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외전 37화
Golden Age
7. 다시 황금의 시대로(2)
무장한 경찰이 시위대를 폭행하는 영상은 충격적이었다.
팻말과 <해바라기>를 든 이들은 남자와 여자, 노인과 어린이를 가리지 않고 사뭇 비장했다.
그들을 막아선 이들은 방패와 헬멧으로 얼굴을 가려 서슬퍼런 눈빛만을 내비치고 있었다.
경찰의 경고 방송에도 시위대는 행진을 멈추지 않았다. 팻말과 <해바라기>를 더욱 높이 들며 독재자를 규탄했다.
경찰은 방패를 내밀었다.
무자비하게 곤봉을 휘둘렀다.
얻어맞고 밀려나서 쓰러질 때마다.
그들이 들고 있던 팻말이 땅에 떨어지고 해바라기가 꺾일 때마다 자유를 부르짖던 목소리가 비명을 질렀다.
젊은 여인이 새된 소리를 냈고.
젊은 남성이 목을 긁으며 낸 고함 사이에 앳된 아이의 울음소리와 노인의 통곡이 겹쳤다.
이것이 정녕 사람이 할 짓인가.
대체 누가 저 경찰들에게 그들의 이웃을 탄압할 힘과 명분을 줄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와중에도 자유를 향한 처절한 외침은 계속 이어졌다.
물러설 수 없다고.
물러서지 않겠다고 울부짖는 듯했다.
무장 경찰에게 얻어맞아 들고 있던 해바라기를 떨어뜨리고 그것이 짓밟히면 뒤에 있는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비록 두려움에 몸을 떨지라도 용기를 내 걸음만은 당당히 내디뎌 빈자리를 채워냈다.
“저도 가끔 무서울 때가 있어요.”
알렉스가 입을 열었다.
“데미안 카터를 비판하는 영상을 올렸는데 그의 팬들이 와서 온갖 욕을 다하더라고요.”
고개를 드니 알렉스가 피식 웃었다.
“그 일에 직접 관련되었던 분 앞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고개를 저었다.
그가 미술계와 관련된 비리를 폭로하는 데 힘써온 건 잘 알고 있다.
“이러다가 무슨 해코지라도 당하는 거 아닐까 싶을 때도 있어요. 그럴 때 응원해 주는 댓글과 리뷰를 보면 얼마나 힘이 나던지.”
“…….”
“작가님도 그럴 거라 생각해서 가져왔어요.”
이상한 일이다.
분명 옳은 일을 하는 데 두려움이 앞선다.
다른 생각을 가진 팬이 떠나가진 않을까, 사실은 내가 경솔했던 건 아닐까.
혹은 큰 힘을 가진 누군가로부터 부당한 일을 당하거나, 저항하려 해도 그럴 수 없는 건 아닌지 걱정이 쌓이게 된다.
의연히 대처하려 해도 잠을 이룰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다.
어느 순간부터 작은 소리에도 깜짝 놀라게 되고, 다른 사람과 눈을 마주하는 게 두렵게 된다.
그럴 때마다 날 지탱해 준 것은 할아버지와 방태호, 앙리, 차시현 같은 주변사람이었다.
내 편이 있다는 걸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강해질 수 있었다.
알렉스 또한 마찬가지였으리라.
“그러니까 힘내요.”
“알렉스.”
“우크라이나도 러시아도 싸우고 있어요.”
“…….”
“당신이 보여준 용기로요.”
알렉스의 말과 함께 영상 속 사람들이 <해바라기>를 더욱 높이 들었다.
내가 그들에게 용기를 주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이 내게 힘을 준 것만은 분명하다.
* * *
한국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파리로 돌아왔다.
문화재 환수 작업은 방태호에게 맡겨두었으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지만 개강 첫 주라 처리할 일이 많았다.
“이사님, 부르셨습니까?”
성귤 과장이 집무실로 찾아왔다.
“네. 앉으세요. 이것만 처리할게요.”
다음 주 학생들에게 배부할 학습자료를 퇴고하고 나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 마실래요?”
“저는 좋지만 이사님은 안 드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성귤 과장이 책상 위에 놓인 커피잔을 보며 말했다.
오늘만 벌써 4잔을 마셨으니 무리도 아니다.
냉장고에서 사과 주스와 커피 하나를 꺼냈다.
“다들 걱정합니다. 돌아오신 뒤로 계속 이러시니까요.”
“가만있을 수가 없어서요. 과장님이 좀 도와줬으면 해요.”
“말씀하시죠.”
성귤 과장이 믿음직스럽게 대답했다.
방태호가 자리를 비울 때면 성귤 과장에게 일을 맡기곤 했는데 이번에도 잘해줄 거다.
“돈을 벌까 해요.”
“예?”
성귤 과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크게 벌일 일이 있는데 아마 돈이 많이 들 거예요. 그래서 최대한 많이 끌어모으고 싶은데, 무슨 방법이 있을까요?”
성귤 과장이 깍지를 끼곤 양 팔꿈치를 무릎에 댔다.
“기존 수입 이외의 방법을 바라시는 것 같습니다.”
정확히 얼마인지는 몰라도 쇼콜라티에 갤러리에서 여는 전시회로는 감당하기 힘들 거다.
“네.”
“가장 쉬운 방법은 작품을 경매에 내놓는 일이죠.”
역시 그 수밖에 없나.
“하지만 신중하셔야 합니다. 너무 많이 판매했다간 시장에 작품이 많이 풀리니 가격 형성에 영향을 줄 겁니다.”
계산적이지만 현실이 그렇다.
“또 전시할 작품이 줄면 장기적으로도 손해를 보게 되죠.”
이 또한 옳은 말이다.
“정확히 얼마나 드는 일인지 확인하시는 것이 우선일 듯합니다.”
“그러네요.”
테이블 위에 기획서를 띄웠다.
“이건.”
“광고를 알아보고 있어요. 가능한 많은 사람이 볼 수 있게요.”
광고, 홍보 쪽으로는 지식이 많지 않아서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것을 대강 정리해 보았다.
맨하탄 타임스퀘어의 로이터 사인보드나 나스닥 사인보드, 런던 피카델리 서커스, 토론토 던다스 스퀘어, 시부야 큐스 아이, 서울 코엑스몰 등이다.
“갤러리를 홍보하시는 건 아닌 듯한데.”
“네. 이 영상을 올릴 거예요.”
성귤 과장에게 우크라이나 부흥 운동과 러시아 시위 영상을 보여주었다.
“이사님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알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건 처음이지만 쉽게 동의를 얻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워낙 큰돈이 들어가는 일인 데다 그 돈을 회수할 방법도 없기 때문이다.
“해야 하는 일이에요.”
“반대하실 거라고 생각하신 모양입니다.”
성귤 과장이 난감하다는 듯 웃었다.
“딱히 반대할 이유는 없어 보입니다. 이 일로 이사님 이름이 더욱 각인될 테고 멀리 보면 갤러리 수입이 늘어날 테죠. 명분도 있고요.”
성귤 과장은 모든 일을 계산적으로 생각하지만 그 때문에 더욱 믿음이 간다.
어쩌면 그의 말대로 내게 좋은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방 대표님께선 반대하실 것 같습니다. 이사님이 부담 지는 걸 싫어하시니까요.”
“아마 그럴 거예요.”
“아직 말씀 안 나누셨습니까?”
기획서를 보던 성귤 과장이 문득 나와 눈을 마주쳤다.
“……설마 그것 때문에 문화재 환수 사업을.”
“설마요.”
빙그레 웃자 성귤 과장이 헛기침을 하며 다급히 기획서를 살폈다.
모르는 척해줘서 다행이다.
“여기 적으신 곳에 광고를 의뢰하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얼마나 노출하느냐에 달렸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이사님께서 비용 걱정을 하실 정도는 아니죠. 아니면 다른 생각이 있으시거나.”
역시 유능한 사람이다.
눈치가 빨라서 이것저것 상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대화가 진전된다.
“하루 정도 생각하고 있어요.”
“예?”
성귤 과장이 나와 기획서를 번갈아 보고 다시 물었다.
“타임스퀘어 로이터 사인보드 광고를 하루요?”
“안 될까요?”
“그럼요. 시간 조정을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하루를 통째로 사용할 수 있을 리 없습니다. 15분 광고 기준으로만 2만 달러 정도 합니다. 단순 시간당 단가로 계산해도 24시간이면 192만 달러예요. 최소.”
“다 암산하신 거예요?”
박수를 안 칠 수 없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다.
“아무튼 부담스럽긴 해도 못할 정도는 아니네요. 문제는 다른 곳도 해야 하는데……. 다른 곳 단가도 알고 있어요?”
무심코 고개를 들었는데 성귤 과장의 눈이 너무 튀어나와 있어 깜짝 놀랐다.
“설마 여기 있는 곳들을 전부 다 하실 생각이십니까?”
“아니요.”
성귤 과장이 한숨을 내쉬곤 캔커피를 들었다.
“가능한 많은 곳에 할 건데 아는 곳이 없어서 대강 적은 거예요. 추천해 주실 만한 곳 있어요?”
“컿.”
사레들린 모양인지 연신 기침을 해대서 걱정스레 보니 버럭 소리쳤다.
“무슨 생각이십니까? 전 세계에 도배를 하시겠단 말씀이세요?”
고개를 끄덕이니 손을 쥐었다가 폈다가 안절부절못한다.
“진심이세요?”
“진심이에요.”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쇼콜라티에 자본을 전부 투자해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어느 정도 필요해요?”
성귤 과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당황한 얼굴로 날 빤히 바라보는데, 문득 앞선 대화를 떠올린 모양이다.
“설마 그래서 경매를.”
내가 경매 시장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건 성귤 과장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그런 방법을 통해서라도 이 일을 하겠다는 내 의지가 잘 전달됐을 거라 믿는다.
고개를 끄덕이자 성귤 과장이 양쪽 머리를 벅벅 긁는다.
“진정해요.”
“이사님.”
성귤 과장이 입 주변을 닦으며 말했다.
“전 세계 광고판을 도배할 순 없습니다. 단순히 비용적인 문제도 아니고 쇼콜라티에가 감당할 수 있는 규모도 아닙니다. 만약 진행한다 해도 홍보는 그만한 수익이 돌아올 때 의미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지금 나와 쇼콜라티에로선 그만한 일을 감당할 수 없나 보다.
작품 대부분을 내놓을 생각까지 해봤지만, 성귤 과장 말대로 그렇게 되면 전시할 작품이 없어서 갤러리 경영이 어려워질 거다.
그렇게 되면 이곳에 몸담고 있는 이들의 생계도 위태로워진다.
“……어쩔 수 없네요.”
혼자였을 땐 생각 없이 부딪히는 일이 많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다.
갤러리가 조금씩 커지면서 책임도 늘었으니까.
불가능한 일을 고집할 순 없다.
“그럼 이곳들은 어때요?”
몇몇 장소를 추리니 성귤 과장이 입을 가린 채 고민에 빠졌다.
버릇인지 뭔가를 중얼거리는데 비용 계산이라든지, 날짜를 조정하는 방법 등을 궁리하는 것 같다.
“이사님.”
“네.”
“저는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
“하지만 이사님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라고 하시니 믿을 뿐입니다.”
“과장님.”
“우리 갤러리가 소화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우선 연락을 해서 가능한지부터 알아보겠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눈을 크게 뜨니 성귤 과장이 난색을 표했다.
“혹시 다른 일도 진행하시려는 건 아니시죠? 보상액이 크긴 하지만 문화재 환수 작업에 들어가는 비용도 만만치 않습니다. 지금 지시하신 일만 해도 솔직히 걱정됩니다.”
“잘 부탁해요.”
다른 일도 있다고 말을 할 수 없어서 말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