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448화 (448/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외전 44화

Golden Age

7. 다시 황금의 시대로(9)

의자에 앉은 그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약간 들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빛이 그의 이마와 코 입술 턱을 따라 빛났고.

뺨과 목 아래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 모습이 너무나 고요해서 숨 쉬는 소리가 들릴까 조심하게 된다.

시선도 소리도 모두 그를 향해서.

다른 일은 의식 밖으로 멀어질 즈음 마침내 첫음이 울렸다.

바람에 이는 수풀처럼 이어지는 멜로디 사이마다 풀벌레가 찌르르 울었다.

피아노 소리가 고요히 내 가슴에 차올랐고 이내 달이 창백히 떠올랐다.

참방참방 물장구 치는 소리처럼 건반이 울린다.

가벼운 몸짓으로 이리저리 뛰는 소리가 아이 같다.

고요한 반주 사이마다 불규칙하게 뛰어드는 물 소리에 미소가 절로 나온다.

‘좋다.’

연주가 시작된 지 1분도 안 되었을 텐데 어느새 나는 한밤중 호숫가에서 노는 아이를 만났다.

차분했던 반주가 조금씩 생기를 띠기 시작한다.

그럴수록 참방이는 소리가 점차 시무룩해진다.

생기 넘치는 발재간으로 춤추던 아이는 때로는 걷고 또 때로는 가만히 서 있는다.

지쳤을까. 혹은 아쉬움일까.

아이의 마음을 짐작하고 있자니 고요했던 반주가 새싹처럼 돋았고.

발 소리가 다급해졌다.

찰박찰박 개울을 건너고는 순식간에 모습을 감춘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는 사이 아이가 떠난 호수 위로 빛이 쏟아졌다.

멀리 뻗은 오른손이 건반을 타고 내려올 때마다 햇살이 호수를 비추는 듯하다.

수면 아래까지 번지듯 스며든다.

사라졌던 아이가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었다.

거울처럼 달과 별을 담았던 호수는 이제 유리처럼 투명히 속을 드러냈다.

조약돌, 송사리, 물풀 그리고 다시 조약돌.

처음 보는 광경에 시선을 빼앗긴 아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어떤 별보다도 빛나는 이가 높이 서 있었다.

눈이 머는 것조차 모른 채 아이는 하염없이 그것을 올려다보았다.

마지막 음이 벅차오른 가슴에 닿는 순간 배도빈이 고개를 돌렸다.

짧은 영화를 본 기분이라 나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

대단하다. 놀랍다. 좋다.

그런 두루뭉술한 표현으로는 지금 내 감정을 표현할 수 없다. 그러한 말보다는 박수 소리가 마음과 가깝다.

“듣기만 했는데 보는 것 같았어요.”

“그래?”

그는 대수롭지 않은 듯 되물었다. 고작 88개의 건반으로 시각적 심상을 전하는 일을 당연하게 여기는 태도였다.

“님프 신화였죠?”

확인하고 싶어서 물으니 그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밤에만 연못에서 놀 수 있는 님프가 아폴로 신을 사랑하게 된 이야기요. 그러다 해바라기가 되었다는.”1)

배도빈이 피식 웃었다.

“아니에요?”

“그렇게 들었다면 그런 거지.”

배도빈이 커피 잔을 들었다.

“아니였어요?”

“연주가 끝나면 곡은 관객의 몫이야.”

예술가의 의도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관객에게 본인의 의도를 어떻게 전달할지 고민하는 사람의 말이고, 관객이 의도와는 다른 반응을 보이더라도 그것을 포용하는 이의 자세다.

배도빈이 커피를 마시고는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서로 같은 생각을 했다는 건 공연이 훌륭했단 뜻이고.”

역시 내 생각대로 님프 신화를 떠올리며 연주한 모양.

‘어떻게 된 사람이지.’

좋은 곡은 많지만 이 남자만큼 선명한 경우는 드물다.

관객이 어떻게 들었는지가 중요하다는 말이 인제 보니 반드시 본인의 심상을 주입하겠단 뜻이었다.

직원을 혹독하게 대해서 마왕이란 별명이 붙었다는 소문은 그의 연주를 직접 들어보지 못한 이들이 꺼낸 말이리라.

자신의 이야기로 관객을 끌어들이는 마성이야말로 그가 마왕으로 불리는 이유다.

“구체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니까요. 정말 멋진 색감이었어요.”

“내 연주가 색채감 있게 들렸다면 그건 네 덕이야. 내가 해바라기에서 곡을 떠올렸듯.”

배도빈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처음 방에 들어설 때도 커피향이 났는데 참 좋아하는 모양이다.

“생각, 관념에는 형체가 없으니 가장 익숙한 방식으로 표현하게 돼. 심상을 명확히 하려면 여러 감각을 함께 제시해야 하고. 형태라든가 색채 같은 시각적 이미지라든가.”

한 대의 피아노만으로도 이렇게나 선명한 이미지를 제시할 수 있으면서도 안주하지 않는다.

듣기로는 조향사를 섭외해 공연에 활용한 적도 있다고 하던데, 공감각을 어떻게 활용할지 많이 고민하는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금환은 좋은 작품이지. 재밌는 자극을 주거든. 자주 보지 못해 아쉬워.”

금환일식을 보고 작업한 <금환>을 언급할 줄은 몰랐다.

“앞으로도 기대할게.”

위대한 음악가이자 오만한 독재자가 꺼낸 말은 앙리의 자화상과 장미래의 꽃만큼 날 설레게 했다.

내 작품으로 곡을 썼다고.

그 곡을 들려주며 다음을 기대한다니 가슴이 터질 것 같아서 어떻게 화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당장에라도 붓을 들고 싶을 뿐이다.

“제목이 뭐예요? 방금 연주하신.”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정해지면 꼭 알려주세요.”

“초연 티켓도 함께 보내지.”

그가 눈썹을 살짝 들어올렸다.

“덕분에 더 멋진 해바라기를 그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럼 난 또 다른 곡을 쓰겠고.”

친분을 나눌 만한 시간도 없었거늘.

단 한 번의 연주로 오랜 세월 가까이 알고 지낸 사이처럼 느껴진다.

아마도 그가 <해바라기>를 통해 날 보고, 내가 그의 곡을 통해 그의 목소리를 들은 덕은 아닐까.

* * *

“올해는 기대해 봐도 되지 않을까요?”

문화재 환수 작업이 얼마나 진행되었는지 이야기 나눈 후에 저녁 식사 자리를 가졌다.

이런저런 주제로 대화를 나누다가 죠엘 웨인 부장이 오늘 아침에 난 기사를 언급했다.

내가 노벨 평화상에 노미네이트 되었다는 내용인데, 도대체 어떻게 알고 기사를 썼는지 모를 일이다.

“큰 기대 안 하고 있어요. 저뿐만이 아니라 다들 함께했잖아요.”

화제로 삼고 싶지 않아서 적당히 마무리하려 했지만 방태호가 초를 쳤다.

“어떤 기분인가요? 처음엔 거절하셨다고 들었는데.”

질문을 받은 배도빈이 입주변을 닦았다.

노벨상은 수상이 결정되고 일정 기간 안에 수락 강연을 해야 하는데, 배도빈은 기한이 일주일 남을 때까지 무시해서 논란이 된 적 있었다.

“그런 일에 관심 없어서요.”

배도빈이 날 보았다.

“너도 마찬가지인 것 같던데.”

“네. 부담되고.”

“이유는 다르지만.”

배도빈이 작게 웃었다.

당시 기사를 읽은 적 있는데, 누가 감히 날 판단하냐는 식으로 응답했던 것 같다.

“결국 수락하셨잖습니까.”

죠엘 웨인 부장이 나섰다.

나 또한 그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이유가 궁금하다.

“빌이 못 받은 상이니까.”

“빌?”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누군가 했더니 베를린 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였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애칭인 모양이다.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에서 매해 선출되는 상임지휘자 자리를 무려 60년 가까이 지킨 전설적인 인물이다.

배도빈의 스승이기도 하고.

“훈훈한 이유였네요.”

“훈훈?”

“스승이 못 받은 상을 제자가 받았으니까요. 자랑스러워하셨겠어요.”

배도빈이 눈매를 좁혔다.

죠엘 웨인 부장은 갑자기 입을 가리고 어깨를 들썩였다.

“놀려주고 싶었을 뿐이야.”

“…….”

“재밌었어.”

청출어람의 고사처럼 스승과 제자의 바람직한 일화라고 생각했는데, 단순히 골려주고 싶었단다.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으로 말이다.

역시 베를린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이해하기 힘들다.

“강연 준비는 어떻게 하셨어요?”

갑자기 정한 일이라 수락 강연은 어떻게 준비했는지 궁금하다.

“공연. 항상 하던 일이니 따로 준비할 필요도 없고.”

생각지 못한 방법이었다.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었다고 말하지만, 음악으로 받게 된 상이니 음악으로 보답하는 방법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관심 있는 거 보니 받을 생각이 있나 봐.”

“아.”

“괜찮겠지.”

10여 년 전만 해도 상 받는 일을 병적으로 싫어하던 배도빈이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실리가 나쁜 건만은 아니라는 말이야. 한 단체를 책임진 입장이라면 더더욱.”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요.”

배도빈이 작게 웃으며 고기를 썰었다. 예전에 봤을 때보다 좀 더 자주 웃는 느낌이다.

방태호가 손을 들어 종업원을 불렀다.

“네, 말씀하시지요.”

“추천해 주실 와인 있을까요?”

너무나 절묘한 타이밍이다.

그러지 않아도 가볍게 풍미만 즐기는 정도로 한잔하고 싶었는데, 말을 잘 꺼내 주었다.

“뷔르템베르크산 레드 와인이 어떠신가요.”

“좋네요. 괜찮으실까요?”

방태호가 배도빈과 죠엘 웨인 부장에게 의사를 물었다.

“와인은 됐습니다.”

“아, 술 안 하시는군요. 미처 몰랐습니다.”

“아뇨. 와인에는 그리 좋은 기억이 없어서. 오렌지 주스 한 잔 부탁하죠.”

와인에 안 좋은 기억이라도 있는지 배도빈은 주문을 달리 했고 죠엘 웨인 부장은 종업원이 추천한 와인을 마시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와인 감미료에 들어간 납 성분 때문에 몸이 망가졌다.

하지만 이제는 납 성분이 든 감미료를 넣을 필요 없으니 굳이 이 맛있는 걸 멀리할 이유도 없다.

그러기에 요즘 와인은 너무 맛있다.

* * *

[마르소 미술관, 문화재 107점 반환 완료]

어제, 마르소 미술관이 입수 경로가 모호한 문화재 및 불법 경로로 획득한 문화재 107점 전부를 원산국에 완전 반환했다.

총 9개국에 돌아간 문화재 중에는 베냉의 청동 유물, 중국의 청자, 레바논의 유리 장식 병 등이 포함되어 있다.

각국 대사관에서는 앙리 마르소의 결단에 감사를 표했다.

이날 반환식에 참석한 앙리 마르소는 “107점이나 되는 문화재의 공백이 크지 않겠냐”라는 질문에 “본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갔을 뿐”이라고 답하고는 “오늘은 잃은 날이 아니라 명예를 되찾은 날”이라고 덧붙였다.

└이왜진?

└잃은 날이 아니라 되찾은 날이래

└아니, 형 왜 이러세요.

└왜 갑자기 어른인 척?

└그만들 해 나쁜 놈들앜ㅋㅋㅋㅋ

└대단하다 진짜. 12만 점 중에 약탈품이 107점밖에 안 되는 것도 대단한데, 그걸 다 돌려준 것도 대단하네.

└훈이가 돌려받은 문화재가 100억 넘었으니 그 정도 되겠지?

└모르지?

└그걸 어떻게 비교하냐. 솔직히 저것들만 있어도 작은 박물관 하나 만들 정도인 게 중요하지.

└이 형 결혼하더니 노잼 됐어 ㅠ

└[링크] [앙리 마르소, 딸과 함께 쇼핑]

└베르나데트랑 커플룩 입고 쇼핑하는 거나 봐.

└아닠ㅋㅋㅋ 이제 포대기 안 해도 되잖아. 왜 굳이 안고 다니는 거얔ㅋㅋ

└내 딸이라도 저러고 다님.

└ㄹㅇ 베르 졸귀

* * *

1)그리스‧로마 신화에서 등장하는 해바라기가 된 님프 이야기와 <다시 태어난 반 고흐>에서 소개된 내용에는 차이가 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는 님프 자매가 등장하는데, 이들은 밤에만 연못 위에서 놀 수 있었다.

어느날 날이 밝을 때까지 논 님프 자매는 우연히 태양의 신 아폴로를 보게 되고 그에게 반해 매일 아침 연못 밖으로 나왔다.

그런 날이 이어지다가 님프 자매 중 언니는 아폴로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동생이 규율을 어기고 아침에 연못 밖에 나갔다는 누명을 씌우고 동생은 감옥에 갇히게 된다.

이후 언니는 아폴로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하지만 그녀가 동생을 가두었다는 사실을 안 아폴로는 연못을 찾지 않게 되었으며, 아폴로를 기다리던 언니는 해바라기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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