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외전 35화
Golden Age
6. 신윤복의 사랑(6)
“월침침야삼경 양인심사양인지. 달도 침침한 삼경, 두 사람의 마음은 두 사람만 알겠지란 뜻입니다.”
짧고 단순한 문장이나 그림자 뒤에 숨은 달빛만큼이나 애틋하다.
다시 한번 <월하정인>을 살피니 두 사람의 자세가 왜 어색한지 알 수 있었다.
남자를 향해 있는 왼발과 돌아서려는 오른발에서 여자의 갈등이 느껴지고.
남자의 발은 여자에게 다가가려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떠나려는 모습으로도 보인다.
이제 헤어져야 함에도 조금만 더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전해진다.
“비밀스럽게 만나고 있었나 봐요.”
“그렇습니다.”
박재욱 사무관이 대답했다.
“실은 이 문구는 신윤복이 다른 사람의 문장을 인용한 것입니다. 조선 시대 문신 김명원의 문집에서 따왔죠.”1)
처음 듣는 이름이다.
“모르겠어요.”
차시현도 마찬가지인 모양.
“임진왜란 당시에 도원수를 지낸 사람입니다. 부드럽고 순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럼 이 문구는.”
“김명원이 사랑하는 이를 그리며 적은 문장입니다. 상대는 기생이었고요.”
기생과 방탕하게 어울리는 양반은 신윤복이 자주 다룬 소재다.
우스꽝스럽고 한심한 모습을 보여주며 타락한 양반을 비판했는데.
<월하정인>은 그러한 기조가 사뭇 다르다.
“두 사람의 관계는 상당히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박재욱 사무관이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행복할 것 같던 둘 사이에 문제가 생깁니다. 윤백원이라는 권신이 그녀를 첩으로 들인 거지요.”
“아.”
“하지만 두 사람의 마음만은 누구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김명원과 그녀는 남몰래 만남을 이어갔다고 합니다.”
“어떻게 됐어요?”
차시현이 물었다.
“밀회가 발각되었단 기록이 있는 걸 봐서는 끝이 그리 좋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김명원이 파직당했다고 기록되어 있거든요.”
“설마 윤백원이라는 사람 때문이에요?”
박재욱 사무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1562년 그러니까 김명원이 28살 때 권신 이량을 탄핵하려 했습니다. 한데 이량과 윤원형은 서로 돕는 관계였고 그 윤원형의 조카가 바로 윤백원이었죠.”
“죄 없이 파직된 거예요?”
“네.”
억울하게 파직당하고 사랑하는 이도 빼앗겼단 말이다.
“말도 안 돼.”
차시현이 김명원과 여성의 안타까운 사연에 분통을 터뜨렸다.
나 역시 이 문구와 그림이 더욱 애달프게 느껴진다.
“신윤복을 설명할 때 에로티시즘과 양반 사회를 풍자한 모습은 많이 이야기하지만 저는 그에게 이런 모습도 있다고 꼭 설명합니다.”
신윤복을 설명할 때 가장 먼저 나오는 말이 조선의 에로티시즘이다.
“물론 그가 에로시티즘을 다룬 것은 사실이지만 그 말뜻에 담긴 여러 의미 때문에 잘못 전달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박재욱 사무관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여인들의 생활상을 은유적으로 다룬 면에서 에로시티즘적이나.
꼭 외설스럽고 방탕한 양반 삶에 대한 풍자만 담고 있진 않다.
이 <월하정인>만 하더라도 신분이 갈라놓은 사랑과 권력 앞에 무너진 개인, 생이별하게 된 두 사람의 비극적 상황 등 여러 의미를 담고 있다.
“복식이나 생활상 등 사료적 가치로도 높이 평가되지만, 전 그 이상으로 당대 사람들의 내면을 다뤘다는 점에서 신윤복의 작품이 좋더군요.”
“같은 생각이에요.”
한국에 오기를 참으로 잘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김홍도와 신윤복 같은 대가의 진면목을 모른 채 살았을 테니 말이다.
* * *
미술 전문 뉴튜브 채널 알렉스 팩토리를 운영하는 알렉스 우드가 대한민국을 방문했다.
러시아로부터 반환받은 문화재 100점을 포함한 신국보보물전을 다루기 위함이었다.
“나 진짜 운 좋지 않아? 미스터 고가 파리로 돌아갔어 봐. 서울까지 와서 못 보고 가는 거잖아. 누구 센스인지 모르겠지만 개최일에 훈장 수훈하는 건 완벽한 판단이었어.”
국립중앙박물관 신국보보물전 개최식을 찾은 알렉스가 채팅창을 살폈다.
└저녁 추첨 좀
└페페로니 피자
└무슨 훈장 받음?
└또 받아?
└얼마 전에는 네덜란드에서 받은 거고 오늘은 한국에서 주는 거래.
└뾰루지가 생겼어.
└알렉스 세수는 했어?
“아니, 이 인간들이 방송 집중 좀 해. 저녁 메뉴랑 뾰루지 난 건 친구들한테 물어. 왜 내 방송에서 난리야.”
알렉스가 시청자들을 타박했으나 소용없었다.
오랜 시간 함께한 그의 시청자들은 알렉스가 무슨 말을 하든 신경 쓰지 않고 잡담을 이어나갔다.
└어차피 식 시작하려면 한참 남았잖아.
└그전까지 네 재미없는 농담 들을 바에야 저녁 메뉴 상담받는 게 훨씬 이득임.
└치킨은 어때. 간장 소스를 바른 게 맛있던데.
“간장 치킨. 간장 치킨을 먹어. 네가 경험한 그 어떤 치킨보다 완벽할 거야. 꼭 한국 브랜드에서 주문해야 해.”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식 치킨을 접한 알렉스가 간장 치킨을 찬양하자 시청자들이 광고냐고 물었다.
“내가 간장 치킨 광고를 받았으면 영광이었을 걸. 장담하는데 너희는 치킨을 아직 몰라. 간장 치킨을 먹어야만 비로소 완벽해진다고.”
└그래서 고훈은 언제 나옴?
└일 좀 해라. 맨날 잡담하면서 시간 끄네.
└고훈이 이번에 한국 정부한테 거액 보상을 받는다고 하던데.
└감정가로는 1,300만 달러라던데.
└워우.
└대한민국 국보급 문화재인데다 100점이나 되니 상당할 거라는 건 알았는데 상상 이상이네.
└전액 보상은 아닐 거임. 저기서 일부 보상이 되겠지.
미술 관련 이야기를 할 때는 저녁 메뉴 이야기나 하더니, 행사 시작을 기다리며 잠깐 어울리려 하니 시청자들의 태도가 돌변했다.
“너네 진짜 어이 없다. 혹시 나 괴롭히려고 들어 왔어?”
긍정의 채팅이 마구 올라오자 알렉스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싸워봤자 손해라는 생각으로 감정을 추스르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기 장도 있어. 서도 있고. 마하고 백도 있네. 백은 오랜만인데?”
장미래, 서인호, 마은찬, 백설기를 발견한 알렉스가 먼저 장미래를 카메라에 담았다.
“장미래는 얼굴이 좋아졌어. 학장이랑 조합장 일에서 벗어나서 그런 것 같아. 조만간 전시회도 볼 수 있지 않을까?”
다음은 마은찬을 잡았다.
“마은찬은 건강 관리를 잘하는 것 같네. 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건강해 보여. 근육도 붙은 것 같고. 얼마 전에 개인전 열었다고 들었는데 한국이라 못 갔거든. 미국이나 유럽에서 해주면 좋겠는데.”
베니스 비엔날레와 화이트채플 전시회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마은찬은 여전히 미술계의 관심 속에 있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미국 및 유럽 등의 활동이 줄어들었고 알렉스는 그런 아쉬움을 솔직히 내비쳤다.
“백설기. 발음이 어려운데. 아무튼 그녀도 함께 있네. 작품을 내지 않은 지 4년은 된 것 같은데. 엄청난 대작을 준비하나? 난 그녀가 정말 재능있는 미술가라고 생각하거든. 백만큼 다양한 작품을 보여주는 사람은 없었어. 그녀가 싫어할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예전의 데미안 카터처럼 말이야. 물론 긍정적인 의미로.”
알렉스 우드는 여러 재료로 다양한 소재를 다루는 백설기가 신작을 발표하길 기다렸었다.
“근데 아무래도 그런 작품을 내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지. 독특한 작품을 여러 개 보여주니까.”
그는 백설기가 설마 절필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한 채, 그녀의 전시회가 늦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장미래는 최근 화풍이 변했던데.
└장의 꽃이 좀 더 성숙해진 느낌이야. 형태를 살짝 죽인 대신 색채감을 극대화해서 그런가?
└마랑 백은 커플이지?
└백만큼 다양한 작품 내놓는 사람도 드무니까 오래 걸리겠지. 개인전 열 정도면 1~2년 더 걸릴지도 모름.
└알렉스 진짜 초심 잃었네. 예전 같았으면 보자마자 달려가서 인터뷰 땄을 텐데.
└그러게. 쫄았냐?
└조심해. 멀리서 몰래 카메라 찍으면서 혼잣말하는 거 보면 경비한테 쫓겨날지도 몰라.
└파파라치?
└ㅇㅇ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 사람들 얘기하고 있잖아. 무턱대고 가서 어, 나 영상 좀 찍게 인터뷰 좀 해달라는 건 무례하지.”
└언제부터 예의 차렸음?
└이래서 돈 벌면 사람이 달라진다니까. 예전에는 욕 좀 먹더라도 구독자를 위해 해보겠습니다, 하는 패기가 있었는데 이젠 그냥 치킨 좋아하는 돼지 아저씨잖아.
└아니 님 200만 구독자 뉴튜버인데 그 정돈 할 수 있는 거 아님?
└실망이네
“아니, 이것들이 오늘따라 미쳤나. 매니저 없어요? 채팅 안 짜르고 뭐 해요?”
└매니저: 전 못 해요.
└매니저: 표현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매니저 잘한다
“와.”
알렉스 우드가 억울한 나머지 어쩔 줄 몰라 할 때 누군가 그를 불렀다.
“알렉스.”
알렉스는 뒤돌아선 순간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다.
“고! 미스터 고!”
최근 <델프트의 여인>과 <황금이 녹아내린 땅>으로 가장 큰 주목을 받고 있는 미술가 고훈이 눈앞에 서 있었다.
“잘 지냈어요?”
“그럼요! 그럼요!”
알렉스가 고훈과 악수하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시청자들에게 자신이 고훈에게 먼저 인사받을 정도의 사람이란 걸 보여주고 싶었다.
“대기실에 있는 거 아니었어요? 혹시 내 방송 보고 만나러 온 거예요? 일부러? 직접? 지금? 이 중요한 자리에?”
“아니요.”
고훈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예전에도 구독 했냐고 물었다가 까이지 않았나? ㅋㅋㅋㅋㅋㅋ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고훈 급호감ㅋㅋㅋㅋㅋㅋ
└핑구 채널 구독한다
“찾아와 주신 분들께 인사드리려고한번 돌고 있었어요. 와주실 줄은 몰랐는데 감사해요.”
“이런 기회를 놓칠 순 없으니까요. 문화재 100점 반환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아, 괜찮으시면 식후에 식사 같이 하실래요? 닭 요리를 잘하는 곳이 있거든요.”
“한국 치킨?”
먼저 부탁하고 싶었거늘.
고훈이 먼저 합석을 제안한데다, 사랑해 마지않는 한국 치킨 요리라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네.”
“물론이죠. 제가 방금 치킨이라고 외쳐서 오해할 것 같아 미리 말씀드리지만 전 미스터 고와 영상을 찍을 수 있으면 치킨이 아니라 병아리라도 먹을 수 있어요.”
“……네. 그럼 식후에 봐요.”
고훈이 어색한 미소로 인사하고 떠나자 시청자들이 알렉스를 또다시 비웃었다.
└병아리를 왜 먹어 미친놈앜ㅋㅋ
└고훈 표정 봄?
└ㅋㅋㅋㅋㅋ착해서 화는 못 내고 돌아간닼ㅋㅋㅋㅋ
└점심 먹기로 한 거 후회하는 거 아님?
└그니까 왜 자꾸 헛소리를 햌ㅋㅋ
“시끄러워. 원래 이런 건 막 던지다가 하나씩 건지는 거야.”
알렉스가 이마를 짚었다.
* * *
1)임진왜란 당시 도원수.
1587년 도순찰사로서 왜구를 격퇴했다.
1589년 정여립의 난을 수습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팔도도원수가 되어 한강 및 임진강을 방어했으나 적을 막지 못하고 진격 속도를 늦추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박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