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외전 47화
Golden Age
7. 다시 황금의 시대로(12)
“어.”
인터넷 뉴스 문화란을 살피던 김지우가 짤막한 기사를 발견했다.
한국 예술인 조합의 백설기가 사무국장직을 내려놓았단 소식이었다.
[백설기 새출발, 북미 시장 노려]
7일, 한국 예술인 조합의 백설기 사무국장이 퇴임식을 가졌다.
조합은 임기 2년 4개월 동안 한국 예술계 개혁에 앞장 선 백설기 씨에게 공로패를 전달했다.
2029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주목받기 시작해 화이트채플 프리미어 전시회로 두각을 드러낸 후 최근까지 이렇다 할 활동이 없던 백설기의 행보가 주목된다.
퇴임식에서 백설기는 “작품을 만드는 데 부담을 느꼈다.”는 심정을 토로하면서 “하지만 미술은 자신에게 가장 솔직한 행위라는 훈이의 인터뷰를 듣고 마음을 달리 먹었다. 다시 한번 시작할 힘이 났다.”고 덧붙였다.
이후 일정을 묻는 질문에는 휘트니에서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답변했다.
“휘트니면 내년이네.”
기사를 읽은 김지우는 다음해 개막하는 휘트니 비엔날레를 떠올렸다.
휘트니 미술관으로부터 초청받기가 쉬운 일은 아니나, 활동을 재개하려는 백설기의 강력한 의지 표명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더욱이 다양한 작품으로 주목받았던 백설기가 러브콜을 보냈으니 휘트니 미술관도 분명 관심을 가질 터였다.
“그래. 오래 쉬었지.”
백설기를 높이 평가하던 김지우는 그녀의 복귀 소식이 반갑기 그지없었다.
마은찬과 함께한 화이트채플 프리미어 전시회는 모든 작품이 각기 다른 개성을 보여주었다.
단 두 사람이 꾸몄다고 하기에는 소재와 주제가 너무나 다양해서 항상 다음 발표작이 기대되는 미술가였다.
‘그러고 보니 마은찬은.’
유럽에서 활약하던 마은찬이 연인을 쫓아 한국에서 활동한 사실은 미술계에 몸담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일이었다.
백설기가 미국 진출을 노린다고 하니 마은찬이 어떻게 반응할지도 궁금했다.
입술을 쭉 내밀고 생각을 정리하던 차, 김지우의 눈에 백설기의 인터뷰가 들어왔다.
예술은 본인에게 가장 솔직한 행위라는 고훈의 말로 마음을 굳혔단 내용이었다.
친분이 있는 만큼 서로에게 영향을 주었을 테니 평소라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을 내용이었다.
그러나 최근 몇몇 사례와 겹쳐 보였다.
신원불명의 예술가 이클립스가 스스로 정체를 밝힌 일이라든가 앙리 마르소가 문화재를 반환하는 등 미술계의 크고 작은 일이 모두 고훈과 관련되어 있었다.
“…….”
고훈 평전을 준비하던 김지우는 일의 상관관계를 되짚었다.
앙리 마르소가 고훈에게 영향을 받은 사실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문화재 반환에 관련된 일이 아니더라도 앙리 마르소는 고훈의 색채감에 큰 영향을 받았고.
고훈 또한 앙리 마르소의 기발한 구도를 흡수했다.
그렇게 탄생한 <149,597,870.696㎞>와 <2년 8개월>는 지금도 21세기 최고의 합작품으로 사랑받고 있었다.
이클립스 비다 라바니 또한 고훈과 영향을 주고 받았다.
고훈이 몽마르트르구에서 여러 인종의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친 데에는 비다 라바니의 영향이 컸다.
고훈 스스로도 비다 라바니의 사연과 본인의 경험을 토대로 아이들이 차별 없이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한바 있었다.
또 그런 고훈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이클립스는 EIE 운동 당시 고훈의 <해바라기>를 재해석하며 활동을 시작했다.
“그래.”
평전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구도가 잡히기 시작했다.
“이제 좀 감이 오네.”
고훈의 삶과 작품 세계, 미술계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상세히 다뤘지만 김지우는 무엇인가 부족하단 생각을 해왔었다.
마지막 문구를 작성해 두고도 어떻게 마무리 지을지 알 수 없었거늘.
이제야 고훈의 가치관이 명확히 보이는 듯했다.
* * *
(전략)
EIE 운동과 해바라기 운동은 어떻게 범지구적 현상이 될 수 있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의 첫걸음을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WH배움 미술관에서 열렸던 고훈의 첫 개인전 ‘달콤한 행복’을 두고 방태호 당시 큐레이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번 전시회는 작품과 관람객의 만남을 아이가 편의점에서 과자를 고르는 상황에 빗대어 표현되었다.”
1,400만 달러에 낙찰된 <서리 밀밭>과 쇼콜라티즘이라는 신조어가 처음 등장한 만큼 언론과 평단은 흥행 자체에 주목했지만 사실 이 전시회의 의의는 화가 고훈이 본인의 예술관을 선보이고 그 토대를 다졌다는 데 있다.
개인 방송을 진행하던 중 미술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냐는 질문에 고훈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미술관에 가서 여유를 가지고 둘러보세요. 그러다 어느 순간 당신에게 다가오는 작품이 있을 거예요. 그 만남을 소중히 여기시면 돼요.”
“처음부터 다 알려고 하면 부담스러워요. 상대도 나도. 그러니까 얼굴도 익혀 나가면서 평범하게 대화해 보는 거예요. 그 작은 용기로 충분해요.”
고훈이 전한 메시지는 모든 이를 사랑하자는 박애주의와는 거리가 있다.
낯선 이를 향한 선입견을 잠시 내려두고 한 걸음 다가가 얼굴을 익히고 소소하게 대화를 나누자는 말이다.
그는 절절히 구애하지도 않았으며 강력히 주장하지도 않았다. 부담 없이 만나고 싶다는 입장을 넌지시 던질 뿐이었다.
그러한 자세 덕분에 고훈은 여러 사람과 쉽게 만날 수 있었고 영향을 주고받았다.
상대방을 선입견 없이 대하는 자세는 곧 상대의 본질을 마주하게 되는데.
미술계 탕아로 유명했던 앙리 마르소, 페르디난도 곤잘레스, 정체가 불명한 뱅크스, 무슬림이었던 비다 라바니, 고학생 마은찬, 무명 화가 백설기 등 동시대에 활동한 여러 미술가가 그와 유대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저마다 사회에 받아들여지지 못한 부분을 가졌던 이들이 고훈에게 친밀함을 느꼈듯.
EIE 운동과 해바라기 운동 또한 혐오와 경쟁에 지친 사회가 고훈의 포용적 자세에 반응했다고 볼 수 있다.
미술사가들은 현재 미술을 동시대 예술로 표현한다.
소통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새로운 실험을 시도하는 예술가들의 시대는 너무나 다양한 작품이 쏟아져, 하나의 사조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훈이 등장하면서 이러한 미술계에 변화가 생겨났다.
소통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예술가들은 자신을 지키면서 상대에게 다가갈 작은 용기를 얻었다.
최근 미술계가 주목하는 메시지는 힐링이다. 미술가 본인이 작품 활동을 통해 휴식을 추구하고 관객은 작품을 감상함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찾는다.
이러한 현상은 현대 미술을 바라보는 기존의 관점을 완전히 뒤엎었다.
박물관, 미술관, 갤러리를 찾는 방문객은 세계적으로 매년 증가하는 추세를 보인다.
미술가가 태도를 바꿨듯 관객 또한 낯선 작품을 대하는 일에 거부감이 줄었다는 방증이다.
미술계는 분명 변하고 있다.
새로운 감각을 제시했던 인상파와 권력으로부터의 자유를 제창했던 분리파가 활동했을 때처럼 쇼콜라티즘은 이전에는 없던 담론을 형성해 나가고 있다.
미술가와 관객 모두가 저마다 작은 용기, 사랑을 상징하는 해바라기를 심음으로써 그렇게 다시 황금의 시대가 찾아왔다.
김지우의 <고훈 평전>은 현재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미술가 고훈을 심도 있게 다뤘다는 점에서 화제가 되었다.
미술 애호가, 평단, 예술가들은 고훈을 가장 오랫동안 관찰해 온 김지우가 고훈을 어떻게 풀어낼지 기대를 모았고.
그를 증명하듯 출간과 동시에 절판.
증쇄가 확정되었다.
“이게 뭐예요?”
출판 기념식에 참석한 고훈이 책을 확인하곤 눈을 휘둥그레 떴다.
조부 고수열의 작품 <사랑6>이 표지로 사용된 탓이었다.
어릴 적 젓가락을 사용하는 데 익숙하지 않아서 얼굴에 춘장을 잔뜩 묻히고 짜장면을 먹던 순간을 표현한 그림이었다.
“표지가 왜 이러냐고요!”
고훈이 버럭 소리치자 기자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귀, 귀엽잖아. 내용이랑도 잘 연결되고.”
저자 김지우가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연결은 무슨 연결! 이거 할아버지가 허락하셨어요?”
고훈이 고수열을 보며 물었다.
본인의 그림이 손자를 다룬 첫 평전 표지로 사용되었단 사실에 흐뭇하던 고수열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손자가 이렇게 흥분한 모습은 어릴 적 이후로 처음이었다.
“크흠. 하, 할애비는 모르는 일이다.”
“누구예요!”
고훈이 추궁하자 김지우가 차마 대답은 못 하고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따라 옮기자 앙리 마르소가 한쪽 입술을 들어올린 채 <고훈 평전>을 살피고 있었다.
“앙리? 앙리가 왜? 저 인간이 무슨 권한이 있다고!”
“그…… 선생님이 마르소 씨한테 증여하셨잖아. 그러니까 사용권은 마르소 씨한테 있고. 그래서.”
김지우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했다.
“최소한 저한테 얘기는 했어야죠!”
“거, 검수해 달라고 했는데.”
김지우가 평전 검수를 의뢰하긴 했었다.
살아 있는 사람을 다룬 경우가 없었기에 출판사와 김지우 모두 고훈에게 확인받고자 했는데, 고훈은 본인에 대한 평을 스스로 검열할 순 없다고 생각해 거절했었다.
“자기 평전 검수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미안해…….”
책을 출판한 기념식에서 저자가 잔뜩 웅크리니 마음이 약해졌다.
그제야 카메라 셔터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주변 상황을 인지하기 시작한 고훈이 이마를 짚어 흥분을 가라앉히려 했다.
그러던 차 그의 인내심을 끊어내는 말이 들렸다.
“이거 도서관에 기부해.”
“도서관이라면 어떤 곳을 말씀하시는지.”
비서 아르센이 앙리의 지시를 확인하고자 되물었다.
“전부.”
“그리 하겠습니다.”
프랑스의 도서관은 공공시설만 5,000곳이 넘었다. 사립 도서관을 포함하면 몇 곳이나 있을지 감도 오지 않았다.1)
고훈이 고장 난 인형처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주변 사람들은 싸늘하고 희번덕거리는 시선으로 앙리 마르소를 노려보는 고훈과 거리를 두었고.
이내 그는 폭발하고 말았다.
“미술관 입구에 걸어놓은 걸로도 부족해? 이 미친 인간아!”
└아닠ㅋㅋㅋㅋㅋㅋ
└훈이 극대노ㅋㅋㅋㅋㅋ
└출판 기념식이잖앜ㅋㅋㅋ 다 보잖앜ㅋㅋㅋㅋ
└훈이 부끄러워하는 거 왤케 좋짘ㅋㅋㅋㅋ
└달려드니까 도망가네
└지도 지가 잘못한 줄 아는 거겠짘ㅋㅋㅋ
└예전이었으면 목덜미 잡고 들었을 텐데 이젠 피지컬에서 밀림ㅋㅋ
└어디 갘ㅋㅋㅋㅋ 네 평전 나온 날이야
└기자들 잠깐 멍 때리다가 쫓아가는 거 개웃김 ㅋㅋ
└수상할 정도로 훈이 놀리는 걸 잘하는 김앙리 씨.
└아빠가 되어서도 본 모습을 잃지 않는 일관된 남자.
└앙리도 앙린데 훈이 저럴 때마다 깜짝깜짝 놀람ㅋㅋㅋㅋ 저렇게 순한 애가 왜 앙리하고만 엮이면 저러짘ㅋㅋㅋ 심지어 생중계잖아.
└찐친이 진심으로 놀리면 못 참지.
└김지우 그 와중에 앙리랑 훈이 식장 빠져나가니까 손 흔들면서 사진 찍네ㅋㅋㅋㅋㅋ
└근데 책은 어떰?
└쉽게 읽히더라. 훈이 그림 소개하는데 연관된 자료 같이 보여줘서 이해하기 쉬움.
└훈이가 꽤 여러 사람한테 영향 받았더라. 반 고흐, 로트렉, 클림트, 마그리트, 고수열, 장미래, 앙리, 곤잘레스 등등.
└아니 근데 둘이 왜 안 돌아와?
└죽었나……?
└안 돌아오는 게 나을지도.
* * *
1)2005년 기준 4,319곳.
출처: 통계청, 「국민여가활동조사」, 문화체육관광부 OECD가입 국가별 공공도서관 비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