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외전 42화
Golden Age
7. 다시 황금의 시대로(7)
“덕분에 PD님들은 좋아하더라고요. 하기 어려운 질문도 막 내뱉는다고. 그렇죠?”
우진이 동의를 구하자 담당 PD가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저거 봐요. 지가 물어보라 해놓고 모르는 척하잖아요? 이제 저는 나쁜 놈이 되고 저 인간은 국장님께 유능한 PD로 인정받겠죠.”
방청객과 고훈이 크게 웃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도 궁금합니다.”
분위기가 진정되자 우진이 거듭 물었다.
“정말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특히 모스크바 아트페어 일은 더더욱 그러했고요.”
고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이후에도 식량을 기부하셨고 본인을 대표하는 작품의 저작권까지 내놓으셨죠.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우진의 질문이 끝나자 촬영장이 고요해졌다.
모스크바 국제 아트페어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고훈에게는 수많은 위험이 따랐다.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를 도왔던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고훈은 우진과 방청객, 촬영진을 둘러보고는 작게 웃었다.
“글쎄요.”
“본인도 잘 모르겠단 말씀인가요?”
언제부터였을까.
적어도 이번 일이 계기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슬람 사회에서도 프랑스 사회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친구 비다 라바니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가난한 몽마르트르구 아이들의 삶을 본 뒤였을까.
페르디난도 곤잘레스를 동정해서였을지도 모르고 어렸을 적부터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겪은 개인적 경험 때문일지도 몰랐다.
기억을 더듬던 고훈은 이제는 아주 오래 전 일처럼 느껴지는 첫 번째 삶을 떠올렸다.
인정받지 못한 화가였던 시절을 넘어서, 목사 공부를 할 때에 이르렀다.
지주에게 수탈당하면서도 기어이 황금빛 밀밭을 가꾸는 농부와 혹독한 노동을 강요받으면서도 믿음을 잃지 않던 광부.
세상은 누구에게도 존경받지 못한 그들에 의해서 돌아가고 있었다.
그들을 기리자고.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그들을.
본인들조차 자신이 소중한 사람임을 알지 못하는 그들을 그리자고 마음먹은 날.
그는 화가가 되었다.
“화가라는 직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고훈이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그림 그리는 사람이죠. 그림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돈을 못 버는 사람은요?”
“이거 어렵네요.”
질문을 거듭하니 우진이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빈센트 반 고흐는 그림으로 생계를 이어가지 못했지만 화가라고 하잖아요?”
“그렇네요.”
“다른 기준도 있겠지만 전 그리고 싶은 게 있는 사람, 그걸 그리는 사람을 화가라고 생각해요.”
“근본적인 명제군요.”
“그렇죠.”
고훈이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청석에 앉은 이 모두 그가 무슨 이야기를 꺼낼지 기대하는 눈치였다.
“제가 그리고 싶은 것은 태양보다는 해바라기나 별, 황금보다는 밀밭, 소박한 식탁, 낡은 신발이었어요.”
완성보다는 결외된 무언가.
화려함보다는 삶이 묻어나오는 물건을 그렸다.
온종일 밭을 가느라 피부가 타고 주름이 진 농부를 그릴 때는 그와 함께했던 낡고 떨어진 신발을 그렸다.
“한으로 핀 꽃이 생각나네요.”
고훈의 말뜻을 이해한 우진이 고훈의 작품 중 하나를 언급했다.
수년 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참가한 고훈이 구석진 곳에 위치한 한국관을 알리고자 그린 작품이었다.
“네. 예외도 있지만 항상 상처받은 사람을 그렸어요. 아무리 힘들어도 꿋꿋하게 자신의 삶을 영위해 나가는 그들을 그리면서 용기를 얻었죠. 또 그런 제 그림을 보고 그들이 기뻐하길 바랐고요.”
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도 다르지 않았어요. 단지 그뿐이에요.”
거창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역사 속에 나오는 영웅들의 이야기처럼 숭고한 사명감으로 행한 일이 아니었다.
단지.
“그렇다면 이번 일은 화가 고훈이 화가로서 살기 위함이었군요.”
우진이 말을 정리하자 고훈이 빙그레 웃었다.
“사실 고훈 씨를 지켜보며 의아할 때도 있었습니다.”
고훈이 눈썹을 들며 의문을 표하자 우진이 깍지를 꼈다.
“외부로 비치는 이미지를 신경 쓸 수밖에 없는 입장인데,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일이 생길 때마다 망설이지 않더군요.”
“아.”
“물론 속으로는 고민했을지 모르죠. 방송에서도 그렇게 말씀하신 적 있고요.”
“네.”
“하지만 제 눈에는 그렇게 보였습니다. 왜 가진 것도 많은 사람이 왜 굳이 진흙탕에 뛰어들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대담해 보였고 무모해 보였습니다.”
이미 성공한 예술가가 자신에게 흠이 될지도 모르는 일에 뛰어드는지 알 수 없었다.
더 큰 무엇인가를 얻기 위함인가 고민했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도 컸다.
대중을 상대하는 직업을 가진 우진은 도무지 고훈을 이해할 수 없었다.
“더 이상했던 건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해냈으면 자랑스러워하고 뽐내고 싶을 만도 한데 그러지 않으셨죠. 마치 성인이라도 되는 것처럼요.”
“그럴 리가요.”
“정말 그렇게 보였어요.”
고훈은 민망해서 웃었고 우진은 그를 따라 웃었다.
“그런데 이제는 좀 알 것 같습니다.”
우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리고 싶은 것을 계속 그려나가기 위해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그랬던 거군요.”
고훈이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대답하실지 궁금했는데 그 어떤 대답보다 납득되네요.”
“자기를 지키는 일이 가장 중요하니까요.”
“오히려 본인을 지키는 일이었다. 정말 멋집니다.”
우진이 카메라를 보았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잠시 후 2부에서는 고훈 작가의 작품을 주제로 이야기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 * *
방송을 마치고 귀가하니 할아버지가 정원을 서성이고 계셨다.
“할아버지.”
“왔니.”
“기다리고 계셨어요?”
“아니. 기다리긴. 잠이 잘 안 와서 바람 좀 쐬고 있었지. 들어가자.”
아무래도 날 걱정하셔서 기다리신 듯하다.
다른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과 달리 할아버지는 줄곧 내게 그런 티를 내지 않으셨는데.
아마도 당신의 걱정스러운 말이 나를 더 불안하게 한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이다.
“러시아 혁명군이 모스크바를 탈환했대요.”
“들었다. 희생이 많았다더구나.”
볼로디치카 미틴의 건강이 악화됨에 따라 러시아 독재 정부는 크게 흔들렸다.
독재자가 병상에 누웠으니 국제 사회의 제재와 그들로부터 원조받아 불어나는 혁명군을 감당하기 어려웠을 터다.
결국 내부에서 항복하는 사람이 늘어났고 비교적 수월하게 수도를 탈환했는데.
그 과정에서 수만 명이 다치고 사망하고 말았다.
“이제 좀 괜찮아질까요?”
“쉽지 않을 거다.”
할아버지가 1층 거실 소파에 앉으며 말씀하셨다.
“러시아 경제가 회생하기 힘들단 얘기가 많더구나.”
볼로디치카 미틴이 일으킨 침략 전쟁은 러시아에게도 큰 피해를 안겼다고 한다.1)
기반 산업은 무너지고 생산 인구는 감소했으며 무리하게 돈을 찍어댄 탓에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일어났다고 들었다.
아사자가 수십만 명에 이른다고 하니 그 피해 규모를 좀처럼 가늠할 수 없다.
“게다가 독재 정부를 물러나게 했으니 이제는 다른 걸 걱정해야겠지.”
“다른 거요?”
“전쟁 배상금도 줘야 할 테고 또 혁명 과정에서 도움을 받았으니 그들 말을 무시할 수 없지.”
“아.”
러시아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 중 서방 세계의 지원을 빼놓을 순 없다.
“국제 사회에서 한 나라의 입장은 선과 악으로 정해지는 게 아니야. 분명 들인 것 이상으로 얻어내려 할 테지. 비록 그 사람들이 한 일은 아니더라도 전범국이니 말이다.”
할아버지 말씀을 듣고 보니 독재자를 몰아낸 것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러시아는 이제 독재 정부가 남긴 수많은 부작용을 감당해야 한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볼로디치카 미틴의 가장 큰 죄악일지도 모른다.
“또 독재 정권에 부역한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단다.”
“그건 무슨 말씀이세요?”
“혁명 정부에게 심판받지 않으려면 무슨 짓인들 못 하겠니. 미국의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어떻게든 버티려 하겠지.”
할아버지가 소파에 등을 파묻고 고개를 들었다.
옛일을 생각하시는 듯 보인다.
“어찌 시간이 흘러도 사람은 변하지 않는지.”
할아버지의 말씀이 왠지 모르게 한숨처럼 들렸다.
“미틴 같은 인간이 항상 있었듯이 훌륭한 사람도 항상 있었어요.”
할아버지가 자세를 고쳐 앉으시고는 작게 미소 지었다.
“그 말도 맞다.”
* * *
이틀 뒤.
도주 중이었던 볼로디치카 미틴이 혁명군에 사로잡혔단 뉴스가 보도되었다.
많은 사람의 기대와 예상과 달리 혁명군은 그를 곧장 사형하지 않았다.
대신 볼로디치카 미틴을 48가지 혐의로 고발하여 러시아 법원에서 심판받도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아아아아.”
차시현이 침대에 엎어져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다가 얼굴을 파묻은 채 말했다.
“다행이다.”
“그러게.”
러시아 독재 정부와 그 일당이 소탕되었으니 적어도 방사성 물질이 든 녹차를 마실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다.
차시현이 고개를 들었다.
“이제 괜찮겠지?”
“응. 세르비스 씨가 이제 안심해도 괜찮대.”
한 달 전 프랑스 국방보안국(DPSD)에서 날 보호해 주겠다며 사람을 보내왔다.
그 책임자가 세르비스였는데 그가 직접 꺼낸 말이니 믿어도 괜찮을 듯싶다.
당분간 경호를 유지하고 차츰 강도를 낮추겠다고 해서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진짜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더라. 어디 마음대로 가지도 못하고 먹는 것도 다 검수하고.”
고작 5~6주뿐이었는데 참 길게 느껴졌다.
“근데 뭐 보고 있어?”
“성 과장님이 일정 보내줘서.”
“봐도 돼?”
자리를 비켜주자 차시현이 모니터 앞으로 와 일정표를 살폈다.
“우크라이나 가?”
“인사하고 싶대서.”
“노벨상?”
차시현이 목소리를 한껏 높여 말했다.
“노벨상 받아? 평화상? 어?”
“아니. 노미네이트.”
“후보로 거론되었다는 거면 거의 확정 아니야?”
“그렇지도 않더라. 3년 전인가부터 매년 왔었어.”
“어?”
잘은 모르지만 노벨상 위원회는 매년 각 분야의 지식인들에게 추천인을 요구한다고 한다.
그렇게 가장 많이 추천받은 사람이 노벨상 후보가 된다고 하는데 그리 큰 기대는 안 한다.2)
“EIE 운동 이후로 계속 추천해 주시는 분들이 계신가 봐. 이번에도 그냥 넘어갈 거야.”
“이번에는 다르지! 소감은? 강의는 준비했어? 수상하면 강의해야 하잖아.”
“안 된다니까.”
“된다니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야. 노벨상 받은 사람들 평균연령이 70세 정도 된대. 나 말고도 받을 사람 많은데 그럴 리가 없잖아.”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무조건 받는다니까?”
“그건 네가 내 친구라서 그렇게 생각해 주는 거지.”
“아, 답답해.”
가능성이 없는 일에 억지 부리는 모습을 보니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날 그만큼 좋아하고 아낀다는 뜻이니까.
“훈아! 훈아!”
몸을 비트는 차시현을 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던 차, 방태호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아저씨?”
한국에 있을 방태호가 갑자기 나타나서 깜짝 놀랐다.
“무슨 일이에요? 파리엔 언제 왔어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뛰어 왔는지 숨을 헐떡이던 방태호가 마른침을 삼키고 말했다.
“배움 미술관이 협조하겠대.”
“뭘요?”
“문화재 환수 작업. 가상 전시도.”
* * *
1)식량 및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전 세계에 피해를 입혔다.
2)노벨상 시상일은 매년 12월 10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