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외전 45화
Golden Age
7. 다시 황금의 시대로(10)
문화재 반환 관련 기사를 살피던 미셸 플라티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치 있는 문화재를 돌려줌으로써 잃는 것도 있으나, 앙리 마르소의 말대로 더 큰 것을 얻게 되었다.
유럽의 거대 박물관, 미술관은 대체로 합법적이지 못한 방법으로 입수한 문화예술품을 다수 소장하고 있었는데.
마르소 미술관만이 그 오명을 벗어낸 것이었다.
여러 매체에서 앙리 마르소의 결단을 높이 평가했으며, 그렇게 쌓인 이미지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 귀중했다.
“아빠 이거.”
“달라고?”
“이거 먹어.”
“싫다.”
“왜?”
“배부르니까.”
“왜?”
“아까 점심 먹었으니까.”
“왜?”
“점심 먹을 시간이었잖아.”
“왜?”
“안 먹으면 배고프지.”
“왜?”
“움직이려면 영양분이 필요하고 영양분을 섭취하는 방법이 식사니까. 식사를 안 하면 영양분이 부족해지고 몸에서 신호를 보내는 거야. 허기로.”
베르나데트가 아빠를 빤히 보자 앙리 마르소가 숨을 길게 내쉬고 신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왜?”
베르나데트가 또 한 번 물었다.
“안 그러면 죽어.”
“왜?”
“그렇게 생겨먹었어.”
“왜?”
미셸 플라티니가 고개를 돌렸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질문을 반복하는 딸과 하나하나 성실히 답해주는 남편을 보니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베르는 왜 그런 거 같아?”
미셸이 딸을 안으며 물었다.
“몰라.”
“모르면 어떻게 해야 할까?”
베르나데트는 멍하니 엄마를 바라보다가 몸을 틀었다.
정확히 알진 못했지만 본인에게 불리한 상황이라는 것을 느낀 탓이었다.
“엄마랑 같이 공부해 볼까?”
“싫어.”
“왜?”
“재미없어.”
“궁금해서 물어본 거 아니야?”
“아니야.”
“사실은 궁금하지?”
베르나데트가 엄마를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배가 왜 고픈지 알아볼까?”
“응.”
딸이 엄마에게 안기자 앙리 마르소가 눈매를 좁혔다.
다음부터는 본인도 딸이 스스로 고민할 수 있게 질문을 던져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내와 딸이 방을 옮긴 후 홀로 남은 앙리 마르소는 자연스레 작업실로 향했다.
“…….”
작업실 내부는 제법 서늘했다.
하루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냈기에 붓과 물감, 스케치로 어지럽던 장소가 모처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먼지 한 점 없이 관리된 작업실이 낯설게 느껴졌다.
베르나데트와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붓을 쥐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오직 미술로 가득했던 삶에 변화가 온 탓이었다.
이상했다.
매일 같이 울어대고 보채는 탓에 잠조차 제대로 이루지 못했는데, 나쁘지 않았다.
눈도 제대로 못 뜨던 녀석이 눈동자를 굴리는 모습이 왜 그리 신기하고 사랑스러운지 알 수 없었다.
열이 나 울 때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딸이 아프지 않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아내를 향한 마음과 예술적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벗을 향한 마음과는 또 달랐다.
본인을 중심으로 돌아가던 그의 세계가 베르나데트로 옮겨간 것 같았다.
평생을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지 탐구하던 그는 몹시 당황스러웠다.
붓을 쥔 시간보다 아이를 안고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매일 같이 찾던 작업실이 어색하게 느껴질 때 작은 의구심이 들었다.
나는 미술가로서 충실한가.
그 질문에 답을 내리지 못한 채 앙리 마르소는 팔레트와 붓을 챙겼다.
이젤을 덮은 천을 걷어내자 세 달 전에 그려둔 스케치가 드러났다.
그림 속 딸은 지금보다 머리카락이 짧았다. 걷는 시기가 느려 걱정했지만 지금은 제법 잘 뛰어다녔다.
앙리 마르소는 오래 전에 그려둔 스케치 위에 물감을 올렸다.
* *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붓을 내리니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미셸 플라티니였다.
“베르나데트는.”
“자. 책 읽어 달라 해놓고 읽어 주면 꼭 자더라.”
앙리 마르소가 고개를 돌렸다.
머리를 땋은 채 편한 옷을 입은 아내를 보니 문득 그녀가 고등학생일 적이 떠올랐다.
운동복을 입고 샌드백을 때리던 고릴라가 어느새 사랑하는 아내이자 딸의 어머니가 되어 있었다.
다소 지친 모습이 사랑스럽고 안타까웠다.
마르소 미술관 관장, 쇼콜라티에 갤러리 대표로 활동하면서 딸을 직접 돌보니 쉴 틈이 없을 터.
그 고단함과 보람은 함께한 부부만이 공감할 수 있었다.
“내일은 바람 좀 쐬고 와.”
“그럴까?”
미셸 플라니티는 외출에 큰 관심이 없는 듯했다. 오히려 남편의 그림에 흥미를 느끼는 것 같았다.
“변했다.”
“뭐가?”
“부드러워졌다고 해야 하나.”
미셸이 남편의 그림을 살폈다.
예전 그의 작품은 유독 선명했다.
완벽함에 집착했기에 극사실주의로 분류되는 미술가 중에서도 유독 선명한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베르나데트를 다루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그림이 뿌옇게 변했다.
즐겨 사용하던 찬란한 황금빛 대신 파스텔톤 노란색을 사용하게 되었고 고해상도 사진 같던 그림은 추억을 상기하는 듯했다.
미셸 플라티니는 세상을 날카롭고 이성적으로 바라보던 남편의 시선이 부드러워졌다고 생각했다.
“……그래?”
“응. 달라졌어.”
미셸이 의자를 빼내어 그 위에 앉았다.
“당신은 어떤데?”
앙리 마르소는 대답하지 않았다.
스스로 변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난 좋아.”
미셸이 말했다.
“먼지 하나 묻는 것도 싫어하면서 베르 기저귀는 군말없이 갈아준다든가.”
결벽증 때문에 항상 장갑을 끼고 다니던 남편이 엉덩이에 대변이 묻은 딸을 직접 씻길 때는 놀라 자빠질 뻔했다.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던 사람이 문화재를 돌려준다거나.”
한 사람의 힘으로 변할 만큼 사회는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말하던 그가 변화를 선도했다.
“지금이 더 멋져.”
미셸이 턱을 괸 채 남편을 바라보았다.
그 따듯한 미소를 마주한 앙리는 자신이 왜 달라졌는지 알 수 있었다.
혼자였던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을 지켜야만 했다.
거짓된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끊임없이 스스로를 단련했다. 더러운 것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야 했다.
본인의 상태를 냉철히 바라보고 한 치의 어긋남도 용납해서는 아니 되었다.
그런데 본인 외에 자신을 바라봐 주는 사람이 생겼다.
장모 셰리 가도와 딸 베르나데트 그리고 동료 고훈도 마찬가지였다.
앙리 마르소가 무슨 일을 해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따뜻한 시선 덕분에 그는 스스로 친 장벽을 허물 수 있었다.
“그래도 화가 앙리 마르소도 좋아하니까. 그림 그리고 싶을 땐 그렇게 해.”
미셸이 앙리의 뺨에 입을 맞추고는 일어섰다.
다시 홀로 남은 그는 딸을 담은 화폭을 바라보다가 다시 붓을 들었다.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 자신을 지키기 위한 투쟁.
언제나 처절하고 진지했던 그 행위가 즐거웠다.
‘이런 기분이었나.’
그는 그림 그리는 일이 즐겁다던 친구의 말을 떠올렸다
입가에 작은 미소가 어렸다.
* * *
[고훈, 노벨 평화상 후보로 거론되고 있어]
10일, 프랑스 일간지 르 피가로에서 미술가 고훈이 노벨 평화상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기사를 작성한 로맹 클리시 기자는 노벨상 위원회 관계자가 “전쟁 범죄자 볼로디치카 미틴에게 꽃과 수갑을 안겨준 사람이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되었다”고 전했다고 주장했다.
출처가 불명확하다는 비판이 따르고 있으나, 기사 내용이 사실이라면 올해 노벨 평화상은 고훈이 수상할 가능성이 높다.
미술가 고훈은 4년 전 EIE 운동에 영향력을 미치며 꾸준히 노벨 평화상 후보로 거론되었고, 모스크바 국제 아트페어에서의 대담한 행동으로 러시아 혁명의 방아쇠를 당겼다고 평가받고 있다.
“와.”
고훈이 노벨 평화상 후보로 거론되었다는 소식에 비다 라바니가 감탄했다.
“랑시, 이거 봤어?”
“뭘?”
사슴벌레에게 먹이를 주던 블랑쉬 파브르가 시큰둥하게 물었다.
“훈이가 노벨상 받을지도 모른대.”
생각지도 못한 기쁜 일이라 블랑쉬는 서둘러 먹이통을 닫고 고개를 돌렸다.
“가십이잖아.”
기사를 읽은 블랑쉬가 눈을 가늘게 떴다.
로맹 클리시란 기자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 정말 노벨상 위원회 관계자가 한 말인지 모든 게 불명확했다.
“진짜일 것 같은데. 진짜면 훈이한테 뭔가 얘기가 가지 않았을까?”
“사실이면 좋겠지만 이런 거 부담스러워하잖아. 직접 얘기하기 전에는 물어보지 마.”
블랑쉬의 말이 옳았기에 비다 라바니는 배시시 웃었다.
“왜 웃어?”
“똑똑해서. 예뻐서. 착해서.”
“뭐래.”
블랑쉬가 먹이통을 다시 열었다.
사슴벌레마다 좋아하는 과일이 달라서 바나나와 사과, 오이 등을 따로 줬기에 신경 쓸 일이 많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비다 라바니가 슬쩍 속내를 끄집어냈다.
“훈이 진짜 대단하지.”
“대단하지.”
“무서웠을 텐데 그래도 자기 지켜나가는 게 너무 멋있어.”
블랑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적부터 그는 누구를 상대하든 당당했다.
상냥하면서도 불의가 닥쳤을 땐 싸움을 피하지 않았다.
천재, 미녀 화가라는 이미지로 부담을 느끼고 학교에서 따돌림당하면서 타인을 점차 배척하던 그녀에게 앙리 마르소와 고훈은 그저 신기한 존재였다.
세상 모든 것을 따돌리는 듯한 앙리 마르소도, 세상 누구에게도 선뜻 손을 내미는 고훈도 모두 선망의 대상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진짜 강하다는 게 뭔지 알 것 같더라. 그래서…….”
말끝을 늘이는 게 심상치 않았다.
“뭔데.”
“이클립스 활동 그만하려고.”
“그만두면?”
비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신분을 드러내고 활동하겠단 말처럼 보였기에 블랑쉬의 얼굴이 걱정으로 물들었다.
“지금까지 지지해 주던 사람들이면 계속 응원해 줄 것 같기도 한데.”
비다가 블랑쉬의 걱정을 덜고자 긍정적인 말을 꺼냈으나 본인도 확신하진 못했다.
지금껏 이슬람 극단주의자와 혐오주의자를 강력히 비판해 온 이클립스지만, 그 정체가 무슬림이었단 사실만으로 공격받을 여지는 충분했다.
특히 잘못된 교리를 내려놓은 그에게 무슬림 사회가 무슨 짓을 할지는 아무도 몰랐다.
“무섭기도 해.”
“그런데 왜. 지금까지 잘해왔잖아.”
“더 숨고 싶지 않아서.”
비다가 블랑쉬의 손을 잡았다.
“훈이가 당당히 싸우는 것처럼. 마르소 선생님이 자기랑 프랑스를 지키는 것처럼. 네가 네 이름을 알리는 것처럼 나도 그러고 싶어.”
비다 라바니는 <르네상스> 이후로 자기만의 예술관을 정립해 나가는 블랑쉬 파브르를 자랑스레 여겼다.
또 내심 부러워했다.
언론이 덮어씌운 이미지를 스스로 깨나가는 연인을 동경하면서, 가면 뒤에 숨어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응원해 줄 거지?”
비다 라바니의 질문에 블랑쉬 파브르는 선뜻 답하지 못했다.
위험하다고 말리고 싶었지만 예술가로서의 의지를 꺾고 싶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자신이 인정받지 못했을 때, 이클립스로서 성공한 비다 라바니에게 느꼈던 거리감이 떠올랐다.
“이리 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기에 블랑쉬 파브르는 그저 연인을 꼭 안아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