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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1 나는 관대하다
매트릭스(Matrix)라는 영화를 아는가?
매트릭스의 주인공인 네오(Neo)는 전설적인 해커 모피우스를 찾아다니다 의문의 세력과 만나면서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이 사실 진짜가 아닌 기계들이 만들어낸 가상현실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인간들을 통제하고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낸 거짓된 세계…….
사실 매트릭스는 수많은 예 중 하나일 뿐 누구나 한 번씩 비슷한 생각을 해볼 만하다.
이 세상은 진짜인가?
‘나’라고 하는 객체는 과연 [실존]하는가?
사실 이 세상은 누군가가 프로그래밍해 만들어진 결과물이고 자신의 기억이나 추억 모두 한 편의 시나리오가 아닐까?
이 세상이 불과 하루 전이나 한 시간 전, 심지어는 3초 전에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보장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바로 이런 의심들을 하다가 철학자 R.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철학의 제1원리에 도달하지 않았던가?
…….
물론 이런 식의 의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현실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그야말로 끝이 없으니까.
세계 그 자체를 의심해 버리면 그 세계 안에서 파생되는 그 어떤 증거와 논증도 무의미.
하지만 반대로 세계 외(外)적인 요소가 없는 한 그 의심 역시 증명할 수단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이런 생각은 어떻게 해도 망상에 불과하다.
때문에 이런 종류의 망상을 한 번쯤 할 만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 해도 대부분 쉽게 흩어버리는 것이다.
음모론이나 다름없는 영양가 없는 고민을 하며 살아가기에는 이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이 세계는 과연 진짜일까?”
나는 언제나 진지하게 고민해 왔다. 중학교 때부터 시작된 이 고민은 고등학고 2학년에 들어선 지금까지 언제나 내 뇌리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카사노바 배재석], [성적 떨어진 김완래], [한 잠도 못 잔 이형욱], [숙취에 시달리는 박정식]…….
창밖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머리 위에는 온갖 칭호들이 떠 있다.
이것이 나의 능력.
난 단지 보는 것만으로 그 사람이 속한 있는 단체, 특성, 그리고 현재 상태와 이름을 알아낼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이, 이게 다라는 것이다.
“평화적인 초능력이란 말이지.”
염동력을 이용해 날아다닌다거나, 불꽃을 피워 올린다거나, 공간이동한다거나 하는 능력은 내게 없다.
내 능력은 정말이지 철저히 비전투적인 능력이다. 더불어 이 능력의 원리나 이치 같은 것 역시 전혀 아는 바가 없다.
아니, 그 모든 걸 떠나서 너무 이상한 능력이 아닌가?
농담이 아니라 내가 매일매일 현실을 의심하고 사는 것도 전혀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 생각이 될 정도니까.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던 능력이던 만큼 나 역시 이쪽 관련으로 조사를 많이 해봤다.
만약 내가 불꽃을 피워 올렸다면, 나는 나를 발화능력자(파이로키네시스트)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만약 내가 단전에서 알 수 없는 기운을 끌어내 육체를 강화할 수 있었다면, 그걸 난 내공이라고 판단내렸겠지.
하지만 이건 뭐야? 사람들 머리 위에서 글자를 볼 수 있어?
이건 그 어떤 세계관을 생각해도 납득이 안 가는 능력이다.
결국 남는 선택지라는 건.
“이 세계가 가짜라는 말밖에 안 되잖아…….”
우울증에 걸리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다. 만약 내가 태생적으로 유쾌하고 뚜렷한 자아를 가진 인간이 아니었다면 좀 암울한 성격이 되고 말았으리라.
“응?”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담벼락에 기대있는 쓰레기봉투를 발견한다. 규격봉투도 아니고 분리수거도 하지 않은 채 대충 구겨 넣어서 아무렇지도 않게 버려놓았다.
아, 이런. 또 어떤 비양심이야? 심지어 벽에 쓰레기 투기 금지라고 쓰여 있는데 바로 그 아래에다 버리다니!
나는 쓰레기봉투를 바라보았다. 그 위에는 [대충 버려진 쓰레기]라는 글자가 떠 있다.
“딱히 뭐 제재를 할 건 아니지만… 누가 버렸는지 알아볼까.”
집중한다.
그래, 사실 내가 칭호를 볼 수 있는 건 굳이 사람들의 머리 위에서만은 아니다. 나는 동물에서도, 곤충에서도, 심지어는 무생물에게서도 칭호를 볼 수 있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 칭호를 볼 수 있었던 것은 사람뿐이었으니까.
하지만 기껏 이런 이상한 능력 있는데 그냥 썩히는 것도 아까운 일이라서 난 몇 가지 훈련과 수련으로 정말 어지간히 하찮은(먼지라든가 모래알이라든가)대상을 제외한 모든 대상에게서 칭호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대충 버려진 쓰레기]라는 칭호를 집중해서 바라보며 ‘분류’를 시작한다.
간단한 일이다. 컴퓨터 폴더를 여는 것과 비슷하다. [동물]폴더를 열어 그 하위 폴더인 [조류]폴더를 열고 다시 그 하위 폴더 [기러기]를 찾아내는 방식으로 간략하던 칭호를 구체화시킨다.
“대현아파트에서 버려진 쓰레기… 너무 넓군. 좀 더…….”
분류한다.
좀 더 분명하게 구체화시킨다.
선택의 폭은 넓다. [시간], [장소], [대상] 등 여러 가지 종류로 나누어진다.
좀 시간을 소모한다면 저 쓰레기를 누가 버렸는지, 언제 버렸는지, 심지어는 왜버렸는지(물론 쓰레기 버리는데 별 큰 이유가 있겠느냐만)까지 알 수 있는 것이다.
뭐, 그래도 지금 그렇게까지는 궁금하지 않다.
[대영 아파트 301동 심문순 아주머니가 버린 쓰레기]
“아, 또 이 아줌마구만.”
그리고 이게 그 결과.
심력을 쏟아 구체화시킨 만큼 일반적으로 보이는 칭호보다 훨씬 길다.
뭐, 어차피 늘리려고 하면 마냥 길어지는 게 칭호니까. 한번 실험 삼아 가장 길게 했을 땐 세 줄이나 나왔었다.
“뭐, 어떻게 할 건 아니지만.”
나도 그냥 심심해서 캐본 거다. 하지만 예상대로라니 좀 씁쓸하군.
어차피 우리 담벼락도 아니고 별 상관은 없다. 그냥 창문에서 딱 보이는 위치라 좀 신경 쓰이는 거지.
“학교나 가야지.”
머리를 흔들어 복잡한 생각을 떨치고 옷을 갈아입는다.
서둘러야지. 물론 아직 새벽 여섯 시밖에 안 되었지만 우리 학교는 아직도 0교시를 하는 데다 학교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을 생각하면 여유를 부릴 틈이 없다.
딸깍.
옷장을 열어 검은색의 교복을 꺼내 든다.
흠, 나는 우리학교에 불만이 매우매우 많은 편이지만 그래도 딱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있으니 그게 바로 교복 디자인이다. 사실 내가 이 학교에 지원한 이유 중 하나가 교복이 예뻐서였다.
“아, 대하 일어났니?”
“네, 아빠. 형은요?”
“내려오겠지.”
태연히 답하는 그의 목에는 앞치마가 걸려 있다.
부엌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막 일어난 터라 입맛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먹음직스러운 향기.
“뭘 만드신 거예요?”
“어향육사(漁香肉絲)라고 하지. 위샹로스라고도 하고.”
“한 달간 프랑스 요리더니 이제는 중화요리예요?”
“엽기적인 방식의 요리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할 게 없더라고. 하지만 중화요리도 괜찮군. 종류도 다양하고 난이도도 적당해.”
그렇게 말하며 늘어놓는 돼지고기는 실보다 더 가늘다.
아니, 세상에 돼지고기를 대체 어떻게 해야 저렇게 자를 수가 있지?
물론 어향육사는 원래 고기를 가늘게 썰어 볶는 음식이지만 저렇게까지 자를 수 있는 사람은 전 세계를 뒤져봐도 몇 없으리라.
물론 이론상이야 실처럼 가늘게 뽑아야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론이고 그렇게 썰기는 힘들다. 심한 곳은 손가락 굵기만큼 굵게 썰기도 하는데 이건 뭐란 말인가? 심지어 이건 칼로 썬 거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활기차게 소리치며 형이 부엌으로 내려온다. 171cm의 약간은 작다고 할 수 있는 키에 선량해 보이는 얼굴 때문에 귀여워(형인데도) 보이는 외모의 그는 아버지가 퍼준 밥을 받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막 일어난 주제에 왜 이렇게 하이텐션이야?”
“그야 즐거울 수밖에! 이 세상은 즐겁고 행복한 곳 아니니? 하하하!”
“뭐?”
황당해한다. 이 인간은 또 상태가 왜 이래?
하지만 즐거워 보이는데 굳이 태클을 걸기도 좀 그래서 얌전히 식사를 시작했다.
“감사히 먹겠습니다.”
“그래. 하지만 좀 시험적인 요리들이니 먹고 평가 좀 해줘.”
“죄송하지만 아빠가 한 요리 중에서 맛없는 요리를 본 적이 없는데요.”
어지간한 7성급 호텔 주방장이라고 해도 아버지의 요리 실력을 따라갈 수는 없다.
‘우리 아빠 요리가 제일 맛있어!’ 따위의 감상적인 소리가 아니라 정말로 지구상에 이 인간보다 요리를 잘하는 놈이 있을까 싶을 정도다.
실제로 아버지의 요리를 먹고 제발 제자로 삼아달라고 한 달 동안이나 쫓아다닌 요리사도 있었다.
“이런, 그런 식으로 말해 버리면 더 늘지 않는데.”
“그러니까 얼마나 더 늘려고 하는데요?”
“딱히 얼마나 더 늘겠다는 게 아닌데 말이야. 취미 삼아 하는 거고.”
“전 세계 요리사들을 두 번 죽이는 말이네요.”
“하하.”
지금 내 앞에서 어깨를 으쓱이는 게 바로 내 아버지다.
영어로는 Father, 일본어로는 おとうさん.
하지만 세상 누가 있어 이 인간을 내 아버지로 봐줄 것인가.
“왜 그렇게 봐?”
“아뇨 별로.”
그의 나이는 올해로 36세다. 내 나이가 현재 18세이니 저 인간은 지금의 딱 내 나이 즈음에 나를 낳은 것이다.
사실 이것만 해도 무시무시한 과속 스캔들에 놀랄 노자인데 더 무서운 건 아버지의 외모는 누가 봐도 20대 중반, 많이 쳐도 20대 후반이라는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내 아버지라기보다는 형 같은 외모.
게다가 그 외모는 또 어떤가? 이미 우리 학교에는 이 인간의 공식(비공식은 또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 팬클럽이 3개나 있다.
아버지가 유부남이라는 걸 알면서! 심지어 그 아들이 나라는 것도 알면서도!!!
그뿐이 아니다.
이 인간을 어떻게든 가수나 탤런트로 만들려고 찾아왔던 스카우터가 이미 세 자리를 넘겼다.
단정하게 자른 단발(사실 단발 소화할 수 있는 남자 세계적으로 봐도 그리 많지 않다)에 남자답게 반듯반듯한 이목구비, 차분한 눈동자, 단단하게 단련된 몸.
그리고 온몸을 감싸고 있는 그 특유의 오오라(Auras).
우리 아버지에게는 아무 말 없이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주변 30미터를 가볍게 장악하는 카리스마라는 게 있었다.
“그러니까 뭘 그렇게 보냐고.”
“아뇨 별로. 잘생기셔서요.”
“하하. 고마운 말이지만 소용없어. 딱히 봐줄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많은 사람이 보고 있거든요……!!’
믿기 어렵겠지만 이 인간이 ‘취미 삼아’ 익힌 언어가 무려 17개(그나마 그것도 늘어났을 가망성이 높다)나 되고 종종 시간 날 때마다 NASA에서 우주물리학 관련으로 조언을 구해온다.
심지어 온갖 격투술을 달인 급으로 익혀 보통 사람이라면 기관총을 가지고 덤벼도 승산이 없을 정도인데다 가명으로 낸 책은 세계적인 밀리언셀러로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거기에 주식 같은 건 10만 원으로 시작해도 한 달이면 1억으로 불려(그나마 이런 건 돈놀이라고 자주 안 해서 다행이다)버리고 내 15번째 생일에는 자작 게임(그런데 이게 또 퀄리티가 엄청났다. 심지어 일러스트도 오디오도 전부 자작이라는 게 아버지스럽달까)을 만들어서 선물로 줬다.
…….
그래. 바로 이 사기 캐릭터가 내 아버지다.
능력치를 결정하는 주사위를 한 천만 개쯤 굴렸는데 전부 6이 나온 것 같은 이 인간의 현재 직업은 무려 백수. 쉽게 말해 무직.
그러나 아버지의 경우 보통의 백수들과는 그 상황이 전혀 다르다. 온갖 대기업 국가단체 등에서 모셔 가려고 별짓을 다 하는데도 유유자적하게 살고 있는 것이다.
“감사히 먹었습니다! 아버지 요리는 언제나 최고!”
“그래 고맙구나. 아, 도시락은 현관에 있으니 가져가고.”
“예~!”
아까도 그랬지만 이놈의 형이 상당히 하이텐션이다. 순식간에 식사를 마치고 가방을 챙겨 일어나는 형. 그 모습은 극히 평화롭다. 태도 또한 극히 평화로운 것이다.
그러나 그가 달고 있는 칭호는 결코 평화로운 것이 아니다.
[청룡팀]
[검귀 관영민]
이건 또 무슨 귀신 시나락 까먹는 소린지 모르겠다. 청룡팀은 어디야? 게다가 검귀?
난 형이 칼을 쓰는 걸 본 적이 없다. 심지어 형은 요리도 안 하니 식칼도 잡지 않는데 검귀라니 이 무슨 무협지스러운 칭호란 말인가?
이 정도로 해괴한 칭호는 내가 보아온 모든 칭호를 다 따져 봐도 흔치 않다.
“저도 잘 먹었습니다.”
“그래. 학교 잘 다녀오고.”
문득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책장에서 책 한 권을 뽑아 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본다.
“또 왜 그래?”
“…아뇨.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형과 함께 문을 열고나오며 생각한다. 그래, 칭호가 해괴하기로 치면 저 인간 역시 만만치 않지.
아버지의 칭호 역시 매우 유니크한 종류다. 그 어떤 누구와도 비슷하지도 않다.
그 칭호란…….
“흥, 그래. 다 잘한다 이거지?”
“뭐가?”
“별거 아냐.”
“……?”
얼굴 가득 물음표를 띄우고 있는 형을 지나치며 학교로 향한다.
별로 늦지는 않았지만 서둘러야겠다. 오늘은 당번인 날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