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445화 (445/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외전 41화

Golden Age

7. 다시 황금의 시대로(6)

“해바라기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위협받고 있단 소문이 사실입니까?”

“현재 심경이 어떠신가요!”

“팬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기자들이 고훈에게 달려들어 질문을 쏟아냈다.

미술계는 자국민마저 탄압하는 데 이른 러시아 독재 정부를 통렬히 비판한 고훈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었다.

“3년 전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학살의 순간에도 용기를 잃지 않고 싸웠습니다.”

고훈이 입을 열었다.

“지금 러시아 사람들은 독재 정부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거리로 나서고 있습니다.”

고훈이 기자들을 둘러보았다.

“그분들에 비할 바는 아니나 저도 제 나름대로 싸우는 중입니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한 일이니 걱정보다는 응원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제게도. 그들에게도요.”

한 기자가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세계 미술 진흥 협회에서 예술가 모임을 주최했습니다. 논제가 무엇인가요?”

“힘을 모아서 전범을 규탄하고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모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두 분 작가님 모두 참가하시는 건가요?”

기자가 고훈과 앙리 마르소를 번갈아보며 물었다.

앙리 마르소는 기자를 무시했고 고훈은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세계 예술 진흥 협회가 정치 단체로 변질되는 건 아니냐는 우려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또 다른 기자가 물었다.

전 세계 미술인을 대표하는 세계 예술 진흥 협회(WAPA)가 정치적 목적을 띠게 되면 자칫 위험해질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웃기지 마.”

고훈이 막 입을 열려던 차 앙리 마르소가 선수를 쳤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누구든 다 정치적 속성을 띨 수밖에 없어.”

앙리 마르소가 질문한 기자를 노려보았다.

“네가 지금 말 같지도 않은 질문을 꺼낸 것도 정치적이지. 자기 생각을 말하는 것 자체가 정치라고. 알아들어?”

앙리 마르소는 기자가 어떤 의도로 질문을 했는지 뻔히 보였다.

예술은 순수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이, 고훈을 시기하는 사람, 혹은 그에게 너무나 큰 힘이 실리는 것을 경계하는 자 모두 자신의 의견을 내놓기 힘들었다.

현재로서는 고훈이 워낙 많은 사람에게 호응받고 있기에 숨어서 기회만 노릴 뿐이었다.

기자는 그들이 묻고 싶은 말을 대신 꺼냄으로써 시청률과 조회 수를 챙기려고 하는 것이었다.

구토감이 올라왔다.

“예술은 자기를 표현하는 일이에요.”

고훈이 기자에게 말했다.

“본인과 타인을 속여서는 결코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없죠. 그래서 가장 솔직한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그리고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일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행동이고요.”

웃고 있었으나 태도만은 단호했다.

“저와 생각이 다를 순 있어요. 반대할 수도 있습니다. 누가 옳은지 토론하면 더욱 좋겠죠. 하지만 제 입을 막으려고 하진 마세요. 그것은 러시아의 독재자가 하는 일과 다를 바 없습니다.”

고훈은 목소리를 높이는 일 없이 평소와 같은 부드러운 말투로 입장을 전했다.

“칠흑같은 밤입니다. 눈을 떠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죠. 어쩌면 밤이 계속될지도 모른단 불안이 가장 두려우실 겁니다.”

러시아에서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이들에게 전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어두운 밤이라도 끝이 있고 태양은 반드시 떠오릅니다.”1)

고훈은 믿었다.

밤새 이슬을 머금고 고개 숙인 해바라기가 아침이 되면 다시금 꽃잎을 활짝 펼치듯.

용기를 잃지 않는다면 반드시 해가 떠오르리라 믿었다.

“용기를 잃지 마세요. 함께하겠습니다.”

* * *

한 미술가의 영향력은 본인의 예상과 사회적 인식을 훨씬 웃돌았다.

전 세계로 번진 해바라기 운동은 각국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고 러시아를 해방해야 한다는 큰 담론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동안 독재 정부를 견제하기 위해 제재에 제재를 더하던 방식에서, 러시아 혁명군을 원조하는 방향이 고려되었다.

러시아 내부에서도 큰 변화가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철저한 탄압으로 정보 통제가 이루어져 혁명이 일어나고 있는지조차 몰랐던 러시아인들에게 외부 정보가 조금씩 흘러들어갔다.

본인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 자유를 지키기 위해 거리로 나섰고, 무자비하게 학살당하는 모습에 러시아 국민들의 분노가 마침내 극에 달했다.

경제적 고난으로 아사자가 수십만에 이르러 폭발 직전이었던 국민 여론은 해바라기를 들고 쓰러져가는 이웃의 희생으로 점화되었고.

혁명은 마침내 전국적 봉기로 확산되었다.

“안녕하십니까, 시청자 여러분. 우진입니다.”

사회자 우진이 시청자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어제였죠. 혁명군이 모스크바를 탈환했고 볼로디치카 미틴이 도주했단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서방 세계의 원조를 받은 러시아 혁명군이 모스크바를 탈환한 소식에 전 세계가 환호했다.

국제적으로도 자국 내에서도 힘을 잃는 독재 정부에 복역하는 이들은 날이 갈수록 줄어들었고.

볼로디치카 미틴은 소수의 추종자와 함께 도주했으나 그가 발붙일 곳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오늘은 해바라기 운동의 주역 고훈 작가를 모시고 관련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고훈이 우진과 악수를 나누었다.

“그간 고생이 심하셨을 텐데 어떻게 지내셨나요?”

“WAPA를 통해서 망명을 도와달라는 요청이 많이 들어왔어요.”

“러시아 미술가들이겠군요.”

“네. 그분들이 파리에 정착할 수 있도록 손을 보탰고 또 식량 문제가 심각하다고 들어서 조금이나마 나누었습니다.”

“대단하시네요.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돈이 드는 일인 건 사실이니까요.”

“후원금이 많이 들어왔어요. 정말 많이요. 모두가 함께한 일이라서 저만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게 민망하네요.”

“그분들이 용기를 내도록 도우셨으니까요.”

우진이 자세를 고쳐 잡았다.

“사실 처음에는 회의적인 반응도 있었어요. 그림 한 장으로 뭐가 바뀌겠냐는 식으로 비꼬는 사람도 있었고요. 혹시 들어보신 적 있나요?”

“그럼요.”

“1세기 전 세계대전 당시 예술가들이 무력함을 느꼈잖아요. 그래서 예술사조 자체가 바뀔 정도였으니까요.”

“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죠. 해바라기, 아니, 고훈 씨의 영향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무엇이 달랐나요?”

“음.”

고훈이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삶을 대하는 방식의 차이 같아요.”

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했다.

“말씀하신 경우도 분명 있었어요. 정확히 말하면 환멸이었죠. 인간의 이성을 중시하며 새로운 시대를 눈앞에 두었는데 그 결과가 제1차 세계대전이었으니까요.”

다다이즘의 시작이었다.

“그분들은 기존에 쌓아왔던 이성이라든가, 전통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처럼 느껴졌을 거예요. 현실의 가혹함을 이겨낼 수 없으니 자조적이고 자기파괴적으로 흘러갔던 거죠.”

“교수님이라 그런지 갑자기 강의 시간이 된 것 같네요.”

우진이 잠시 분위기를 풀었다.

고훈도 작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다른 경우도 있었어요. 가장 대표적으로는 피카소가 있었죠.”

“게르니카와 한국에서의 학살이 있죠.”

우진이 정답을 말하자 고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음악과 미술을 다룬 지 30년이에요. 이 정도는 알죠.”

“네.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자조적이고 파괴적으로 흘러간 분들이 있는가 하면, 스페인 내전에서의 참상을 고발하고 6‧25 당시 학살을 담아낸 예술가도 있었죠.”

“그것이 삶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에서 나왔단 말씀이군요.”

“맞아요.”

고훈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어느 쪽이 옳은지는 모르겠어요. 다만 저는 문제의식을 갖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쪽에 마음이 가더라고요.”

“사실 지칠 때도 있잖습니까. 사람이니까. 특히나 요새는 어딜 가든 다 싸우는 이야기뿐이니까요.”

“그렇죠.”

고훈이 씁쓸하게 웃었다.

“거기에 관해서 크게 영향 받은 책이 있어요. 자유론이라고 존 스튜어트 밀이 쓴 책인데요.”

“제목만 들어도 어려울 것 같네요.”

“하하. 좀 복잡하긴 해요.”

“저를 이해시킬 정도로 쉽게 풀어내시면 시청자들도 이해하실 겁니다.”

“노력해 볼게요.”

두 사람이 작게 웃었다.

“이런 문제예요. 나의 정의와 타인의 정의가 서로 정당할 때. 그럼에도 충돌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럴 때가 있죠. 내 말이 맞는데 상대방 말도 틀린 건 아닌 상황.”

“네. 존 스튜어트 밀은 그런 상황에서 상대방과 충분히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고 했어요.”

“음. 잘 이해가 안 되네요.”

“결국에는 가치 판단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입장이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결론이 나지 않는단 말이에요. 어느 한쪽의 말을 들으면 다른 한쪽의 자유가 사라지게 되니까.”

“그럼 안 되죠.”

“네. 그래서 애초에 두 주장이 맞부딪칠 때는 힘이 센 사람 쪽으로 무게추가 움직이게 돼요.”

“자유론이란 제목치고는 명확한 답을 내놓은 것 같진 않군요.”

“맞아요. 본인도 자기 주장이 추상적이라고 인정했어요. 다만 제가 깊이 공감했던 내용은 합의를 볼 수 없음에도 대화를 나눠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대화를 나눈다.”

“네. 우리는 누구도 완벽한 판단을 할 수 없어요. 감정을 내려놓고 논리적으로 접근해도 말이죠.”

“과학조차 사실로 받아들여졌던 게 달라지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그렇죠. 그렇게 불완전한 존재인 우리는 완벽한 답을 내놓을 수 없으니, 대화해서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거예요.”

“이제 좀 감이 오네요. 완벽할 순 없지만 완벽을 향해 갈 수 있는 방법은 대화뿐이란 말이군요.”

“책 한 권 다 읽으셨네요.”

우진이 어깨를 으쓱였다.

“너무 힘드니까. 현실이 받쳐주지 않으니까. 이루어질 수 없으니까. 지쳐서 포기하고 싶어질 때가 있어요. 저도 그럴 때가 있고요.”

“고훈 씨 같은 분도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나 보군요.”

“그럼요. 저도 사람인데요.”

고훈이 숨을 짧게 내쉬었다.

“그럴 때는 잠시 쉬고 걸어온 길도 돌아보고 그러면서 다시 일어날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으니까.”

“노력하란 말씀이군요.”

“노력. 노력. 잘 모르겠어요. 노력이란 단어보다는 지금보다 좀 더 나아지고 싶은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우진이 눈을 깜빡이자 고훈이 웃었다.

“같은 뜻일지도 모르겠네요.”

“무슨 말씀인지 알 것 같습니다. 현실과 한계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 최선의 결과를 내고자 하는 발버둥. 그런 느낌인가요?”

“정확해요. 요약 잘하시네요.”

“밥 벌어먹으려면 이 정도는 해야죠.”

우진이 너스레를 떨었다.

“말씀하신 걸 정리하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데. 그런 것치고는 반응이 대단했습니다. 거리에 나가면 지금도 해바라기가 걸려 있던데, 솔직히 저작권 사용료 생각은 나지 않던가요?”

“이렇게 능력 있으신데 악플 많이 달리는 이유를 알 것 같아요.”

우진의 짓궂은 질문에 고훈이 일침을 가했다.

* * *

1)가장 어두운 밤도 언젠간 끝나고 해는 떠오를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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