕이라거나, 행성의 힘을 타고난 별의 화신같이 뭔가 쉽게 상상하기 힘든 그런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

가끔 보이는 아버지의 모습은 황당함까지 느껴질 정도로 비범해서, 보통의 사람이라고 보기 힘든 정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식사를 하면서, 혹은 여유 있을 때마다 아버지의 칭호를 아무리 분류하고 분류해 봐도 그런 느낌의 칭호는 나오지 않는다.

나이를 검색하면 틀림없이 36살이고 종족은 인간이다.

마법사라든가 초능력자라든가 하는 칭호는 없고 내공 관련 칭호도 가지고 있지 않다.

물론 이상한 칭호는 많다. 진짜 이 인간만큼 해괴한 칭호를 많이 가진 인간도 없을 것이다.

사실 아버지가 가진 칭호 대부분은 사실 이해가 안 가는 종류가 많다.

아버지가 평소 달고 다니는 고정칭호인 ‘그’ 칭호만 해도 그렇지만 그것 말고도 별의별 칭호가 다 있다.

[천상의 연주자]

[세상을 그리는 자]

[기적의 요리사]

[신의 대장장이]

남들은 하나 있을까 말까 한 고착칭호가 그야말로 수두룩하다.

더 무시무시한 건 그 고착칭호 하나하나가 다른 사람은 평생을 노력해도 얻을 수 없을 수 없을 정도의 수준이라는 점이다.

그야말로 질릴 정도로 유능한 인재라고 해야 하려나.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압권인 칭호는 바로 이거다.

[인간 대표]

아니, 이게 무슨 말이야? 인간 대표라니, 우리 아버지가 인간 대표라니……!!

“아니, 뭐, 더 잘난 인간이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없을 것 같기는 하지만.”

“응? 무슨 말이냐?”

“아뇨. 아, 그런데 혹시 강보람이라는 이름을 아세요?”

“강보람? 흠. 일단 들은 이름은 다 기억하는 편인데 확정을 못 하겠군. 정보를 더 주겠니?”

확실히 아버지의 말투는 특이하다. 정보를 더 달라니 무슨 컴퓨터도 아니고.

하지만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던 만큼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저보다 한 살 어려요. 그리고 그 애 언니가 아빠랑 같이 일 한 적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아, 그럼 알겠다.”

그래, 들어봤으면 알겠지.

아버지의 기억력은 3년 전에 봤던 뉴스, 그것도 그 내용도 아니고 그때 아나운서의 옷 색깔이랑 안색, 그리고 뉴스 아래쪽으로 스쳐 지나가는 사건사고까지 다 기억할 정도니까.

“누구예요?”

“예전 나사에 있을 때 같이 일했던 녀석 중 은하라던 여자아이가 있었거든. 그 아이 동생 이름이 보람이라고 했었지. 난 거기 잠깐 도와주고 만 거지만 녀석은 아직 있을 텐데. 무슨 일이지?”

아버지의 말에 혀를 찬다.

나사라면 분명 제1우주 전초기지라고 불리는 그 NASA를 말하는 거겠지?

하긴 나사 쪽 사람이라고 알고 있는 원융(중국인이라는데 처음엔 눈치 못 챘을 정도로 한국어가 뛰어났다. 이 인간도 한 5개 국어 하나 보지)씨도 종종 전화해서 아버지께 이것저것 물어보곤 하니까.

아버지가 죽어라 핸드폰을 안 들고 다니기 때문에 온갖 대단한 인간들 전화를 내가 다 받아야 한다.

덕택에 쓸데없이 간덩이만 커져서… 나중에 어디 취직해서 사장 같은 걸 봐도 같잖아 보일까 봐 걱정이 태산이다.

“하여튼 그 녀석 자기 언니가 전해주라고 한 물건이 있어서 잠시 들린다고 하더라고요. 그 겸 물어볼 것도 있다던가?”

“은하라… 왠지 나를 무서워해서 말을 하면서도 얼굴을 마주 보지 못하던 녀석이었는데 말이야.”

분명 무서워서 그러던 건 아닐 것이다. 확신한다. 걸라면 내 목도 걸 수 있지만…….

뭐, 그걸 굳이 내가 지적할 필요는 없겠지.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떨친 후 묻는다.

“그런데 형한테 연락 없었어요?”

“좀 늦는다고 하더라고. 저녁 먹을래?”

“오늘은 별로 생각이 없네요.”

“알았어.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샌드위치 만들어서 냉장고에 넣어둘게. 나중에라도 배고파지면 데워 먹고.”

참으로 배려 넘치는 성격이다. 항상 모든 상황을 예상에 넣고 우리의 선택을 존중하면서도 잘못된 길로 나가려고 하면 따끔한 충고를 한다.

이런 아버지 아래에서 삐뚤어진다는 것도 참으로 힘든 일이리라.

딸깍.

“후…….”

그래, 솔직해지자.

나는 아버지에게 일종의 열등감 비슷한 걸 느끼고 있다.

하지만 뭐, 열등감도 어느 정도여야지.

나와 아버지의 차이는 거의 멸치와 고래의 차이다. 멸치가 고래의 거대함을 질투하고 열등감을 느낀다는 것도 사실 우스운 일이리라.

“대단한 사람은 됐어. 그냥 평화롭게 가자.”

어차피 내가 뭘 한다 해도 아버지를 추월할 수는 없고, 뭐가 된다 해도 아버지를 놀라게 할 수 없다.

아무리 노력해 봐야 소용없다면 뭐하려 발버둥을 쳐야 하겠는가?

물론 칭호를 본다는, 아버지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 이 해괴한 초능력을 악용한다면야 온갖 사고를 다 치고 다니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그렇게까지 막나가기에 내 정신은 너무나 삶에 지쳐 있는 상태다.

‘삶에 지쳤다?’

무심코 떠올린 생각에 헛웃음을 짓는다.

삶에 지쳤다니.

고작 고딩이 내뱉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말이다.

몇 년이나 살았고 뭐 얼마나 힘겨운 고난을 겪어왔다고 삶에 지쳤다는 소리를 한단 말인가?

‘하지만 동시에… 이게 사실이라는 게 우습군.’

어차피 진짜 경험도 아닌데, 라고 중얼거리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대단해. 정말 대단해! 천만, 자그마치 천만 명이라니… 캬하하하하!!! 너야말로 진짜 천재다!

욱씬.

몰려드는 고통에 머리를 부여잡고 신음한다.

-아버지, 주인님. 저의 창조주시여.

내 앞에서 무릎 꿇고 있는 수 없이 많은 [무언가]가 보인다.

-명만 내리소서. 한 줄의 명령만 있으면 저희는 무엇이든 할 수 있사옵니다.

-바보같이 이용만 당하지 말라고! 말 한마디면 우리가 다 해결할 수 있는데!

애원하는 사내가 보인다. 한없이 강하고 굳건해 보이는 사내.

화를 내는 여인이 보인다. 더없이 아름다우면서도 끝없는 힘을 품고 있는 여인.

-위대하신 지혜여. 저희에게 답을 주소서…….

-알고 있잖아! 당신은 다 알고 있잖아!

-만물의 지식을 품은 이여. 부디 우리에게…….

사람들도 보인다.

나를 보며 갈구하는 광기(狂氣)가 넘치는 시선 역시 보인다.

“윽… 제길. 한동안 잠잠하더니 또 왜 이 난리야?”

이마에 손을 올린 채 비틀거린다.

몰려드는 영상과 지식과 힘의 편린이 나를 괴롭게 만든다. 구역질 날 정도의 분노와 슬픔, 공포와 괴로움, 끝없는 후회와 집착에 속이 매슥거리고 구토가 올라온다.

“하아… 하아…….”

다행히 두통은 잠시 후 가라앉았다.

아주 잠깐이었을 뿐인데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팔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반년 가까이 아무 일 없어서 이젠 끝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착각인 모양이었다.

“짜증나는 하루군.”

교복을 아무렇게나 내던져 놓고 침대에 몸을 던진다.

즐거운 첫 수업이라고 생각했는데 외계인을 만나고 마법소녀도 만나고.

거기에 더러운 기억까지 떠오르다니.

“정말 최악이야.”

투덜거리며 잠들어 버린다. 조금 이른 시간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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