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443화 (443/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외전 39화

Golden Age

7. 다시 황금의 시대로(4)

“으으.”

비다가 배를 움켜쥐고 엄살을 피우자 블랑쉬가 놀라서 괜찮냐고 물었다.

사이 좋은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제목이 뭐야?”

“응?”

“드라마.”

“다가오지 마세요. 이한나 작가님 소설 원작인데 몰랐어?”

“아.”

왠지 익숙한 설정이라고 생각했는데 몇 년 전에 읽었던 소설 <다가오지 마세요>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가 방영된 모양이다.

“드라마 나왔어?”

“응. 4화까지.”

<델프트의 여인> 이후로 줄곧 정신이 없다 보니 드라마로 나온 줄도 몰랐었다.

이번 일이 끝나면 한 번에 몰아서 봐야겠다.

“볼 시간도 없었나 봐.”

“이래저래.”

“요새도 계속 바빠?”

“응. 참, 부탁할 일이 있는데.”

비다와 블랑쉬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인지 들어보지도 않았으면서 들어준다니 또 웃음이 나왔다.

“이 영상을 되도록 많은 곳에 올리려고 해.”

두 사람에게 우크라이나 부흥 운동과 러시아 시위 현장 동영상을 보여주었다.

“……말도 안 돼.”

비다 라바니는 주먹을 꽉 쥐었고 블랑쉬는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 분노했다.

“최대한 많은 사람이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이리저리 알아보고 있는데 나 혼자 힘으로는 무리겠더라고.”

“언론에 제보하는 건 어때? 요새 뉴스는 전부 이 이야기더라.”

비다 라바니가 제안했다.

“그것도 계획에 있어. 근데 아무래도 그것만으로는 미틴 정부에 압박이 안 될 것 같아. 시위하는 사람들에게 전달되기도 힘들 것 같고.”

“하긴. 언론 통제가 심해서 외부 소식이 잘 안 들어가는 것 같더라. 이 영상은 어떻게 구했어?”

이쪽에서도 러시아 소식을 듣기 힘들지만, 러시아 사람들도 외부 소식을 듣기 힘들다.

“알렉스 구독자 중에 러시아 사람이 있었어. 그 사람이 보내줬대.”

알렉스는 시위대가 러시아 내부 사정을 외부에 알리고자 필사적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최대한 많은 곳에 알리고 싶어. 그럼 러시아 내부에도 소식이 들어갈 테고 시위가 이뤄지고 있다는 것도 알려질 테니까.”

러시아 독재 정부가 아직까지 힘을 발휘하는 이유는 정보가 통제되는 데 있다.

방송 매체나 인터넷이 철저히 검열되는 탓에 스타링크 같은 개인 통신망이 없는 사람들은 독재 정부가 제공하는 소식밖에 접하지 못하고.

혁명 시위가 일어나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그럼.”

“응. 아무리 검열을 해도 숫자로 밀어붙이면 한계가 있을 거야.”

“특정 단어를 차단할 수도 있을 텐데.”

비다가 우려를 표했다.

SNS에서 이클립스로 활동을 하면서 그러한 검열 방식을 많이 접한 듯하다.

“양이 압도적으로 많으면 가능성이 있을 거야.”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비다가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비효율적이라도 반드시 해야 한다고 생각해. 숨어서 때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을 테고, 무서워서 차마 못 나서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자기 편이 있다는 사실만 전해져도 분명 큰 힘이 될 거야.”

비다 라바니와 블랑쉬 파브르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럼 뭘 하면 돼?”

“모레 내 뉴튜브 채널하고 알렉스 채널에 이 영상이 올라갈 거야. 각국 방송국에도 보낼 거고 타임스퀘어 같은 랜드마크 옥외 광고판에도 게시할 거고.”

“응.”

광고를 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었다.

앙리의 말대로 나 혼자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것은 오만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비다와 블랑쉬에게 모레 뉴튜브에 업로드할 영상을 보여주었다.

“내일 이 영상 뒤에 이클립스와 뱅크스를 지목할 거야. 함께해 달라고.”

“챌린지 같은 느낌이네?”

“응. 대신 제목하고 태그는 최대한 겹치지 않게 해줘. 네가 말한 대로 특정 단어가 차단되면 의미가 없어지니까.”

무슨 무슨 챌린지라고 태그를 붙인다면 편하겠지만 그렇게 되면 러시아 독재 정부의 수고를 덜어줄 뿐이다.

나 혼자서 여러 키워드를 생각하려면 한계가 있겠지만, 여러 언어로 각기 다른 단어를 사용한다면 분명 효과가 있을 거다.

시선을 옮겨 블랑쉬를 보았다.

“블랑쉬한테도 부탁하고 싶어. 다만 조금 뒤에.”

“왜?”

“위험하니까. 익명으로 활동하는 작가들로 수를 늘리면서 러시아가 대응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를 때 부탁하고 싶어.”

사람들이 모이면 두려움도 덜 수 있지만 그러기 전까지 불안에 떨어야 하는 걸 생각하면 차마 가장 먼저 지목할 수 없었다.

그런 의미로 할아버지, 장미래, 앙리, 마은찬, 블랑쉬를 제외할 수밖에 없었고.

익명으로 활동하는 뱅크스와 비다를 가장 먼저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좋을 것 같아.”

비다도 내 생각에 동의했다.

“부탁해.”

마음을 담아 말하니 블랑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든든하다.

“뉴튜브뿐만 아니라 블로그나 커뮤니티, 포럼 등등 플랫폼도 다양하게 사용했으면 해.”

“그러는 편이 좋겠지.”

뭔가를 생각하던 비다가 씩 웃었다.

“옛날 생각 난다.”

“옛날?”

“EIE 운동 때. 그때도 다들 해바라기 들고 시위했잖아.”

“…….”

“왜? 뭐가 마음에 걸려?”

“그땐 사람들이 먼저 해바라기를 들어주었잖아. 지금은 내가 먼저 부탁하는 입장이고.”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존중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EIE 운동은 자발적인 현상이었다.

차별과 혐오에 지치고 분노한 이들이 스스로 구심점이 되어 벌인 일이고 <해바라기> 또한 그들이 선택한 상징이었다.

내가 영향을 미친 일이 아니다.

반면 이번 일은 시작점이 다르다.

내가 먼저 나서서 해바라기를 들어달라고 부탁하는 일이니 그때처럼 많은 사람이 함께할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가능하다고 믿는 게 터무니없는 생각일지도 모른다.

사람마다 생각과 입장이 다르니까.

“분명 그렇게 될 거야.”

비다 라바니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응원했다.

“난 봤어. 허구한 날 서로 욕하기만 하던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때 거짓말처럼 다 같이 모였어. 해바라기 들고.”

일전에도 얘기해 준 일이다.

비다가 다니던 공장 사람들이 함께 EIE 운동에 동조해 거리로 나섰다고 말이다.

“불가능한 일이 이뤄지지 않았다면 기적이란 단어는 생기지 않았대.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으니까 기적이란 단어가 생긴 거라고 플라티니 대표님이 말씀하셨어.”

기적.

그래, 만약 이 일이 성공한다면 기적이란 말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 * *

2038년 9월 14일.

독재자를 타도하기 위해 모인 러시아인들이 무장 경찰에 의해 탄압당하는 영상이 핑구 채널에 게시되었다.

미술 관련 영상만 올라오던 고훈의 뉴튜브 채널 구독자들은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자국민을 향한 잔인무도한 폭력행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영상에 분개했다.

└지금이 2038년이 맞냐?

└이거 러시아야? 지금?

└아니 애들도 있잖아. 뭐 하는 짓이야.

└우크라이나 사람들 학살한 것으로도 모자라서 자기 나라 사람들까지 저렇게 대한다고?

└너무 끔찍해서 못 보겠다.

└미틴 지지율 높다고 보도되지 않았나? 저런 사람들도 있었네.

└어디서나 의식 있는 사람들은 있겠지. 아, 근데 진짜 너무 한다. 애기 우는 소리 너무 가슴 아파.

└훈이는 이 영상 어떻게 구했지?

└알렉스가 공유했다고 함. 알렉스 팩토리에도 같은 영상 올라옴.

└하. 저항도 못 하고 해바라기 들고 걷기만 하잖아.

└훈이 해바라기네.

└러시아 국화이기도 하고 EIE 운동 때 사용돼서 자연설을 상징하기도 하니까 들고 있는 듯.

└나 진짜 안 믿겨. 이 영상이 진짜인지.

└방금 뉴스에도 뜸.

└이미지 다운로드 링크 붙어 있는데?

└그러게? 훈이 해바라기잖아.

└어디?

└더보기 눌러 봐. 훈이가 뭐라 적어놨네.

[고훈입니다]

얼마 전 알렉스 팩토리를 운영하는 알렉스 우드 씨를 통해 이 영상을 접했습니다.

이 영상을 촬영해 보낸 분은 유선 통화, 인터넷 등을 차단당해 외부의 소식을 접하기 어렵다며, 러시아 내부 상황을 알리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러시아 내부에서는 이처럼 많은 사람이 독재에 저항하고 그 과정에서 희생당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들과 함께하겠습니다.

그리고 함께해 주실 분을 찾습니다.

우크라이나인을 학살하고 러시아인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독재자 볼로디치카 미틴을 규탄하고.

그 의미에서 러시아 시위대와 함께 해바라기를 들겠습니다.

그들이 혼자가 아님을 알리고, 그들이 한시라도 빨리 평화를 되찾길 바라며 국제 사회가 한 마음으로 움직여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첨부한 이미지 <해바라기>는 자유롭게 활용해 주시길 바랍니다.

└하나가 아닌데?

└훈이가 그린 해바라기 연작 전부 다 있잖아.

└이걸 이렇게 배포한다고?

└아무리 원본이 아니라도 그렇지 뻔히 저작권 있는 이미지를 이렇게 무료로 배포해도 됨?

└EIE 운동 때처럼 러시아 내부에서는 이미 혁명의 상징으로 쓰이니까 풀어준 듯.

└타임스퀘어에도 뜸.

└[링크]

└훈이 목소리다.

└저것도 훈이가 한 건가?

└그렇겠지.

└내 계정에 영상 공유했음. 얼마나 볼진 모르지만 그래도.

└나도.

└난 프사 바꿨음.

└근데 이게 의미가 있나?

└훈이가 말하잖아. 러시아 내부에서 바깥소식 듣기가 힘들다고. 어떻게든 그 사람들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영향 있을걸?

└시위대가 커지려면 교류가 있어야 하는데 시위를 하는지 마는지조차 모르니까 조금이라도 손을 보태자는 말 같음.

└뱅크스랑 이클립스도 공유했다.

└앙리 마르소 계정도 해바라기로 바뀌었는데?

└ㅁㅊ 방금 뉴튜브 들어갔는데 첫 페이지 16개 영상 중에 해바라기 썸네일로 쓴 영상이 3개나 있음.

└벌써?

└그냥 원본 영상이랑 해바라기 이미지만 받아서 바로 업로드한 듯.

세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은 러시아의 침략 전쟁은 상상 이상으로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전쟁 이후 3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여전히 고통을 호소했고.

루블화 가치 폭락, 전쟁 위기, 유류 시장 혼선, 주가 폭락 등 전 세계가 전쟁 후유증을 겪는 탓이었다.

그러한 와중에 남녀노소가 섞인 러시아 시위대가 무장 경찰에 의해 탄압당하는 영상이 공개되니 그동안 억눌렸던 화가 마침내 폭발했다.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나서서 본인의 SNS 계정과 홈페이지, 블로그, 뉴튜브 계정 등에 <해바라기>를 썸네일로 한 시위 현장 영상을 게시하기 시작했고.

영상이 공개된 지 채 하루가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전 세계 온라인 환경을 뒤덮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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