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외전 31화
Golden Age
6. 신윤복의 사랑(2)
완벽히 짜두었던 일정이 입국 날부터 망가지고 말았다.
공항에서 발이 너무 오래 묶인 탓에 맛집으로 소문난 삼겹살집을 찾지 못했다.
포테이토 피자를 배달시켜 먹는 차선책이 없었으면 억울해 잠도 이루지 못했으리라.
그러니 오늘 점심만큼은 짜장면을 먹고 저녁에는 어제 먹지 못한 삼겹살을 먹어야 한다.
“안녕하세요, 박재욱이라고 합니다.”
늦은 오전에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으니 박재욱 사무관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안녕하세요.”
“관장님 계신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어렸을 때 몇 번 찾아왔는데 외관은 그때와 달라지지 않았다.
“관장님과 담화 나누시고 점심 이후에 일정 이어가셔도 괜찮으실까요?”
“허허. 좋지요.”
할아버지가 흔쾌히 수락했고 나 또한 큰 이견은 없으나 중요한 건 점심 메뉴다.
“점심으로 짜장면 어떠세요?”
“짜장면 말씀이신가요?”
박재욱 사무관이 잠시 당황하다가 웃었다.
“네. 알아두겠습니다.”
혹시 다른 곳을 예약해 두었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마음이 한결 놓인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관장실로 향했다.
문 앞에 이르러 박재욱 사무관이 기침하니 관장이 유난을 떨며 반겨주었다.
“아이고 교수님, 고 작가님 어서 오세요.”
성찬호 관장은 머리카락을 옆으로 넘겨서 인상이 순하고 서글서글해 보였다.
작년, 51세 젊은 나이에 국립중앙박물관장직에 오를 만큼 조선시대 풍속화에 정통했다고 알고 있다.
“이렇게 와주셔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실 겁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 일이니까요.”
“그래도 파리에서 예까지 오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감사합니다, 교수님.”
“교수 그만둔 지가 언젠데. 껄껄.”
“그래도 제겐 스승님이시니까요.”
의아해서 할아버지를 보니 성찬호 관장이 먼저 답을 내주었다.
“대학원 시절에 지도해 주셨죠. 덕분에 여기 있고요.”
“아.”
최근 대외활동을 꺼리셨던 할아버지가 한국으로 오신 이유가 이것이었나 보다.
“그리고 작가님께도 정말 감사드립니다.”
러시아로부터 문화재를 돌려받은 일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별말씀을.”
“문화재 반환 작업이 시행된 지 오래지만 이같은 성과는 처음이었어요. 관장이기에 앞서서 한국 사람으로서 정말 고맙습니다. 아버님, 어머님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하실 거예요.”
“부모님을 아세요?”
“그럼요. 두 해 선배셨는데 그 당시 한국대학교 다니던 사람들 사이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요.”
대학시절 아버지 어머니 이야기는 장미래를 통해서만 들었다.
할아버지에게 여쭙자니 서로에게 상처가 될 것 같아서 참았는데, 좀 더 듣고 싶다.
“자, 자. 서서 이러실 게 아니라 앉으시죠. 재욱 씨, 차 좀 부탁할게요.”
“네.”
아쉬움을 감추고 테이블에 둘러 앉자 박재욱 사무관이 자기와 따뜻한 물 그리고 찻잎을 가져왔다.
“괜한 일인지 모르겠는데.”
성찬호 관장이 묘한 말과 함께 서류 봉투를 꺼내서 내게 주었다.
“이건?”
“혹시나 해서 찾아봤어요. 여기저기 연락해 봤는데 이것뿐이더군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열어 봐요.”
봉투에는 사진이 들어 있었다.
대학원에서 답사라도 갔는지 여러 사람이 기념 또는 기록으로 남긴 것 같은데 보자마자 알아볼 수 있는 얼굴이 셋이나 있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어머니다.
“허어.”
할아버지가 사진을 보시더니 탄식했다.
“이때가 언제였더라.”
“전주 갔을 때니 2012년일 겁니다.”
2012년이라면 내가 태어나기 6년 전 사진이고 두 분이 28살 때다.
사진이나 영상은 꽤 있지만 20대 때 모습은 얼마 없어서 느낌이 사뭇 다르다.
아버지가 어머니 어깨를 잡고 웃는 걸 보니 또 장난을 치다가 어머니를 화나게 한 모양이다.
내가 태어났을 때는 어머니도 아버지의 장난에 익숙해져 되레 더 크게 놀려주곤 하셨는데 이때는 아니었나 보다.
그래도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은 채 꽁냥대는 두 분 모습은 내 기억과 같다.
“감사합니다.”
성찬호 관장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니 그가 푸근히 미소 지었다.
“부모님 사진은 많은데 이렇게 어렸을 때 사진은 없었어요.”
“어릴……. 그렇긴 하죠. 하핫.”
젊었을 때라고 해야 하나.
돌아가셨을 때도 젊으셨으니 모호하다.
“이렇게 보면 기록도 보관도 그것을 대하는 사람도 참으로 중요해 보이는구나.”
할아버지가 말씀을 꺼내셨다.
“당시에는 답사 기록 사진이었지만 네게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잖니.”
“맞아요.”
“성 관장이 보관하지 않았으면 이렇게 보지 못했을 테고, 그 전에 사진으로 남겼으니 망정이지.”
할아버지 말씀이 백번 옳다.
이 사진을 남기지 않았다면 난 어머니, 아버지의 대학원 시절을 볼 수 없었을 거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삐진 모습도 아버지가 애교를 부리는 모습도 알지 못했을 거다.
기록은 이토록 중요하고 보관 또한 마찬가지다.
두 분에게는 큰 추억이 없던 일이라 남기지 않으신 듯한데, 성찬호 관장은 잘 보관했으니 말이다.
할아버지 말씀대로 이 사진이 내게 전해져 또다른 의미가 된 것처럼 문화재도 잘 보존해야만 한다.
누군가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물건이라도 그것을 보관하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고.
그렇게 이어진 문화재가 누군가에게는 큰 의미로 전해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럼 점심 먹을 시간도 되었으니 식사하러 가시죠. 교수님, 예전에 다니시던 동태탕집 어떠십니까.”
“아아. 역 주변 거기 말하는 거면. 허. 아직 장사는 하나 봅니다.”
“맛이 여전합니다.”
할아버지가 자주 다니신 맛집이 있나 보다.
“관장님, 고훈 작가님께서 중국집으로 가시자고 하셨습니다.”
“중국집? 중국집이라.”
“아니에요. 동태탕도 괜찮을 것 같아요.”
짜장면이 아쉽기는 하지만 할아버지가 다니시던 동태탕집이 어디인지 궁금하다.
오랜 세월 자리를 지킨 이유가 분명 있을 테니까.
* * *
이열치열이란 단어에 결코 동의할 수 없지만 얼큰한 동태탕을 먹으니 속은 편안했다.
다만.
“해가 따갑구나.”
“그러게요.”
소화도 할 겸 이촌역에서 박물관까지 걸어가는데, 8월 중순 햇살이 여간 뜨거운 게 아니었다.
박물관에 이르니 이마에 땀이 제법 맺혔다.
에어컨이 이렇게 반가울 수 없고 박재욱 사무관이 가져다 준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그보다 달 수 없었다.
관장실에서 잠시 쉬면서 옛 이야기를 나누길 얼마간.
일 이야기가 나왔다.
“간송 미술관과 단원 미술관 사이에서 조율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껄껄. 신윤복과 김홍도 작품 때문이겠구만.”
“예. 결국 이쪽에 두기로 했지만 아쉬워하더군요.”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화가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의 작품이니 두 곳이 아니라 어디라도 안치하길 바랐을 거다.
“훈이는 두 사람 작품 본 적 있니?”
“어렸을 때요.”
교통 사고 이후 기억이 온전치 않을 때 할아버지와 이것저것 공부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정선과 김홍도, 신윤복, 조속 등 생전 처음 접한 화풍에 이끌려 첫 발표작 <해바라기>를 그렸었다.
“깊이 공부하진 못했겠구나.”
“네.”
“그럼 이 기회에 한번 둘러보죠.”
성찬호 관장이 일어섰다.
“마침 신국보보물전 덕분에 전국에서 작품을 보내왔습니다. 김홍도와 신윤복 작품도 들였으니 좋은 경험이 될 겁니다.”
우리나라에서 조선시대 풍속화로는 최고 전문가가 직접 안내해 준다니 이런 기회를 놓칠 순 없다.
“부탁드려요.”
할아버지, 성찬호 관장, 박재욱 사무관과 함께 신국보보물전에 전시될 작품을 보고자 일어났다.
“벌써 전시를 해두셨나 봐요.”
창고에 있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곧장 전시관으로 이동해서 물었다.
“워낙 중요한 행사니 미리미리 준비하고 있습니다.”
박재욱 사무관이 설명했다.
신국보보물전 행사장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심혈을 기울인 만큼 기존 상설 전시관 대부분을 활용했다고 한다.
당연히 테마별로 잘 나뉘어 있고 우리는 곧장 단원 김홍도를 다룬 부스로 향했다.
“정선, 김홍도, 신윤복을 이야기할 때 흔히 조선의 르네상스란 말을 자주 씁니다.”
성찬호 관장이 이야기를 풀어냈다.
“교수님이나 저나 조선 미술을 서양 기준에 맞춰 부르기를 꺼리지만.”
성찬호 관장이 웃자 할아버지도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하셨다.
서양 미술사는 그들대로 한국 미술사는 한국대로 각자의 기준이 있으니 한쪽의 기준으로 다른 하나를 평가하는 건 잘못되었다는 말이다.
나 또한 그것에 동의한다.
“르네상스란 의미를 들여다보면 일정 부분 동의하게 되는 점도 있지요.”
“그림의 대상이 변화한 시기니까요.”
“아주 정확해요.”
성찬호 관장이 기뻐했다.
“본래 조선의 화원은 임금이 원하는 그림을 그려야 했습니다. 서양 화가들이 교회나 귀족이 바라는 걸 그렸던 것과 같이요.”
성찬호 관장의 설명대로 조선의 화원이란 관직은 말 그대로 임금의 지시대로 그림을 그리는 기술직이었다.
지금의 미술가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다 정선, 김홍도, 신윤복 때 이르러 이런 풍속화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죠.”
서민들이 화폭에 담기기 시작한 것이다.
“이 작품 많이 보셨을 거예요.”
성찬호 관장이 김홍도의 <씨름>을 보여주었다.
어렸을 때 할아버지와 WH배움 미술관에서 본 적 있다.
당시에는 씨름도 엿도 몰랐던 터라 그저 신기했고, 그보다는 풍속화를 그린 화가가 주목받았다는 데 놀랐었다.
“여기에 재밌는 비밀이 숨겨 있는데 혹시 알고 있을까요?”
“모르겠어요.”
비밀이 있단 말에 <씨름>을 집중해서 살피니 성찬호 관장과 할아버지, 박재욱 사무관 모두 차분히 기다려주었다.1)
“아.”
오른쪽 아래 사람의 땅을 짚은 손이 반대다. 오른손이 있어야 할 자리에 왼손이 있다.
“손이 반대네요.”
“이렇게 이상한 점을 찾는 게 단원 김홍도 작품을 보는 재미죠.”
“다른 작품도 그래요?”
실수가 아닌 모양.
“그럼요. 아마도 그림을 보는 사람에게 또 다른 재미를 주고 싶었던 모양이에요. 대표적으로 활쏘기란 그림이 있지요.”
성찬호 관장이 <씨름> 반대편에 걸린 <활쏘기>를 가리켰다.2)
“여기 활을 쏘는 사람의 발이 반대로 되어 있지요?”
활을 안 싸봐서 잘 모르겠지만 딱 봐도 자세가 엉거주춤하다.
“원래는 앞발이 다른가 봐요?”
“네. 김홍도는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보면 쉽게 알아챌 수 있는 수수께끼를 남기곤 했습니다.”
성찬호 관장이 다시 <씨름>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이 작품에는 또 하나의 비밀이 있는데. 어때요. 알아보겠어요?”
“음.”
아무리 봐도 모르겠다.
“모르겠어요.”
“마방진이라고 들어봤어요?”
“마방진?”
“가로, 세로, 대각선의 수를 합하면 모두 같은 수가 되는 건데 조선에서도 여러 의미로 받아들여졌죠. 여기 씨름에서는 독특한 마방진을 활용했고요.”
설명을 들으니 기억이 난다.
“가운데에 두 명이 있죠?”
“네.”
“왼쪽 상단과 하단에 각각 8명, 5명. 우측 상단과 하단은 각각 5명과 2명이 있고요.”
“네.”
“8과 2, 2로 떨어지는 대각선의 합이 12고 반대 방향의 대각선의 숫자를 합해도 12가 되죠.”
“그러네요.”
“12는 완전한 숫자였습니다. 십이지라든가 십이시를 썼던 것처럼요.”
동양에서도 서양에서도 12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1년을 12달로 나눈다든지 하루를 오전과 오후 각각 12시로 나눈다든지.
올림포스의 십이신, 예수의 열두 제자 등 여러 곳에서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김홍도는 이 그림에서 많은 사람이 모여서 꽉찬 느낌을 주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 * *
1)씨름, 김홍도, 단원풍속도첩,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2)활쏘기, 김홍도, 단원퐁속도첩, 국립중앙박물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