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외전 38화
Golden Age
7. 다시 황금의 시대로(3)
“말이 안 되는데.”
성귤 과장이 턱을 괸 채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고훈으로부터 글로벌 옥외 광고를 추진하길 지시받은 그는 내심 고훈의 바람을 어떻게든 이뤄주고 싶었다.
해서 고훈이 처음 이야기한 내용대로 관련 비용을 알아본 결과 터무니없는 금액이 산출되었다.
최소한으로 잡은 비용만 1억 달러가 필요했는데, 고훈이 바라는 대로 전 세계 주요 거점에 온종일 광고를 하기 위해서는 추가 금액이 필요했다.
개중에는 통상 비용의 3배를 요구하는 곳도 있었으며, 다른 업체의 반발을 문제 삼아서 협상 자체를 거절한 곳도 있었다.
‘포기하는 게 맞아.’
성귤 과장은 고훈과 쇼콜라티에 갤러리를 위해서도 이번 일은 무리라고 판단했다.
쇼콜라티에 갤러리가 작년 한 해 동안 전시회로 벌어들인 순수익은 약 550만 달러였고, 작품 판매 수익은 약 233만 유로였다.
최근 문화재 반환에 대한 보상으로 138억 원을 받았으나 사용처가 정해진 돈이었고.
모스크바에서 <황금이 녹아내린 땅>이 500만 유로에 판매되면서 큰 수익을 올렸지만 큰 영향을 줄 순 없었다.
고훈의 바람대로 일을 진행하려면 쇼콜라티에의 자본을 모두 투자하고도 부족했다.
‘마르소 이사님이라도 나서지 않으면 불가능해.’
그리 판단한 성귤 과장은 고훈이 내놓은 절충안으로 일을 진행하고자 다시금 팔을 걷어부쳤다.
* * *
“앙리.”
“뭐야.”
고훈이 살갑게 부르자 앙리 마르소가 미간을 찌푸렸다.
“부탁 하나 들어줄 수 있어요?”
방긋방긋 웃는 얼굴을 보니 더더욱 기분이 불쾌해졌다.
“아니.”
“들어는 보고 결정해요.”
앙리 마르소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신문을 읽었다.
러시아에서 혁명군이 조직된 이후로 언론에서는 줄곧 그와 관련된 일만 다루고 있었다.
“마르소 미술관 로비에 광고판 있잖아요. 그거 좀 쓸 수 있어요?”
“아니.”
마르소 미술관 로비의 광고판은 모두 베르나데트 마르소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하루만요.”
앙리가 고개를 돌렸다.
“또 무슨 꿍꿍이야?”
“광고하고 싶은 게 있는데 비용이 많이 들어서요. 앙리 덕 좀 보고 싶은데.”
“무슨 광고.”
고훈이 무엇을 홍보하려는지 알 수 없었다.
쇼콜라티에와 본인 작품에 관련해서는 갤러리에서 잘 진행하니 따로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이거요.”
고훈이 스마트폰을 펼쳐서 앙리가 보고 있던 홀로그램 위로 영상을 보냈다.
우크라이나 부흥 운동 영상과 러시아 시위대 영상을 본 앙리 마르소가 눈을 가늘게 떴다.
“허튼 짓 말고 가만있어.”
“이게 왜 허튼 짓이에요.”
“며칠 지나서 무뎌진 모양인데.”
앙리가 러시아 연방 문화부장관과 모스크바 국제 아트페어 담당자가 시신으로 발견되었단 기사를 가리켰다.
고훈이 눈을 크게 떴다.
“오늘내일 한다고 그놈이 포기라도 할 것 같아? 전혀.”
모든 독재자는 권력을 잃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 순간 본인이 무사할 수 없다는 걸 잘 알았기에 군사력을 휘두르고 법을 개정하고 시민을 탄압했다.
하물며 전 세계로부터 고립된 상황에서 국가 내부에서도 시위가 확산되고 있었다.
벼랑 끝에 몰린 그가 무슨 짓을 할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안전해질 때까지 당분간 얌전히 지내.”
앙리 마르소가 뉴스 기사로 시선을 옮겼다.
“그럴 수 없어요.”
고훈이 단호히 말했다.
“지금도 너무 많은 사람이 희생당하고 있어요. 얻어맞고 수감되고 심지어 총에 맞은 사람도 있어요.”
앙리 마르소가 고훈을 바라보았다.
오지랖 넓은 성정은 익히 알고 있었다.
아무도 관심 가지지 않았던 몽마르트르의 가난한 집 아이들에게 놀이터를 마련해 주고.
자동화로 인해 직장을 잃은 이들을 고용하고.
재능과 의지는 있지만 환경이 받쳐주지 않는 학생들을 데려다가 작품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게 지원해 주었다.
페르디난도 곤잘레스, 비다 라바니 등 고훈은 항상 약한 이들, 그중에서도 선량한 이들 편에 섰다.
오직 순수한 예술가이길 바라는 앙리 마르소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으나 고훈에 의해 변하는 세상을 바라보며, 그의 행동에도 의미가 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안 됐지.”
앙리 마르소가 입을 열었다.
“가지고 있는 돈은 하루아침에 휴짓조각이 되고 이대로 있다가는 굶어 죽겠다 싶어서 거리로 나갔는데 패고 밟고 감옥에 처넣어. 심하면 사형도 당해. 안 됐지.”
“그래요.”
“근데 난 네가 더 신경 쓰인다고.”
앙리 마르소가 홀로그램을 껐다.
“독이라도 들었을까 봐 식사 한끼 맘 편히 못 하고, 어딜 가든 신경 쓰여서 경호원 대동하고 다니는 니가 더 신경 쓰인다고.”
그 또한 사람인지라 러시아에서 일어난 일이 안타까웠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당장 가장 가까운 이가 고통받는 것이 더욱 와닿았다.
“앙리.”
“네가 러시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리지 않아도 언론에서 매일 다루고 있어.”
“앙리.”
“들어.”
앙리 마르소가 고훈을 노려봤다.
“네가 하려는 일이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야.”
앙리 마르소는 누구보다도 고훈을 잘 알고 있었다.
EIE 운동이 일어났을 때 전 세계를 물들였던 황금의 물결은 기적이라는 단어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수천만 명이 <해바라기>를 들고선, 18세기에 주창되었던 천부인권을 다시금 외쳤다.
모든 사람은 존중받아야 하고, 누구도 다른 이의 인권을 침해할 수 없다는 진리.
그것을 망각한 이들에게 경종을 울리며, 스스로 다시금 외칠 수 있도록 만든 이가 지금 눈앞에 있었다.
모스크바 국제 아트페어에 참가한다고 했을 때도 분명 권세에 굴하지 않을 거라고.
또 한 번 세상을 움직일 거라고 믿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네 역할은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야. 그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돕는 거야. 쓰러졌다면 일어서고 무서우면 용기를 주는 일이라고.”
앙리 마르소는 선을 그었다.
고훈이 사건을 직접 해결하려고 나선다면 예술가의 영역을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정치와 군사의 문제였다.
“그 영상 걸어서 어쩌게.”
앙리 마르소가 비아냥거렸다.
“러시아 내부에서도 싸우는 사람이 있다고 알려야죠. 그들에게도 밖에서 응원하는 사람이 있다고 알려야 하고요.”
“알린다고? 인터넷도 검열하는 나라에 무슨 수로 알려. 전 세계에 도배라도 하게?”
“어떻게 알았어요?”
앙리 마르소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인터넷은 검열되긴 하는데 제한적으로는 접근할 수 있대요. 국경 근처라든가 스타링크 사용해서요.”
앙리 마르소가 이마를 짚었다.
본인만큼이나 고집불통인 녀석이라 어지간해서는 설득될 리 없었다.
‘무슨 꿍꿍이야.’
고훈이 무슨 일을 하려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해도 적어도 허튼 말을 꺼낼 녀석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전 세계에 도배하려고 들 텐데, 그러기 위해서는 천문학적인 금액이 필요했다.
앙리 마르소가 이죽였다.
“할 수 있어? 네가?”
그의 자존심을 긁어서라도 말리고 싶었다.
“후.”
고훈이 소파에 등을 파묻었다.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씩 웃었다.
당장에라도 무슨 짓을 저지를 듯이 말하다가 금방 불가능한 일이라고 인정하니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었다.
‘돈 빌려 달란 소리는 아닐 테고. 얼마나 드는지 확인도 안 해봤을 놈도 아니고.’
고민을 거듭하던 그에게 아주 비열한 생각이 떠올랐다.
“설마 너.”
“네?”
“작품을 다 팔아버릴 생각은 아니겠지.”
고훈이 씩 웃었다.
“대답해!”
“그럴까도 생각했는데 부담이 크더라고요. 그리고 어떤 돈 많은 멍청이가 다 사버릴 수도 있고.”
“이 빌어먹을 자식이.”
“걱정 마요. 그러지 않아도 되는 방법을 찾았으니까.”
고훈이 벌떡 일어났다.
“앙리 말이 맞아요.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앙리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하기로 마음먹은 일을 이렇게 쉽게 포기할 녀석이 아니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는데 처음부터 잘못 생각했나 봐요.”
“…….”
“같이하면 되는데.”
“뭐?”
“방금 앙리도 그랬잖아요. 내 역할은 문제를 직접 해결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움직이게 하는 거라고.”
답을 찾은 고훈이 기분 좋게 웃었다.
* * *
-훈아.
비다 라바니가 반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안 그래도 전화하려고 했는데. 나 파리거든.
영국에 있을 사람이 파리에 왔다니 조금 놀랐다.
“언제?”
-방금. 너 돌아왔다고 해서 얼굴 보려고. 어디야?
모스크바 일 이후로 쭉 걱정해 주었는데, 아무래도 그 때문에 온 것 같다.
마음 쓰게 해서 미안하기도 하지만 기쁜 마음이 앞선다.
“갤러리. 바로 올 거야?”
-응. 블랑쉬랑 같이 갈게. 30분쯤?
전화로는 자주 연락했지만 직접 만나는 건 오랜만이라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통화를 마치고 비다와 블랑쉬가 좋아하는 마카롱 가게를 들러서 돌아오니 입구에서 딱 마주쳤다.
“비다, 블랑쉬.”
“훈아.”
비다가 달려와서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격렬한 환영에 등을 쓸며 화답하자 블랑쉬가 다가와 뺨을 맞대고 비쥬를 나누었다.
“피곤해 보여.”
블랑쉬가 걱정스레 말했다.
“일이 많아서. 들어가자. 마카롱 사 왔어.”
마카롱 상자를 보여주니 비다와 블랑쉬가 눈을 빛냈다.
“여기 아직 하는구나.”
“여전해.”
워낙 인기 많은 매장이라 갈 때마다 조금씩 기다려야 한다.
집무실에 자리를 잡고 앉아 마카롱을 나눠 먹으니 블랑쉬가 감격한 듯 입을 틀어막았다.
“맛있지.”
“응. 런던에서는 절대 느끼지 못할 맛이야.”
“은찬이 형 마음을 알겠더라구. 진짜 음식은 아니야.”
비다 라바니가 마카롱 하나를 통째로 입에 넣으며 말했다.
“어머님은?”
“이따가 가보려고. 밤 늦게 도착한다고 말씀드렸어.”
“건강하시지?”
“그럼. 우리 엄마 수영 시작하시고 진짜 건강해지셨어. 관절도 좋아지고 저번 달 동네 수영대회에서 3등 하셨대.”
2년 전에 비다의 어머니 히나 라바리가 히잡을 벗었단 이야기를 들었다.
개종을 한 건 아니지만, 교리도 현실에 맞추어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면서 많은 걸 내려놓으신 것 같다고 설명했었다.
집 안에서만 지내시는 게 아니라 외부 활동도 하시고, 수영장도 다니고 한이 맺혔던 역사 공부도 시작하셨다니 참 다행이다.
“엄청나잖아.”
“그치. 난 수영 못 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빨리 배우시는지 몰라.”
비다 라바니가 기분 좋게 웃었다.
어머니가 본인의 삶을 찾아가서 기쁜 모양이다.
“운동은 얘가 해야 해.”
블랑쉬가 비다를 타박했다.
“맨날 피곤하다고 누워 있어.”
“밤에 작업하니까 어쩔 수 없잖아.”
“핑계야.”
“그러는 너도 같이 누워 있잖아. 이상한 드라마나 보고.”
“이상하다니? 어디가?”
“죽은 아내에게 어렸을 적 헤어진 쌍둥이 동생이 있다는 걸 알게 된 남자가 자기도 모르게 그녀를 사랑하게 되는 내용이 안 이상해?”
“그 사람도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어. 안 된다고, 그러면 안 된다고 하면서도 자꾸 마음이 가는 걸 어떡해.”
“동생도 이상해. 죽은 언니 남편이잖아. 왜 그렇게 다가가는 거야?”
“언니 이야기 해줄 사람이 남자뿐이니까. 같이 봤잖아. 대체 뭘 본 거야?”
“너?”
둘 사이는 런던으로 떠나기 전보다 훨씬 가까워 보인다.
“훈이 앞에서 뭐라는 거야.”
블랑쉬가 주먹으로 비다의 배를 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