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외전 29화
Golden Age
5. 사랑과 용기(4)
[공항에 울린 때 아닌 욕설]
[러시아를 향한 분노가 극에 달하다]
[고훈, 전범을 향해 독설 내뱉다!]
9일, 파리 보자르 교수 겸 화가 고훈이 샤를 드 골 공항에서 러시아 전쟁범죄자 볼로디치카 미틴을 강력히 비난했다.
이날 고훈은 모스크바 국제 아트페어에서 공개한 <황금이 녹아내린 땅>을 해설한 데 이어 우크라이나 희생자와 러시아 내부 반전주의자를 위로했으며 말미에 Ебанат라는 러시아 비속어를 덧붙였다.
고훈을 마중하고자 샤를 드 골 공항을 찾은 이들은 고훈에게 호응하며 10여 분간 Ебанат을 연호했다.
관계자들은 고훈이 대상을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침략 전쟁을 일으킨 전범 볼로디치카 미틴을 노린 발언으로 추측하고 있다.
평화와 사랑을 말해왔던 고훈이 공식석상에서 비속어를 입에 담은 건 이례적인 일이다.
미술계에서는 고훈의 발언이 과격했다는 이유로 그의 안위가 걱정된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편 관련 사이트에는 고훈의 과격한 발언을 두고 속이 시원하다, 용기 있는 발언이다 등 긍정적인 의견을 내놓고 있다.
└미친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 세계에 10분 동안 울려퍼진 ㅅㅂㄴㅋㅋㅋㅋㅋㅋㅋ
└방송사고 아니냐곸ㅋㅋㅋ
└사고짘ㅋㅋ 엄청 큰 사고지
└아니 저기 있는 사람들 다 몰랐던 거야?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았겠지 저 기세를 몇몇이서 어태 막음ㅋㅋㅋㅋ
└훈이 진짜 미틴한테 욕한 거야?
└앞뒤 생각하면 설마 우크라이나인이나 러시아 내부 반전주의자한테 했겠음? 당연히 미틴한테 한 거짘ㅋ
└우리 훈이가 달라졌어욬ㅋㅋㅋ
모스크바 한복판에서 이뤄진 날카로운 비판과 더불어 원색적 발언으로 전 세계가 떠들썩할 무렵.
“아핰핳핰항핰핰!”
고훈이 갑작스레 비속어를 꺼낸 경위를 전해 들은 차시현은 배를 잡고 뒹굴었다.
우크라이나인과 미틴 정부로부터 탄압받은 러시아인을 위로하고 응원하고자 꺼낸 말이 욕설이라니 믿을 수 없었다.
“재밌어?”
소파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친구를 보던 고훈이 힘없이 물었다.
“흐히잉흐끄윽끅힣히.”
차시현은 웃다 지쳐 흐느끼면서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하아.”
고훈이 레나 자고예프를 보았다.
의자에 앉은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자고예프 씨도 그만해요.”
레나 자고예프가 고개를 저었다.
말뜻을 잘못 알려준 탓에 고훈이 하지 않아도 될 실수를 했으니 모든 게 본인 탓이었다.
그녀는 고훈 앞에서 험한 말을 꺼낸 것부터 그것을 감추려 한 점과 나중이라도 원래 뜻을 알려주지 않았던 일 모두 깊이 후회했다.
“이미 이렇게 된 걸 어떡해요. 계속 그러고 있을 거예요?”
“……아니요.”
“그럼 고개 들어요.”
레나 자고예프가 고개를 들었다.
“책임질게요.”
“그럴 필요 없어요.”
평소였다면 웃고 넘길 일이었다.
의도하지 않은 상황과 상황이 맞물려 벌어진 사고였다.
“그럴 순 없어요. 앞으로 교수님이 먹는 음식은 전부 먼저 먹을게요.”
“……네?”
“독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레나 자고예프의 심각한 태도에 흐느끼던 차시현마저 웃음을 멈추었다.
고훈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럴 리 없는 일이 여러 번 일어났어요.”
러시아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반(反) 미틴 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녹차를 마시고 사망한 일이 여럿 있었다.1)
그들이 마신 녹차에는 풀로늄이라는 희귀한 물질이 들어 있었는데, 이는 1μg(마이크로그램)만으로도 성인 한 사람을 사망에 이르게 하는 강력한 방사성 물질이었다.
문제는 그것이 전 세계에서 연간 100g밖에 생산되지 않으며 보관기간도 짧아 개인이나 단체로서는 구할 수 없는 물질이라는 점이었다.
국가 규모 기관에서만 다룰 수 있고, 반 미틴 운동에 앞장섰던 이들이 살해당했으니 배후에 미틴이 있다는 건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무서워.”
레나 자고예프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여 차시현은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지면 어떡하나 걱정되었다.
“오래 가진 않을 거예요.”
레나 자고예프가 고훈을 안심시켰다.
“그가 살 날도 얼마 안 남았어요. 몇 년만 버티면 돼요. 그때까지 책임지고 지켜줄게요.”
올해로 86세인 볼로디치카 미틴은 전쟁을 일으키기 이전부터 건강에 이상을 보였다.
러시아 내부에서도 그가 오래 살지 못할 거란 이야기가 돌았고, 그것은 반 미틴 운동과 반전주의자, 평화주의자, 민주주의자들이 결속할 수 있는 동기가 되었다.
레나 자고예프의 말을 심각하게 듣던 고훈이 고개를 저었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그래도 그럴 필요는 없어요.”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걱정이 지나치단 생각도 들었다.
러시아는 지금도 전 세계를 상대로 제재 조치를 받고 있으며 국가 내부에서도 시위가 계속되고 있었다.
고훈은 그들이 본인에게까지 손을 쓸 여력이 없다고 믿고 싶었다.
‘설마.’
고훈이 긴장을 풀고자 냉장고에서 주스를 꺼냈다. 뚜껑을 따 입에 대려는 순간 레나 자고예프가 그에게서 주스를 빼앗아 벌컥 들이켰다.
“…….”
시원하게 주스를 마신 레나 자고예프가 잠시 고훈을 바라보더니 반쯤 남은 병을 넘겼다.
“괜찮은 것 같아요.”
“아니.”
레나 자고예프가 진심으로 기미를 한다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녀가 한 말이 신경 쓰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빨리 뱉어요!”
“삼켰어요.”
고훈이 레나 자고예프의 입에 손가락을 집어넣으려 하자 그녀가 흠칫 뒤로 물러섰다.
“뭐 하시는 거예요?”
“토해야죠. 독이라도 들어 있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레나 자고예프가 당황한 고훈을 보고는 이성을 되찾았다.
“거봐요. 교수님도 걱정하잖아요.”
“그건.”
“걱정 마세요. 끝까지 책임질 테니까.”
“아까부터 책임이라고 하는데 어떤 사람이 독이 들었을지도 모르는 걸 남한테 먼저 마시게 해요.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당신한테.”
“내 잘못이고.”
“잘못 아니라고 했어요.”
“교수님이 다치는 걸 보고만 있을 수도 없어서.”
“그건 나도 마찬가지예요.”
고훈과 레나 자고예프의 대화를 지켜보던 차시현이 미간을 좁혔다.
“나 나갈까?”
* * *
[볼로디치카 미틴 뇌졸중으로 중태]
[러시아 혁명 세력 결집 중]
[미 국방부, “러시아 군경 여력 없어.”]
2038년 8월 19일.
독재자이자 전쟁범죄자 볼로디치카 미틴이 뇌졸중으로 쓰러졌단 소식이 전 세계에 보도되었다.
각국 주요 언론사는 미틴이 고혈압과 뇌졸중으로 의식불명 상태며 사망에 이르지 않더라도 심각한 후유증을 앓을 거라고 전했다.
이에 발맞춰 러시아 내부에서 볼로디치카 미틴의 독재에 저항하고 전쟁에 반대했던 시민들이 거리로 나서니.
무리한 전쟁으로 인해 경제와 행정력, 군사력이 무너진 러시아 독재정권은 바람 앞의 촛불과 다름없었다.
└뭘 쓰러져 그냥 죽지
└히틀러 엔딩일 줄 알았는데.
└러시아 시위대 사진 보면 국기랑 노란색 깃발 같이 들고 있네?
└EIE 운동 이후로 평화의 상징이니까. 잘 보면 고훈 해바라기 그려진 깃발도 있음.
└근데 타이밍이 되게 묘하다. 모스크바 국제 아트페어하고 겹치잖아.
└ㅋㅋㅋㅋㅋㅋ훈이 인터뷰 때문에 혈압 올랐을지도 모르지.
└ㅋㅋㅋㅋㅋㅋ아 그거?
└그건 아닐걸? 미틴이 원래 고령이기도 했고 최근 사진 보면 젊었을 때보다 살도 많이 쪘음. 고혈압이야 앓고 있었겠지.
└86살이었구나
└레닌하고 스탈린, 미틴 다 뇌졸중으로 죽네ㅋㅋㅋㅋㅋ2)
└그러고 보니 그러네?
└러시아 독재자 징크스인 듯.
└시위대 다치지 말아야 할 텐데.
└미틴도 쓰러졌고 정부도 진압할 의지가 없을 듯. 솔직히 우크라이나 침략했을 때 자기 군인들도 속였다며. 거기서 죽은 사람이 얼만데.
└그걸로 가족이랑 친구 잃은 사람 엄청 많대. 게다가 경제 제재로 가계도 박살났으니 혁명 안 일어나는 게 이상하지.
└그래도 너무 쉬운 거 아님?
└러시아 내 힘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불만 많았음. 경제 제재로 부호들 재산 수조원 날라간데다 나중에는 그 사람들이 가진 달러, 유로도 징수했으니까.
└권력층한테도 가차 없었구나.
└오래 가긴 힘들 것 같다.
모스크바 국제 아트페어 이후 러시아 정국은 격렬히 요동쳤다.
고훈을 이용하려 들다가 되레 망신만 당하니, 그동안 볼로디치카 미틴의 폭정과 하이퍼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경제 파탄으로 고통받던 러시아인들이 궐기하고 나섰다.
그들은 전 세계를 물들였던 EIE운동의 구심점이자 사랑과 해바라기를 상징하는 노란색 깃발을 들었고.
독재자를 잃은 러시아 정부는 이에 대응할 의지마저 없었다.
앙리 마르소로부터 증여받은 파리 최고의 피자 매장 파비용에서 식사를 하던 차, 러시아의 소식을 접한 고수열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좀 살겠구나.”
독이 든 음식을 먹을지도 모른단 걱정에 고훈과 고수열은 지난 열흘간 식재료를 엄격히 검수하는 파비용에서 식사를 해왔다.
그간 마르소 저택과 파비용을 오가며 어떻게든 버텼지만 나이 든 고수열에게는 담백하고 얼큰한 한식이 절실했고.
때문에 러시아에서 들려온 소식이 반갑기 그지없었다.
“힘드셨죠.”
“이만하길 천만다행이지.”
러시아 정국이 점차 나아지고 있다니 이 불안한 생활도 오래가진 않을 듯싶었다.
“저 때문에 괜한 고생하셨어요.”
“이 녀석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할애비가 너 고생하는데 마음이나 편히 있을 수 있겠어?”
“그래도요.”
고훈이 할아버지를 살폈다.
굵은 목과 팔뚝, 탄탄한 가슴 등 겉보기에는 여전히 강인해 보였으나 고수열의 나이도 올해로 75세였다.
소화기관 기능이 떨어질 수밖에 없으니 양식을 소화하는 게 쉽지 않을 터였다.
“괜찮다. 할애비 아직 안 죽는다.”
고수열이 다 큰 손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랑스러운 일을 했으면 가슴을 펴야지. 네가 후회하면 저 사람들은 어디에 의지를 하겠니.”
본인과 주변 사람들에게도 피해가 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 사람으로서 후회하기 마련이었다.
고훈 또한 잠시 흔들렸으나 끝내 마음을 다잡았었다.
“맞아요.”
고훈이 고수열의 말에 동조하고는 이내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할아버지.”
“껄껄껄. 그래. 할애비도 네가 이렇게 잘 커줘서 고맙다.”
고수열이 손자와 마주보고 웃었다.
“그건 그렇고. 내 아무래도 당분간은 한국에 가 있어야겠다.”
“무슨 일 있어요?”
“별일은 아니고 그냥 이것저것 볼일이 좀 있어.”
“역시 힘드셨죠?”
고훈이 할아버지의 마음을 눈치채고는 확인차 물었다.
상황이 어느 정도 해결되었으니 한국에 돌아가 된장찌개처럼 속이 편해지는 음식을 접하고 싶은 듯했다.
“끄응.”
고수열은 손자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너도 다른 일 없으면 잠깐 다녀오자.”
“무슨 일이 있는 거예요?”
“이번에 네가 반환받은 문화재로 전시회를 꾸미는데 내게 자문을 구하더구나. 훈이 네가 한 일이니 같이 보는 게 좋지 않겠니.”
반가운 일이었다.
반환 이후 문화재를 어디에서 보관할지 논쟁이 있던 탓에 아직 대중에 공개되지 않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두기로 했어요?”
“그래. 잘 마무리되었다고 하더구나.”
시민들이 찾기에 용이하고 시설 등 국보급 문화재 100점을 보관하고 전시하기에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제격이었다.
“다행이네요.”
“어떻게 할래.”
“가야죠. 학기 시작하기 전에 끝나면 좋을 텐데.”
어느덧 8월이 다 가고 있었다.
새학기가 시작되는 9월부터는 강의를 나가야 하니 그 전에 서둘러 다녀오고 싶었다.
“그래야겠지. 그럼 서둘러보자꾸나.”
* * *
1)홍차로 알려져 있으나 기원은 녹차였다.
2)2011년에 공개된 소련 비밀 문서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이 뇌출혈로 사망했음이 밝혀졌다. 증상이 발견되었으나 주변을 믿지 못해 고립생활을 하던 탓에 제때 조치를 받지 못했다.
한편 블라디미르 푸틴 또한 코로나19 발발 이후 타인과의 접촉을 최소화하고 있음이 보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