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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머리 위에-4화 (4/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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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1 나는 관대하다

“깜짝이야. 안 들어오고 뭐해?”

늘씬한 미소녀가 눈앞에 서 있다.

새하얀 피부에 170cm를 넘는 훤칠한 키, 다른 여학생들하고 똑같은 교복을 입고 있음에도 풍겨 나오는 그 요염함과 섹시함은 이미 고등학생이 가질 만한 것이 아니다.

“아, 미안.”

최대한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를 지나친다.

아아, 잠깐 친구 만나러 들린 것이기를.

제발, 부탁이니 그대로 걸어서 다른 반으로, 그것도 최대한 먼 반으로 가다오.

“아, 저기 잠깐만.”

그녀의 말에 멈칫한다.

뭐지? 왜 부르지?

순간 의문이 들었지만 마냥 멈칫거리고 있을 수도 없어 천천히 돌아선다.

쫄지 마. 쫄지 말자. 그녀가 이상하게 여기면 끝장이다. 침착해야 해.

최대한 태연한 표정으로 답한다.

“응? 왜?”

“아니, 이제 같은 반이네. 대하 맞지? 이야기 많이 들었는데.”

“아, 그래? 나쁜 이야기 아니었으면 좋겠네.”

침착하게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비명을 지르고 있다.

아아아아악!!! 역시 같은 반인가!! 제길! 제길!

올 한 해는 죽은 듯이 숨어 지내야겠구나!

“어? 어디 가?”

“응? 내 자리 찾으러. 더 할 말 있는 거야?”

“아, 아니. 별로. 응. 알았어.”

떨떠름한 표정의 그녀를 남겨두고 내 자리로 향한다.

우리 학교는 반 배정 하면서 좌석까지 다 배치해 놓기 때문에 괜히 자리 잡느라고 신경전할 것 없이 정해진 자리로 가서 앉으면 된다.

물론 이게 절대적인 배치는 아니어서 나중에 교사에게 말해서 변경할 수도 있다.

“오랜만이군.”

“아. 그, 그래. 잘 지냈어?”

차분한 목소리에 좌절감을 느낀다.

아아, 제길. 김동민 이 녀석도 같은 반이야…….

“아니, 별로.”

“응?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안 좋은 일이라기보다는 번거로운 일이 조금… 이젠 다 해결됐다.”

그 번거로운 일이 방학숙제를 밀렸다거나 친구랑 다퉜다거나 하는 등의 평범한 학생이 겪을 만한 용무는 틀림없이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아마 좀 더 큰 스케일의 번거로움이었을 것이고 녀석은 그걸 더 큰 스케일의 방식으로 해결했으리라.

물론 그 번거로움이나 해결 방법이나 전혀 궁금하지 않다.

“아, 안녕.”

“응, 안녕.”

자리에 않는다. 짝은 꽤 귀여운 인상의 여학생이었다. 평소라면 럭키~!를 외칠 만한 상황이지만 지금 좀 우울해서 기뻐할 수가 없다.

“자~ 이것으로 새 학기가 시작됐다. 하지만 다들 알고 있지? 3학년이 돼서 고생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준비해 둬야 해. 이제 1학년 때와는 달라.”

새로 담임이 되었다고 하는 30대 중반의 교사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뭐, 결국 놀지 말고 공부하라는 말.

그리고 그는 또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절거리다가 말했다.

“…그러니까 얼굴도 익힐 겸 한 명씩 자기소개나 해. 어쨌든 1년간 얼굴을 마주할 사람들이니까. 그럼 1번부터.”

“에, 하하. 어색하네. 음 반가워. 나는…….”

1번부터 차례대로 일어나 자기소개를 하기 시작한다. 나는 27번이니 조금 나중.

나는 슬쩍 시선을 움직여 클래스메이트들의 칭호를 두루 살폈다. 다행히 다들 평범한 녀석들이다.

하긴 경은과 동민 외에도 골치 아픈 녀석이 있으면 나 정말 울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만나서 반가워! 이경은이라고 해. 취미는 TV 보기고 별다른 특기는 없네. 공부도 중요하지만 모두하고 친하게 지내자~!”

화사하게 웃는 그녀는 내 앞자리다.

아, 이런 제길. 너무 가깝군.

하지만 뒤에 앉아 있으니 확실히 느껴지는 게 이 녀석 몸매가 좋긴 좋다.

여자치고는 상당히 훤칠한 키에 늘씬한 다리, 잘록한 허리는 전체적으로 매끄럽다는 느낌.

게다가 몸이 뭐랄까, 단순히 타고난 몸매라기보다는 잘 단련된 검(劍) 같은 그런 느낌이 든다. 그러니까 탄탄해 보인다고나 할까?

평소 운동을 부지런히 한다는 건가.

‘아무리 봐도 인기가 있을 수밖에 없는 녀석이란 말이지.’

붙임성 있는 성격에 매혹적인 미모를 가진 데다 자기관리마저 철저하니 당장 연예인으로 나선다 하더라도 뒷말이 나올 리 없을 정도로 완벽한 엄친딸의 표본.

그러나 그럼에도 단 한 가지의 결점이 그 모든 장점을 뒤덮는다.

휴먼 슬레이어(Human slayer).

그래, 저 칭호. 저 칭호가 너무나 큰 단점이다.

솔직히 그녀가 사람을 죽였을 거라고는 도저히 믿겨지지 않았지만, 안타깝게도 칭호가 틀리는 경우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알아서 조심하는 수밖에.

‘그러고 보니 저 녀석은 저 칭호 외에 본 적이 없군.’

나는 고착칭호라고 부른다.

그건 어떤 사람이 아주 특별한 조건이나 행위를 달성했을 때 생기는 칭호로서 이런 칭호를 달고 있는 녀석은 다른 사람들처럼 수시로 칭호가 변하지 않고 그 칭호로 고착된다.

대표적인 예로 우리 아빠도 그렇고 형도 이번에 무슨 일인지 검귀라는 고착칭호가 만들어졌다.

저 동민 녀석도 그렇고 고착칭호가 만들어진 녀석은 그 컨디션이나 상태를 한눈에 파악하기 어렵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만약 [누구에게든 싸움을 걸고 싶은 윤정민]이라는 칭호를 가진 녀석이 보인다면 난 먼 거리에서 그걸 보고 자리를 피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 녀석이 고착칭호를 가지게 된다면 난 녀석이 누구에게든 싸움을 걸고 싶은 상태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없다. [분류]의 과정을 거쳐야만 하는 것이다.

고착칭호를 가진 녀석은 칭호가 시시각각 변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그의 상태나 마음을 알려면 잠깐의 집중이 필요하다.

“흠.”

그러고 보니 문득 그녀의 현재 상태가 궁금해져 분류를 시작한다. 간단하다. 거리는 가깝고 뒤돌아보고 있다고는 해도 칭호는 제대로 보이니 숨 쉬듯 능력을 사용한다.

‘어디 보자… 마음가짐보다는 최신 상태를 확인해야겠군.’

[상태]로 들어가 [현재]를 선택한다. 물론 그 과정 전부가 내 이미지일 뿐이지만 이제는 제법 익숙해져서 편하다. 그리고 그렇게 구체화시킨 그녀의 칭호는 이랬다.

[원일 고등학교]

[오늘 아침에도 한 명 해치운 이경은]

“…….”

오, 하나님 맙소사.

“왜 그래? 안색이 별로 안 좋은데. 어디 아파?”

“아니, 별로. 고마워.”

친절하게도 걱정해 주는 귀여운 짝에게 괜찮다는 미소를 지어 보인 후 침착하게 교과서에 시선을 돌린다. 그러나 머릿속은 복잡하다.

해치워? 해치우다니? 뭘 해치웠다는 거야? 게다가 오늘 아침에‘도’라는 건 무슨 뜻이지?

“박영웅이라고 해. 앞으로 잘 부탁…….”

“취미를 굳이 말하자면 독서…….”

“안녕. 나는 민이라고 해~”

내 머릿속이 복잡하거나 말거나 자기소개는 계속된다. 한 반에 30명이나 있는 만큼 소개도 가지각색. 평범하게 자기소개를 하는 녀석도 있고 그냥 개그로 애들을 웃기려는 녀석도 있다.

그리고 그 다음이 내 왼쪽 자리에 앉아 있는 녀석.

“김동민이다.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군.”

이 녀석도 말투가 참 특이하다. 게다가 항상 구석에 있고 누구와도 친하게 지내지 않는다.

성질 더러운 녀석들이라면 한 번 건드려 보고 싶을 만한 성격이지만 지금까지 누구도 이 녀석을 괴롭히려 든 적이 없었다.

아니, 한두 번 도발한 녀석은 몇 있었지만 어떻게든 그 날은 조용히 넘어갔고 다음 날 동민이 녀석을 도발한 불량배나 학생들은 [죽다 살아난]이나 [겁에 질린] 등의 칭호를 가지고 나타나곤 했다.

드르륵.

바로 이어서 내 차례가 왔기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 앞에 나서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좀 부담이었지만 우리 아버지가 워낙 유명인이라 시선 받는 것에는 꽤 익숙하다.

나는 주변을 슥 둘러보았다. 그리고 최대한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의 성은 관. 이름은 대하.”

그러니까 합쳐서.

“나는 관대하다.”

“푸훗!”

“헙!”

“큭……!”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온다.

후후후. 나의 필살 이름 개그가 어떠냐? 물론 제 살 깎아 먹기라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학기 초에 친근한 이미지를 만들어놓으면 여러모로 편하다.

나는 평화를 사랑하긴 하지만 구석에서 아무하고도 관계하지 않는 그런 성격은 아니다.

뭐, 이 개그는 1년에 한 번 정도밖에 안 하는 희귀성 있는 개그이니 다들 감사히 받들도록 해라.

그래도 이 이름이 개그가 되기 시작한 건 중학교 1학년 때 나온 영화 때문이니 엄밀히 말하면 이 개그를 한 건 손에 꼽을 정도다.

“아… 난 이선애라고 해. 그, 자, 잘 부탁해!”

꾸벅 고개를 숙이고 새빨갛게 얼굴을 붉힌 채 자리에 앉는 그녀의 머리 위에는 [수줍은 이선애]라는 글자가 떠 있다.

칭호도 귀엽구나. 그나마 이 암울한 상황에서 내 마음을 치유해 주는 느낌이다.

오늘이 첫 수업이기 때문인지 학교 수업은 전체적으로 널널한 분위기였다.

교사들은 수업을 하기보다 그냥 앞으로 해야 될 단원들을 설명하는 선에서 그쳤고 그런 영양가 없는 설명들을 들으면서도 시간은 쭉쭉 잘 가서 점심시간까지 지나 모든 수업이 끝난다.

솔직히 난 별로 우리 학교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지만 그래도 딱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있다면 야자 없이 5시 전에 모든 수업이 끝난다는 것이다.

뭐, 결국 그것도 학원가라는 뜻인 거 같지만 우리 아버지는 학원 같은 건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따를 필요가 없다. 영 내 성적이 안 좋으면 차라리 직접 가르치겠다고 하셨고.

사실 어떤 족집게 강사가 와도 아버지보다 잘하지는 못 하리라.

“집에나 가야지.”

교실을 나서며 핸드폰을 꺼낸다. 당연하지만 형하고 같이 갈 생각이다.

물론 형은 바로 아래층에 있으니 찾으러 가도 되지만 얼굴도 익숙하지 않은 3학년 선배들 사이에서 돌아다니기도 좀 어색하니까.

-응, 대하야. 무슨 일이야?

“집에 가려고. 교실에 있어?”

-응. 아, 그런데 미안. 나 어디 좀 가봐야 할 것 같아.

“친구들하고?”

-응.

정녕 미안한 목소리.

흠~ 친구들이 놀러가자고 꼬신 건가? 뭐, 형은 워낙 인기 있으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응 알았어. 늦지 않게 돌아와.”

-그래. 차 조심하고.

“내가 앤가요.”

투덜거리며 전화를 끊고 가방을 챙긴다.

좋아, 뭐, 집에 가서 쉬면되지.

하지만 신발장에서 신발을 꺼내는 내게 접근하는 이가 있었다.

“여어.”

“아, 재석이냐?”

다가온 녀석은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녀석이다. 이름은 배재석. 키도 훤칠한데다 떡대도 대단한 녀석이다.

전문적으로 무술을 배우지는 않았지만 한 성격 하는데다 천부적인 싸움꾼인 탓에 껄렁거리는 놈들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녀석. 하지만 성격은 꽤 좋아서 친하게 지내는 편이다.

“아, 아깝다. 너랑 반이 갈라지다니.”

“뭐 어차피 옆 반이니까 별 상관 없지 않아?”

“상관있다고. 같은 반이면 네 아버지한테 관심 있어서 몰려오는 여인네들을 후릴 수가 있거든.”

“이보세요.”

음흉한 마음으로 가득한 녀석을 보며 한숨 쉰다.

뭐, 틀린 말은 아니다. 1학년 때만 해도 시도 때도 없이 접근하는 여학생들 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물론 시도 때도 없이 접근하는 건 내가 인기 있다거나 해서가 아닌 우리 아버지 때문.

“요새도 집에 초대해 달라고 졸라대는 애들 많아?”

“계속 거절하니까 좀 잠잠해졌어.”

“왜 귀엽잖아. 좀 엄선해서 초대해 보라고. 혹시 알아? 꿩 대신 닭이라고 널 노릴지.”

마냥 재미있다는 듯 끌끌끌 하고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내는 재석.

하지만 고개를 흔든다.

“하나둘 초대하다 보면 끝도 없다. 뭐, 그것 때문에 오히려 여학생들하고 틀어질 뻔했는데 다행히 아버지가 해결하셨어.”

“응? 어떻게?”

“공식 팬클럽 세 군데를 방문해서 말씀하셨대. ‘우리 아들 귀찮게 하면 미워할 거야 애들아~’라고.”

내 말에 재석의 눈이 커진다.

“오호~ 친히 강림하신 거야? 난리 났었겠네.”

“알게 뭐냐.”

뭐, 그래도 마구 들이대던 여학생들이 없어져서 다행이다.

그들의 관심거리가 나여도 귀찮겠지만 아버지에 대한 관심이 나라는 다리를 밟고 가는 것도 사절이다.

게다가 숙제 같이하자 뭐 하자 하는 식으로 접근하려던 녀석들도 흑심이 훤히 보여 곤란하다.

심지어 ‘어, 엄마라고 불러볼래?’라고 한 녀석도 있다.

뭐래는 거야 이 녀석들? 그게 동갑내기 남학생에게 할 말이냐?

“그나저나 뭐, 방과 후에 스케줄이라도 있어?”

“아니, 별로. 왜?”

드디어 용건을 꺼낼 모양이군, 하고 중얼거린다.

왜 그런 생각을 하냐면, 녀석의 머리 위에 [너에게 용건 있는 배재석]이라는 말이 떠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녀석의 칭호를 보고 있던 나에게 있어서도, 녀석이 꺼낸 용건은 좀 뜻밖이었다.

“오락실 안 갈래?”

“오락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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