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454화 (외전 완결) (454/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외전 50화

Golden Age

8. 안녕히

테오에게

며칠 눈이 내렸다가 모처럼 날이 맑다.

창 밖으로 잰걸음으로 다니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코트가 두꺼운 걸 보니 날이 추워 보인다. 오늘은 집에서 지내지 싶다.

참, 펜을 들기 전 앙리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아마 씨몽 회장과 만난 듯하다.

화해하라고 얘기해 봤자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것이 뻔해서 자리를 마련했다. 두 사람 다 용기가 없을 뿐이니 이번 기회에 화해하길 바란다.

이렇다 저렇다 해도 두 사람 모두 서로를 신뢰하니 말이다.

신뢰라는 단어를 쓰니 가슴이 아프다.

내가 또 한 번 이별을 겪었다고 얘기했던가. 네게 쓴 편지를 들춰보니 그녀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은 듯싶다.

거리를 뒤덮은 눈처럼 하얀 피부와 와인 빛이 감도는 머리카락이 아름다운 그녀와 난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어떤 물감이 좋은지 얘기하다가 붓을 사러 가기도 했고 영화와 공연을 보기도 했다.

화제는 대부분 미술과 관련되었지만 아주 재능 있는 사람이라 대화가 잘 통했다.

내심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지난 날의 실수가 떠오르며 선뜻 먼저 다가가지 못했다.

그러다 그녀가 모국 러시아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어수선한 나라에서 할 일이 있단다.

가지 말라고, 함께 있자고, 사랑한다는 말 대신 학교를 졸업하고 가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그녀는 내게 많은 것을 배웠고 이제는 실천할 때라고 답했다.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생기면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물러서지 말고 나아가라고 말했던 기억이 떠올라서 이후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날 바라보는 신뢰 가득한 시선을 마주하니 더욱 말릴 수 없었다.

그것이 옳으니까.

다만 더 알고 싶다고, 좀 더 함께하고 싶다는 말을 먼저 꺼낼 것을 하고 후회했다.

네가 그녀와 잠시라도 대화를 나눴다면 내가 왜 그녀를 마음에 두었는지 알 테고, 그녀를 잡지 못한 날 무척 구박할 것이다.

나 또한 그리 생각한다.

화제를 돌리려니 시현이가 SNBA 살롱전에 초청받은 일이 생각난다.

녀석의 파란 나무는 몇 번 이야기했을 거다. 이제는 파란색을 아주 능숙하게 다뤄서 환상적인 이미지를 구현한다.

그림을 본격적으로 공부한 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열정만큼은 누구보다도 뛰어나니 조만간 성과가 있으리라 본다.

할아버지, 그러니까 지금의 할아버지께서 첨삭해 주시니 말이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옛 기억은 조금씩 잊혀서 지금은 할아버지와 편지로 소개한 이들과 함께 새 삶을 살아간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을 찾은 기분이라 먼 과거의 상처는 이제 내 안에서 찾기 힘들다.

새 삶과 여러 작품 속에서 다시 나만의 세계를 꾸려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괴로움은 묻어두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하지 않니.

다만 교통사고로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부모님과 너만은 잊지 못할 듯싶다.

오랜만에 편지를 쓰면서 이런저런 말이나 주절댔던 이유는 미안함과 그리움 때문이다.

네가 날 원망하진 않을까 두려웠다.

이제와 말하지만 우리가 마지막에 함께했던 그곳, 오베르 쉬르 우아즈를 처음 찾았을 때 내 무덤 옆에 놓인 너의 이름과 그 아래 적힌 연도를 보고 적잖이 놀랐다.1)

건강을 회복해서 가족과 함께 행복하길 바랐거늘 내 선택이 네게 더 큰 짐을 지우고 말았던 것 같다.

이 못난 형은 차마 네 무덤 앞에서 용서를 구할 수 없었다.

속죄하는 마음으로 이후 네 가족과 후손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찾아보았다.

제수씨가 남긴 일기를 보고 몇 번을 목놓아 울었는지 모른다.

네가 눈을 감은 뒤로 생계를 이어가기 힘들었던 것 같다.

제수씨는 하숙생을 받았다고 한다.

여러 명분의 빨래를 매일 같이 하고 각각의 방을 청소하고 식사를 준비하는 일만으로도 하루가 부족했을 텐데, 제수씨는 집안일하는 기계로 전락할 수 없다고 일기에 적었다.

끊임없이 성장해야만 한다고 다짐했다.

네가 전해준 예술과 인생의 관한 이야기를 양분 삼아, 나와 네가 남긴 보물을 잘 보존하겠다고 그것이 본인의 사명이라고 했다.

그녀는 결국 우리가 해내지 못한 일을 해냈다.

스데델리크 뮤지엄에서는 내 그림 484점을 전시한 회고전을 열었다고 하더구나. 심지어 나와 네가 나눈 편지를 정리해서 책으로도 냈고 말이다.

지금 네게 편지를 쓰면서, 그 책을 곁에 두고 있다.

제법 두꺼운 책으로 두 권이나 되는데, 우리가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눴나 싶기도 하고. 날짜도 제대로 적지 않은 편지를 순서대로 배치한 제수씨에게 거듭 놀란다.

나는 실로 그녀의 생명력과 의지 그리고 배려에 감사한다.

지금 빈센트 반 고흐의 명성은 모두 제수씨 덕이다.

사랑스러운 조카, 네 아들 빈센트 반 고흐 주니어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지.

녀석이 네덜란드 정부에 그림을 기증해서 반 고흐 미술관이 세워진 사실을 알고 있니.

처음 그곳에 갔을 때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자화상과 너를 그린 초상화를 나란히 전시해 둔 그곳에서 관객들의 표정을 살피고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눈앞에 펼쳐진 기적을 누릴 뿐이었다.

너와 네 가족이 이뤄낸 기적 말이다.

돌이켜보면 매번 생활비를 타다 쓰며 고생만 시키다가 끝내 무책임하게 떠났음에도 너와 네 가족만은 끝까지 날 지지해 주었다.

그림을 그린 사람은 나였으나, 위대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를 만든 것은 너와 제수씨, 조카 빈센트였다.

너희가 남겨준 그 가슴 벅찬 경험이 내겐 아주 큰 자산이 되었다.

같은 그림이라도 보는 사람에 따라 가치가 달라질 수 있고, 같은 사람이라도 보여주는 방식에 따라 느끼는 바가 달라짐을 깨달았다.

때문에 내게 찾아온 모든 일을 감사할 줄 알게 되었고 공은 나누었다.

처음에는 가식적이다, 답답하다는 말이 따르기도 했다. 자신감을 가지면 좋겠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조금씩 내 진심이 전해지는 것 같다.

모두 너와 네 가족 덕분이다.

지독히도 불행했던 첫 번째 삶에서 내게 주어진 가장 큰 축복은 테오 너였다.

너는 항상 내게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하지만 천만에. 나는 너와 제수씨, 빈센트 그리고 네 아이들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빈센트의 아들, 그러니까 네겐 손자지.

네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게 된 후로 네 후손이 어떻게 사는지 알아보았다. 내게도 소중한 아이들이니까.

그중 눈에 띈 아이는 테오도르였다.

의아할지도 모르겠다.

네가 내 이름을 아들에게 주었듯이, 빈센트 또한 아들에게 네 이름을 주었다.

훌륭한 부모 밑에서 자란 네 손자는 암스테르담 대학교 경제학과를 다닐 정도로 명석했더구나.

정의감도 투철했다.

나치군이 네덜란드를 점령했을 때 그에 저항해서 유대인을 비밀리에 도왔다고 한다.

두 번이나 체포되었지만 결코 용기를 잃지 않았지.

네덜란드 저항군은 나치군을 습격했고 나치는 그에 대한 보복으로 네덜란드 시민 263명을 처형했다.

그중에 우리의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아이 테오도르도 있었다.

너의 이름을 물려받은 아이가 나치에 의해 살해되었단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뼈마디가 분리되는 듯했다. 끓어오르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몇 날 며칠을 상심 속에 보내다가 문득 자유와 사랑을 지키다 희생된 네 손자, 내 손자, 우리의 아이를 위해서라도 쓰러져 있을 순 없었다.

그 아이가 지키려던 것을 이 손으로 지키고 싶었다.

그 아이가 살아갔어야 할 이곳을 모든 폭력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싶었다.

무모하다며 말리는 사람이 많았다.

위험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내 아이가, 네 아이가 힘을 가진 이들에게 저항하다가 가버린 것처럼 나 또한 그럴 수 있음을 잘 알았다.

그럼에도 멈출 수 없었다.

처음에는 미술가를 위해 싸웠고, 동성애자라서 비난받은 이를 기렸다. 심지어 무슬림 소년을 지키려 했다.

그래, 너도 의아해할 것이다.

나 또한 예전이라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너와 내 아이가, 장래 유망한 그 소중한 아이가 폭력에 의해 쓰러진 사실을 알게 된 후로 출신이라든가 신분, 종교는 신경 쓰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면 기꺼이 그들 편에 서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시작된 일들이 하나둘 모여서 지금은 내 이야기가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조금씩 세상이 달라져 보이는 건 나만의 착각은 아닌 듯하다.

그런 생각, 아니, 확신이 든 지금에 이르러서야 나는 네게 용서를 구한다.

감사를 전한다.

너와 네 가족이 준 선물이 너무나 커서 너와 제수씨를 바로 대할 면목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그에 부응한 뒤에 이야기 나누고 싶었다.

이제는 네게 조금은 자랑스러운 형이 되지 않았을까.

묻고 싶어도 그럴 수 없구나.

네 후손, 우리 아이들은 내가 잘 보살피고 있다. 부디 그곳에서나마 편히 지냈으면 한다.

사랑하는 형이

“내가 못 산다 정말.”

편지를 적던 고훈이 깜짝 놀라 허리를 폈다.

걸음 소리를 요란히 내며 다가오는 인기척에 서둘러 편지를 숨기자 방문이 열렸다.

“훈아.”

“아저씨?”

문을 열고 들어온 방태호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고훈을 다그쳤다.

“왜 여기 있어?”

“왜라니…….”

고훈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리 살펴도 본인의 방이었다.

“레나 간다는 말 못 들었어?”

방태호가 왜 흥분했는지 알 것 같았다.

“얘기 들으셨어요?”

“알면서 이러고 있어?”

고훈이 씁쓸하게 웃었다.

“자고예프가 선택한 길이에요. 응원해 줘야죠.”

방태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일 출국한다니까 지금이라도 가서 얘기 나눠 봐.”

당장에라도 그러고 싶었으나, 레나 자고예프가 떠난단 말을 전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던 탓에 말없이 그녀를 바라만 봤던 아픔이 다시금 밀려들었다.

“괜찮아요.”

“괜찮긴. 서로 마음 있는 거 뻔히 보이는데.”

“아저씨.”

“얘기는 해야 할 거 아니야. 그렇게 보내면 너도 그 애도 아쉽지 않을까?”

“말했잖아요. 자고예프가 선택한 길이에요. 제가 말릴 순 없어요.”

“그게 정말 레나를 생각하는 일이라고 생각해?”

“네?”

“레나하고 얘기해 봤어? 같이 생각해 본 거야?”

고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네가 정말 레나를 생각한다면 같이 고민해야지. 떨어지더라도 적어도 얘기는 나눠야지. 네가 항상 하던 말이잖아. 안 그래?”

한 걸음 다가갈 용기.

과거 여러 인연과 이별했던 기억이 그를 막아서고 있었다.

떠나는 이를 잡으려 할 때마다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상대를 위해서라도 웃으며 보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방적인 이별이 남긴 슬픔 또한 알고 있었다.

고훈이 일어서려다가 앉기를 반복하자 방태호가 소리쳤다.

“빨리!”

고훈이 서둘러 일어나 외투를 챙겼다. 핸드폰과 지갑만 대충 챙기는 모습을 본 방태호가 빙그레 웃었다.

“저.”

“어서 가 봐.”

“고마워요.”

고훈이 다급히 방을 나서자 방태호가 만족스럽게 숨을 내쉬었다.

아내 이한나를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직장을 옮기게 되면서 생긴 일이 떠올랐다.

그때 한 번 헤어지고나서 다시 만나기까지 1년이 걸렸기에 고훈은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으면 했다.

방태호가 고훈의 방을 둘러보았다.

주인도 없으니 나가야 할 텐데, 책상 위에 놓인 책이 눈에 들어왔다.

『반 고흐, 영혼의 편지』라는 제목의 책으로 빈센트 반 고흐가 동생 테오도르와 나눈 편지를 요한나가 묶어 편찬한 책이었다.

펼쳐진 페이지에는 빈센트 반 고흐의 고뇌와 바람이 적혀 있었다.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기를.

* * *

1)테오도르 반 고흐는 형 빈센트 반 고흐가 사망하고 마비성 치매를 앓다가 약 1년 뒤 사망했다.

후기

안녕하세요, 우진입니다.

<다시 태어난 반 고흐 황금시대>를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금시대편에서는 본작에서 반복하고 강조해 이야기했던 주제를 정리하고.

빈센트 반 고흐가 어떤 삶을 살기를 바랐는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를 명확히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상당히 어려웠지만 연재 내내 너무나 즐거웠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델프트의 여인>을 둘러싼 일종의 추리극은 제 나름의 새로운 도전이었으니까요.

베르메르의 작품에 숨겨진 비밀을 엮어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고 고훈이 추적해 나가는 과정은 정말 즐거웠습니다.

전 제가 천재인 줄 알았어요.

이어진 <황금이 녹아내린 땅> 에피소드 역시 저로서는 예상하지 못한 결말이 나와서 기뻤습니다.

처음에는 해바라기를 그리기로 정했는데 너무 뻔한 결말 같아서 고심하던 차, 우크라이나 국기가 푸른 하늘과 밀밭처럼 보였습니다.

너무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죠.

하지만 알고 보니 원래 그런 의미였다고 하더라고요.

절망한 저는 뭔가 또 다른 요소가 필요하다고 고민했고 머리카락을 세 움쿰 쥐어뜯었을 즈음 변색 아이디어를 떠올렸습니다.

나 정말 기특합니다.

이후에는 고훈의 삶을 정리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고훈은 다른 웹소설에서 등장하는 주인공과는 상당히 다릅니다.

본인이 쟁취한 일도 남에게 돌리고 큰 성공을 거두어도 그렇게 기뻐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답답하고, 소극적으로 느끼신 분도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고훈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마지막 화에 이르러서야 정리할 수 있었네요.

본편에서 고훈이 테오도르에 관해서 언급하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본인이 죽은 뒤에 사랑하는 동생이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할 법도 하니, 많이들 의아해하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마지막화에서 고훈이 어떤 마음으로 두 번째 삶을 살았는지 다루고 싶었고.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기를’이란 문장으로 커튼을 치고 싶었습니다.

<다시 태어난 반 고흐>의 시작이 바로 이 문구였으니까요.

이제 마무리해야 하는데,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전 세계가 해바라기로 물들었단 내용에 해바라기를 올려주시고, 응원 댓글을 달아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여러분 덕분에 그 댓글을 모아서 작품에 활용할 수 있었고 그것은 소설과 여러분을 잇는 통로로 작용했습니다.

정말 가슴 벅찬 경험이었어요.

저와 여러분이 같이 호흡하고 교감하고 있다고 느껴져서 이 기분을 다시 느끼기 위해서라도 힘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 이야기에 의미를 더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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