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외전 46화
Golden Age
7. 다시 황금의 시대로(11)
비다 라바니가 이클립스로서의 삶을 정리하고자 본인의 아지트를 찾았다.
컴퓨터와 카메라, 락카 스프레이를 포함한 화구를 정리하니 좁은 사무실이 넓게 느껴졌다.
지난 4년 동안 정이 든 곳이라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아니지.’
비다 라바니가 고개를 내저었다.
앞으로 수많은 시련이 닥칠 텐데 벌써부터 마음을 약하게 먹을 순 없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주어진 신분에서 벗어나서 이클립스란 가면을 썼지만 이제는 그저 미술가 비다 라바니로 살아가고 싶었다.
나로 존재하고 싶었다.
자신을 지키며 살아가는 길이 얼마나 혹독할지 짐작하면서도 기꺼이 그러기로 마음먹었다.
“왠일이야? 청소도 하고.”
사무실을 정리하던 차 익숙한 목소리가 비다 라바니를 불렀다.
“아.”
“지저분하긴 했지.”
비다 라바니의 멘토 뱅크스가 락카 스프레이를 담아놓은 박스에 손을 얹었다.
“아니면 이사라도 하나?”
“……네.”
“그래? 돈 좀 벌었나 보네. 저번 경매 덕분에?”
뱅크스가 락카 스프레이를 들고 살폈다. 태연한 척했으나 그는 비다 라바니에게 무슨 일이 있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프랑스로 돌아가려고요.”
뱅크스가 락카 스프레이를 내려놓고 돌아섰다.
“그런 일을 이사 준비하는 날에 들을 줄은 몰랐는데. 서운해.”
“오늘 밤에 말씀드리려 했어요.”
두 사람이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가면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어도, 비다 라바니는 뱅크스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뭐 어때.”
뱅크스가 어깨를 으쓱이곤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괜히 모니터를 훑는다든지 페인트붓을 살핀다든지 딴청을 부렸다.
“파리로?”
“네.”
“여기저기에 해바라기가 있어서 자리 찾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여기만 해도 그런데 거긴 더 할 거잖아?”
“벽에 그리는 건 이제 그만하려고요.”
“그럼?”
“……전시회 열 거예요.”
뱅크스가 비다 바라니를 향했다.
“쉽지 않을 텐데. 괜찮겠어?”
비다 라바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신분 보장해 주는 곳 찾는 게 쉽지 않은 건 알잖아. 믿을 만한 구석이라도 있어? 아, 쇼콜라티에 갤러리인가.”
“아니요.”
비다 라바니가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입을 열었다.
“제 이름으로 열려고 해요.”
순간 뱅크스의 가면에 금이 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하하하핫!”
뱅크스가 잠시 간격을 두고 크게 웃었다.
“좋은 시도였어. 한 방 먹었는데.”
“뱅크스.”
“그래. 이렇게 농담도 하니까 얼마나 좋아. 매사에 진지하기만 해서 걱정했다고.”
비다 라바니가 스승을 바라보다가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진심이에요.”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 때문에 더는 이 상황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를 정도로 멍청이로 보진 않았는데.”
“알고 있어요.”
“아니. 넌 조금도 몰라.”
뱅크스의 목소리가 다소 격해졌다.
“무슬림 비판하던 놈이 사실은 나도 무슬림이었다고 하면 누가 널 받아줄 것 같아?”
“…….”
“이클립스를 추종하는 사람들 중에 선한 사람만 있을 것 같아? 너한테 좋은 말 해준다고 착할 것 같냐고. 전혀. 무슬림이 미워서 좋아하는 사람이 절반은 될걸?”
“뱅크스!”
“들어!”
뱅크스가 일갈했다.
“무슬림이었으면서 무슬림 사회를 비판한다며 널 더 좋아하는 사람도 생기겠지. 그런 생각으로 용기를 낼 수도 있겠지.”
비다 라바니가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무슬림들은? 널 배신자로 낙인 찍고 가면 쓰기 전과는 비교도 못 할 만큼 못살게 굴 거야. 무슬림 혐오하는 놈들은? 네게 속았다고 생각할걸?”
“……알고 있어요.”
“아니.”
“전!”
“네가 왜 가면을 썼는지 생각해!”
두 사람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소중한 사람이 다칠까 무서워서 그랬던 거 아니야? 너 자신을 보호하려고 그랬던 거 아니냐고.”
예술적 시도를 위해 가면을 쓴 뱅크스와 달리, 비다 라바니는 오직 자신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 가면을 썼다.
작년에 출소한 삼촌 같은 극단주의자로부터 본인과 어머니 그리고 주변 사람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왜. 고훈이 자기 길 가니까 따라하고 싶어? 그렇게 살고 싶어?”
뱅크스의 말이 비다 라바니의 가슴에 꽂혔다.
“용기 가지는 거 좋아. 할 수 있다고 믿고 열심히 하는 것도 좋아. 하지만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 끝이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 하려는 건 미련한 짓이야.”
“…….”
“넌 고훈이 아니야.”
고훈처럼 될 수 없다는 말을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승에게 들어서 가슴이 아팠다.
“동경하겠지. 그럴 수밖에.”
뱅크스가 다시 타이르듯 말했다.
“나도 그 녀석의 해바라기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동해. 같이 해바라기도 그렸잖아.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영향을 주고 받는 건 당연한 일이야. 근데, 그 사람의 삶을 따라가는 일하고는 달라.”
뱅크스는 걱정되었다.
현재 활동 중인 예술가들은 알게 모르게 모두 고훈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었다.
얼어붙은 시대에 대화가 필요함을 전달하여 거대 담론을 형성했으니 오죽하면 해바라기의 시대라는 표현이 나왔을까.
뿌리 깊게 내린 미술계 부폐 세력을 상대로도, 거대 국가를 상대로도 끝끝내 황금빛 꽃을 피워낸 기적 같은 사람.
그런 고훈을 곁에 두고 있으니 동경할 수밖에 없고 그와 같이 되고 싶을 터.
또 그와 가까운 만큼 고훈이 해낸 일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망각해 버릴 터였다.
그렇기에 뱅크스는 잔인한 말을 꺼냈다.
그렇게라도 비다 라바니에게 앞으로 닥쳐 올 일이 얼마나 험난할지 알려주고 싶었다.
“훈이처럼이 아니에요.”
비다 라바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반박했다.
“저도 그러고 싶지만 안 된다는 거 알아요.”
비다 라바니의 목소리가 점차 격앙되었다.
“그냥 다른 사람들처럼 전시회도 열고, 누가 내 그림 보러 왔는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고 싶다고요.”
“…….”
“안 그러면 미칠 것 같은데, 무슨 일 생길지 다 아는데. 뱅크스가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해요.”
비다 라바니가 결국 눈물을 흘렸다. 아무리 훔쳐도 자꾸만 쏟아졌다.
어느 쪽도 말을 꺼내지 못하여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흐느끼는 소리만이 두 사람을 갈라놓으려 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비다 라바니는 무엇인가 테이블에 놓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고 이내 눈을 의심했다.
눈물을 너무 많이 흘려서 헛것을 봤다고 의심했다.
“…….”
두 사람을 막아서고 있던 가면이 테이블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오랫동안 함께했지만 낯선 남자가 유일하게 익숙한 눈동자로 자신을 응시했다.
“뱅크스?”
지독한 화상 자국.
오른쪽 얼굴을 덮은 상처는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었다.
“예전엔 꽤 잘생겼어.”
뱅크스가 입을 열었다.
“작업 반장이 자기가 할 일만 나한테 안 미뤘으면. 하필 전 날에 야근만 하지 않았으면 졸지도 않았겠지.”
뱅크스의 말은 드문드문 떨어져 있어서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일하던 와중에 사고를 겪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나름대로 잘 살고 있었는데 이렇게 되고 나니까 한순간에 달라지더라고. 차별하지 말자 떠들던 놈들은 다 어디 갔는지 슬금슬금 피해다니더라. 무슨 병균이라도 본 것처럼.”
“뱅크스.”
“난 믿지 않아. 사람은 언제든 잔인해질 수 있어. 나조차 그런데 다른 사람을 어떻게 믿어.”
“……난.”
“고훈과 앙리 마르소는 특별한 경우야. 솔직하게 살면서, 모든 걸 드러내놓고도 사랑받을 수 있으니 축복이지. 신의 축복이야.”
뱅크스가 다시 가면을 들었다.
“이카루스 신화 알아?”
태양을 동경해서 높이 날아오르다가 추락한 이였다.
태양이 되려 하지 말라고.
해바라기로 살라고 말하는 듯했다.
다시 시선을 마주하기를 얼마간.
뱅크스가 가면을 쓰려고 하자 비다 라바니가 그의 손을 저지했다.
“훈이처럼 되고 싶은 게 아니에요. 마르소 선생님은 더더욱이요.”
“…….”
“제가 동경하는 사람은 뱅크스 당신이에요.”
비다 라바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폭력에 굴하지 않고. 언제나 당당하고. 하고 싶은 말이라면 경매장에서 그림을 분쇄해서라도 전달하는 그런 당신이 되고 싶었어요.”
비다 라바니가 뱅크스의 가면을 대신 씌어주었다.
“그리고 지금은 뱅크스처럼 되는 게 무엇인지 알아요.”
“…….”
“가면을 쓰는 것도 거리로 나서는 것도 아니었어요. 자기 자신을 지키며 살아가는 게 당신이 내게 준 가르침이잖아요.”
“이클립스.”
“난 날 지킬 거예요. 비다 라바니를 지킬 거예요.”
뱅크스가 입을 악다물었다.
훌륭히 성장한 제자가 본인의 길을 찾아가겠다는 하는데 걱정된다고 싸고 돌 수만은 없었다.
화가 비다 라바니로 살아가기 위해 각오한 한 그를 막아설 명분은 어디에도 없었다.
뱅크스는 힘내라는 말, 안녕이라는 말 대신 본인이 쓰던 락카 스프레이를 꺼내 비다 라바니의 상자에 얹었다.
그러고는 밖으로 나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잿빛 하늘은 햇살이라고는 조금도 통과되지 않을 것처럼 뿌연데 버스와 택시, 사람들은 자기 갈 길을 가고 있었다.
거리마다 피어난 해바라기는 찬란히 빛났다.
폭력에 반대하고 자유를 사랑하고 사랑하자고 말하는 꽃이 이곳저곳에 피어 있으니.
그들이 스모그에 가린 태양을 대신해 세상을 비추는 것 같았다.
“후우.”
한숨을 길게 내쉰 뱅크스는 어쩌면 세상이 변할 수도 있다고 믿고 싶어졌다.
부디 달라진 세상에서 사랑하는 친구가 더는 힘들지 않기를 기도했다.
“저, 뱅크스. 이거 두고 가셨어요.”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며 비다 라바니가 락카 스프레이를 건넸다.
이별 선물로 준 스프레이를 두고 갔다는 말에 어이가 없었다.
“아, 설마 저 주신 거예요?”
“……그래.”
“짐 줄이고 싶은데. 필요한 색 있으시면 드리고 싶고.”
“…….”
“그보다 작업 안 할 때도 스프레이 가지고 다녔어요?”
뱅크스가 고개를 저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아! 이거 가져가세요! 뱅크스! 뱅크스!”
“닥쳐! 다 들리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