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외전 43화
Golden Age
7. 다시 황금의 시대로(8)
배움이라면 대한민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미술관이다.
특히 한국 전통 미술품 및 문화재는 국립중앙박물관 외에는 비견할 만한 곳이 거의 없을 거다.
그런 배움 미술관과 함께라니 방태호가 큰일을 해냈다.
“어, 어떻게요?”
놀라고 기쁜 나머지 말도 잘 나오지 않는다.
도빈 재단에 소속된 배움 미술관이 재정 문제를 겪을 리도 없을 테니 설득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재정 문제 겪는 미술관 우선 모집하기로 했잖아요. 혹시 예전에.”
7년 전 배움 미술관에서 수석 큐레이터로 재직했던 방태호가 뭔가 힘을 내준 건가 싶다.
그러지 않고서야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릴 리 없다.
“아니, 아니. 이런 일을 어떻게 인맥으로 해결하겠어.”
“그럼요?”
“여기저기 쫓아다니다 보니 배움 미술관 관장님께도 이야기가 들어갔나 봐.”
“설마 그쪽에서 먼저 제안했어요?”
“예전부터 진행하던 일이니 같이 해보자고 하시더라. 초기 투자금 50억 원.”
“정말요?”
너무 기뻐서 방태호의 손을 잡고 마구 휘둘렀다.
평소라면 진정하라고 했을 방태호도 신을 내자 멀뚱멀뚱 보고만 있던 차시현도 몸을 흔들었다.
“진짜 최고예요. 진짜.”
“하핫. 운이 좋았지.”
“운이 좋다는 말로는 설명이 안 돼요. 50억 원이나 투자받았잖아요.”
방태호가 목 근육을 풀며 입맛을 다셨다.
“50억 정도로 놀라면 섭하지. 첫 투자금일 뿐이야. 성과가 나면 얼마든지 늘지.”
소파 자리를 내주며 앉기를 권하니 방태호가 어깨를 으쓱이며 영웅담을 풀었다.
“사실 예전부터 해왔던 사업이야. 나 있을 때도 그랬고.”
그러니 사립 미술관 중 가장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을 거다.
“근데 너도 알다시피 소유주가 배도빈이잖아.”
베를린 필하모닉의 단장이자 지휘자 배도빈은 WH그룹의 최대주주이기도 하다.
WH 배움 미술관도 WH그룹에 속한 도빈재단에서 운영하니 배도빈 소유가 된다.
“네.”
“운영은 부모님께 맡겼거든.”
“유진희 화백.”
외부 활동을 잘 하지 않아서 국제무대에서는 잘 볼 수 없지만, 배도빈의 모친 유진희 화백은 미술계에 종사하는 사람 중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분이랑 배영준 교수. 고고학자라 유물 쪽으로는 빠삭하더라고.”
한쪽은 미술가 다른 한쪽은 고고학자니 배움 미술관이 어떻게 그 많은 유물과 문화재를 소장할 수 있었는지 알 것도 같다.
“직업이 그러시니 전부터 신경 쓰셨는데 이번에 러시아에서 문화재 반환받은 일을 좋게 보셨나 봐. 관장님께 도울 일 있으면 협조하라고 말씀하셨대.”
차시현이 양팔을 번쩍 들었다.
“다 네가 덕이야.”
방태호의 말에 가슴이 뛰었다.
많은 사람이 이득 보는 일이 없다고, 무모하다고, 보상금으로 또 같은 일을 하냐고 했지만.
결국에는 내가 한 일이 이렇게 돌아왔다.
배도빈에게 감사 인사라도 전해야겠다.
“인사라도 해야 할 텐데.”
예전에 <파우스트>를 작업할 때 받아둔 전화번호가 있는데 여전히 같은 번호를 쓸까 고민이다.
“그러지 않아도 직접 인사하려고 왔어. 모레 약속인데 갈래?”
전화로 인사하는 것보단 직접 찾아가는 게 바람직하다. 모레에는 강의도 없으니 다녀오는 게 좋겠다.
“네. 같이 가요.”
“나도! 나도 갈래!”
차시현이 불쑥 끼어들었다.
“나도 배도빈 보고 싶어. 아저씨, 저도 가면 안 돼요?”
세계적인 음악가란 수식어가 부족할 만큼 대단한 인물이니 보고 싶어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방태호는 난색을 표했다.
“일 때문에 만나는 자리니까.”
“아…….”
“다음에 기회가 있을 거야.”
“네.”
차시현이 볼을 부풀리고는 무릎을 끌어안았다.
아무래도 귀여운 척하는 병은 낫지 않을 듯싶다.
“그럼 모레 아침에 데리러 올게.”
“네. 그때 봐요.”
“안녕히 가세요.”
모레 아침 9시에 약속을 잡고 방태호를 서둘러 보냈다. 오랜만에 돌아 왔으니 한시라도 빨리 집에 가고 싶을 거다.
“나도 배도빈 보고 싶은데.”
“어쩔 수 없잖아.”
“친하잖아. 얘기해 주면 안 돼?”
“어……. 그다지?”
“왜? 파우스트 공연도 같이 준비했잖아.”
“그렇긴 한데 그 사람은 좀.”
“좀?”
“뭐라고 해야 하지.”
분명 친절한 사람인데 같이 있으면 묘한 위압감이 느껴진다.
“왜? 성격 나빠? 그러고 보니 베필 연주자들이 마왕이라고 부른대.”
“아니. 그런 건 아니야.”
소속 피아니스트의 엉덩이를 걷어차는 모습을 보긴 했지만, 악의를 담은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럼?”
“좀 다가가기 힘든 사람 있잖아. 그런 느낌이야.”
“마르소 아저씨 같은?”
“전혀 달라.”
앙리는 덩치 큰 앙칼진 고양이 느낌이고 배도빈은 자고 있는 사자 같다.
“밥이나 먹자.”
“얘기 좀 해줘.”
“나중에.”
자꾸만 데려가 달라는 차시현을 달래며 2층으로 내려가니 방태호가 할아버지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직 안 가셨어요?”
“선생님께도 말씀드려야지.”
“잘 됐더구나.”
“네.”
“좋은 소식 또 있어요. 훈이 노벨상 받을 것 같아요.”
차시현이 쓸데없는 말을 꺼냈다.
할아버지와 방태호도 뜬금없는지 눈만 깜빡인다.
“노벨 평화상에 노미네이트되었대요.”
“아니, 진짜야?”
방태호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별일 아니에요.”
“별일이잖아. 뭔데. 자세히 좀 말해 봐.”
“그래, 훈아. 그게 무슨 말이야.”
차시현을 노려보니 할아버지 뒤로 쏙 하고 숨었다. 받지도 못할 걸 이야기 꺼내서 사람 민망하게 만든다.
“노벨상 위원회에서 후보가 되었다고 연락했더라고요. 아마 안 될 거예요.”
“안 되는 건 또 무슨 말이고?”
“매년 그랬잖아요.”
EIE 운동 이후 매년 노벨 평화상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기대를 모은 만큼 실망도 많이 했다.
나뿐만 아니라 가족과 팬들도 실망시키니 처음부터 신경 쓰지 않는 게 속 편하다.
“올해는 다르지!”
방태호와 할아버지가 동시에 외쳤다.
“올해 네가 무슨 일을 했는데.”
“암! 내 새끼 말고 누가 받아!”
두 사람 다 너무 흥분했다.
“진정하세요. 어차피 안 된다니까요.”
“쓰읍!”
할아버지가 오랜만에 꾸중하셨다.
“이 녀석아, 말이 씨가 되는 법이야. 네가 안 받으면 누가 받아. 사람들 독려하고 탈출도 돕고 먹을 것도 나눠주고 할애비는 네가 재산 다 털어먹는 줄 알았다!”
“그래. 너 없었으면 혁명군 원조하는 결정이 훨씬 늦춰졌을 거야. 그게 얼마나 큰일인데.”
“저만 그랬나요. 다들 함께했잖아요. 우크라이나 사람이나 러시아 혁명군의 누가 받겠죠.”
“아이고. 누굴 닮아서 이렇게 꽉 막혔을꼬.”
“할아버지 닮았죠. 배고파요. 밥 먹어요. 아저씨도 예은이 보러 가셔야죠.”
“아니.”
“자자, 얘기는 나중에 해요.”
방태호를 내쫓다시피 보내고 돌아오니 할아버지가 또다시 캐물으셨다.
아무래도 저녁 먹다가 체할 것 같다.
* *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1가에 도착했다.
금색이 도드라진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홀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위용을 자랑했다.
“또 뵙네요. 고 작가님, 방 대표님.”
안면이 있는 사람이 마중을 나와주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사무국에서 근무하는 죠엘 웨인 부장이다.
“반가워요, 웨인 씨.”
“오시는 데 불편하신 점은 없으셨나요?”
“설마요.”
공항으로 리무진을 보내줘서 이보다 편할 수 없었다.
“다행이네요. 그럼 이쪽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죠엘 웨인 부장이 콘서트홀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었다.
배도빈의 집무실은 2동 건물에 있는데 콘서트홀을 가로질러서 갈 수 있다.
“렌탄도! 렌탄도! 작작 좀 해!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시정하겠습니다.”
“또 빨라져 봐. 손가락을 꺾어버릴 테니. 다시!”
연습실을 지나는데 험악한 대화가 들려 깜짝 놀랐다.
나와 방태호가 놀라서 멈칫하니 죠엘 웨인 부장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사이 좋죠?”
“네…….”
“싸우는 것처럼 보여도 퇴근해서는 가장 친한 사이예요.”
“아.”
몇 년 전 일이라 잊고 있었는데 참 터프한 사람들이다.
평소에는 격 없이 지내는 사이더라도 악기를 들면 한없이 엄격해지곤 했다.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이자 최고의 연주자라는 자부심은 저렇게 혹독한 연습 과정에서 생기는 것이리라.
똑똑-
단장실에 이르러 죠엘 웨인 부장이 문을 두드렸다.
“보스, 고훈 작가님과 방태호 대표님 모셨습니다.”
유럽에서 한국 이름 발음을 정확히 말하는 사람은 드문데, 이 사람은 한국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구사한다.
“모셔요.”
죠엘 웨인이 문을 열어주어 안으로 들어서니 깊고 신경질적인 눈매와 사자 갈기 같은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올해 30살 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다른 사람과 달리 묘한 위압감을 풍긴다.
“마에스트로.”
그가 씩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나누고는 자리를 잡고 앉자 그의 비서가 커피를 내주었다.
“오랜만이네.”
“그러게요. 4~5년 정도 된 것 같아요.”
<파우스트>를 작업한 지가 벌써 그 정도나 되었다니 시간 참 빠르다.
“방 대표님도 오랜만에 뵙습니다. 건강하시죠?”
“하하. 덕분에 우리 이사님께 면도 세웠습니다. 감사합니다.”
방태호가 문화재 환수 작업 이야기를 꺼냈다.
“아닙니다. 어머니, 아버지께서 늘 관심 가져오던 일이라 같은 생각 가진 사람들끼리 도와야죠.”
“하하하.”
방태호가 웃기만 할 뿐 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평소와 태도가 다른데 아마 어색하기도 하고, 일 이야기를 곧장 꺼내기엔 이르다고 판단한 듯싶다.
“대교향곡 좋았어요.”
배도빈이 고개를 돌렸다.
해바라기 운동을 응원하기 위해 베를린 필하모닉은 하루 동안 배도빈의 교향곡 <그랜드 심포니>을 무료로 풀었는데.
절망 끝에 다시 일어서서 광명을 찾아가는 서사성이 짙은 곡이었다.
악장이 진행될 때마다 가슴이 벅차오르다 못해 터질 것만 같은 폭력성은 왜 배도빈이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과 함께 엮여 소개되는지 알려주는 듯했다.
“처절하다고 해야 할지. 암울한 1악장에서 2악장으로 넘어가는 순간이 정말 멋졌어요.”
베를린 필하모닉의 <그랜드 심포니>로 힘을 얻은 건 나뿐만이 아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부흥 운동곡으로 선정했고 러시아 혁명군은 거리 시위를 할 때마다 <그랜드 심포니>를 틀었었다.
배도빈이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띠곤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당연한 일이라는 듯 여기는 저 오만한 모습은 앙리와 닮은 것 같기도 하다.
“그것뿐?”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어서 고개를 기울이니 배도빈이 소파에 등을 기댔다.
“난 거리마다 핀 해바라기를 보고 있자니 악상이 떠오르던데.”
여전히 이해할 수 없어서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데, 배도빈이 벌떡 일어나 피아노 앞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