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외전 28화
Golden Age
5. 사랑과 용기(3)
‘이거였어.’
러시아 정부 인사들이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에 이인호 기자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러시아가 미리 전시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일부러 하얀색 물감이 천천히 변색되도록 의도한 일부터.
이후 러시아가 작품을 훼손할 수 없도록 앙리 마르소가 낙찰받은 일까지 모든 일이 완벽했다.
이인호는 모든 일이 러시아의 언론 공작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계획되었다고 확신했다.
‘처음부터 응할 마음이 없었던 거야.’
러시아가 먼저 언론 공작을 펼치면서 고훈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둘뿐인 것처럼 보였다.
문화재를 반환 받고 러시아의 체제 선전에 어울리든가.
문화재를 포기하고 러시아의 만행에 저항하든가.
이 같은 양자택일의 상황에서 세계 모든 언론이 고훈의 거취를 다루었다.
그러나 고훈은 어느 쪽도 응하지 않았다.
러시아와 같은 대국을 상대로 반환 예정이던 문화재의 10배에 가까운 수량을 요구해 받아냈으며.
동시에 러시아의 수도 한복판에서 그들의 만행을 통렬히 비판했다.
전범국가의 요구를 들어주었단 비난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간 것이었다.
이인호는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희열을 용기삼아 소리쳤다.
“황청기가 또다시 훼손되는 겁니까!”1)
모두의 이목이 이인호에게 향했다.
“고훈 작가는 어디 있습니까! 안전한 겁니까! 협박으로도 모자라 이젠 구금까지 하는 겁니까!”
이인호가 목놓아 외친 말들에 외신 기자들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본인의 작품이 경매에 오르고 함께했던 앙리 마르소가 나선 지금도 고훈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문득 고훈이 러시아로부터 보복이라도 당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고훈 작가는 어디에 있습니까!”
“본인 작품 경매에 참가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왜 나오지 않으신 겁니까! 못 나온 건 아닙니까!”
이인호가 다시 한번 소리치자 외신 기자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거들었다.
고훈의 안위를 묻고, 그가 어디에 있는지 혹은 구금한 건 아니냐는 수위 높은 질문이 쏟아졌다.
당황한 로만 페시코프 장관과 유리 아킨페프는 어떻게든 외신 기자들의 입을 막고 싶었으나 이미 경매장은 전 세계에 중계되고 있었다.
전쟁 이전보다 피폐해진 국가 재정 상태를 어떻게든 쇄신하고 싶었던 그들로서는 무작정 앙리 마르소와 외신 기자들을 제재할 수 없었다.
그들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마련한 자리가 되레 본인들의 목을 조르는 행태였다.
“여기 있어요.”
로만 페시코프 장관이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을 때 고훈이 경매장을 찾았다.
“작!”
어느 한 기자가 질문을 하려다가 멈칫했다.
<황금이 녹아내린 땅>에 무슨 의도를 담았는지 작가 본인에게 직접 묻고 싶었으나 이곳이 러시아 수도임을 상기했다.
우크라이나 국기를 상징한 작품이라고 답하기엔 고훈에게 가는 부담이 너무도 컸다.
미술과 고훈을 사랑하기에 설사 상급자에게 문책을 받는다 해도 그 질문할 수 없었다.
외신 기자 모두 같은 마음으로 묵묵히 고훈을 중계 카메라에 담을 뿐이었다.
묘한 긴장감이 도는 경매장 가운데로 천천히 걸어나온 고훈은 파랗게 변색된 <황금이 녹아내린 땅>과 넘어진 채 떨고 있는 유리 아킨페프 그리고 그런 그를 막아선 앙리 마르소를 확인하곤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게 아니었는데.’
앙리 마르소가 <황금이 녹아내린 땅>을 낙찰받는 건 고훈의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어쩔 수 없지.’
고훈은 일이 비록 의도한 방향대로 흘러가진 않았지만 이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판단했다.
“많이들 궁금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고훈이 기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하지만 일정이 빠듯해서 좀 피곤하네요. 인터뷰는 돌아가서 천천히 했으면 합니다.”
중계 방송을 지켜보는 전 세계 수천만 명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찾아와 주신 분들께 예의는 아닌 것 같으니 비행편을 마련해 드리고 싶네요.”
고훈이 앙리를 보았다.
“괜찮죠?”
“뭐?”
“이대로 돌려보낼 순 없잖아요. 비행기 좀 같이 타자고요.”
예정대로 고훈이 작품만 제출하고 귀국했다면 모를까.
고훈의 안위를 걱정한 기자들이 그렇게 목소리를 높였으니 그들이 무사히 귀국할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내가 왜.”
“당신 때문이니까?”
고훈이 싱긋 웃어 보였다.
그러나 이마에는 힘줄이 돋아나 누가 보더라도 화가 단단히 났음을 알 수 있었다.
* * *
[모스크바에 꽂힌 황청기]
[고훈, 러시아의 심장에 비수를 꽂다]
[기자단 전원 앙리 마르소 전용기로 무사 귀환]
[황금이 녹아내린 땅 변색의 비밀은?]
[앙리 마르소, “창문에 낙서하고 간 놈 자수해라.”]
[러시아 정부 아직 공식 입장 전하지 않아]
고훈과 앙리 마르소가 파리에 도착하자 전 세계가 열광했다.
러시아 수도에서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을 강력히 비판한 데다 기자단까지 무사히 데려오니 두 예술가를 연호하는 목소리가 파리를 뒤덮었다.
“여기는 파리 샤를 드 골 공항입니다. 조금 전 귀국한 고훈과 앙리 마르소를 환영하기 위한 인파로 가득합니다.”
샤를 드 골 공항은 고훈과 앙리 마르소를 맞이하기 위해 나선 이들로 붐볐다.
거대한 나라를 상대로 한 예술가가 보인 긍지에 호응하고자 목이 터져라 그의 이름을 반복해 외쳤다.
“고훈! 고훈!”
고훈과 앙리 마르소, 기자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시민들은 손과 꽃을 흔들며 그들을 환영했다.
“어떤 놈이야!”
앙리 마르소가 노성 가득한 목소리로 추궁했다.
버러지처럼 여기는 기자들을 태운 것만으로도 성질이 나건만, 한쪽 창문에 누군가 남긴 낙서 때문에 화가 머리 끝까지 올라왔다.
‘앙리 비행기 탔다. 생각보다 넓진 않음.’
“찾을 때까지 돌아갈 생각 마. 알아들어?”
앙리 마르소가 기자들을 위협하자 고훈이 고개를 저었다.
비행기에 타고 있음에도 러시아가 어찌 나올지 확신할 수 없어서 조마조마했던 터라, 고작 낙서 하나로 펄펄 날뛰는 앙리 마르소를 보니 맥이 풀려버렸다.
기자들도 영문 모를 일로 화내는 앙리 마르소는 무시하곤 고훈에게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작가님! 황금이 녹아내린 땅이 우크라이나 국기를 상징한다는 평에 동의하십니까?”
“처음부터 계획하신 일입니까?”
“변색 원리가 무엇입니까!”
“홍차를 받진 않으셨습니까!”
기자들이 질문을 퍼붇자 방태호가 고훈을 보호하며 앞으로 나섰다.
“지금 작가님께는 휴식이 필요합니다. 추후에 자리를 마련할 테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작가님! 작품 의도에 관해서 한 말씀만 부탁드립니다!”
“지금 심경이 어떠신가요!”
방태호가 기자들을 열심히 막아섰지만 역부족이었다.
한 사람의 예술가가 대국에 대항하고 무사히 돌아온 기적 같은 순간이었기에 그 기세가 남달랐다.
“괜찮아요. 아저씨.”
“그래도.”
“저 인간 저러는 거 보니까 괜찮아졌어요.”
고훈이 앙리 마르소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여전히 창문에 낙서를 한 기자를 찾고 있었다.
대범한 건지 옹졸한 건지 구분할 수 없었으니 적어도 잔뜩 긴장했던 마음은 한결 나아졌다.
고훈은 숨을 고르고 기자들 앞으로 나섰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항을 빼곡이 채운 사람들이 그를 향해 해바라기를 흔들고 있었다.
“여러분이 지켜봐 주신 덕에 무사히 왔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고훈! 고훈! 고훈!”
고훈이 머리 숙여 인사하자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다시 한번 목소리를 높였다.
그 열기는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고 공항 건물이 울릴 정도로 뜨거웠다.
“처음 러시아가 기사를 냈을 때 많이 당황했어요.”
고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공항을 찾은 이들은 그의 말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국내에 문화재를 반환받길 바라는 분들이 정말 많았고 저 역시 그랬으니까요. 그래서 아쉬움이 많이 남아요. 언젠가는 문화재를 돌려받을 수 있는 길을 제 손으로 끊은 것 같아서.”
고훈의 목소리가 다소 떨렸다.
불가능한 일을 해내고도 모든 문화재를 돌려받지 못했다고 자책하는 그 모습에 공항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하냐고ㅠ
└큰일 날 수도 있었는데 무사히 돌아온 것만 해도 다행이잖아.
└훈이 저 말만 봐도 얼마나 압박이 심했는지 알겠다. 진짜 문화재 가져오라고 한 놈들 다 반성해야 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아니, 어렵다고 해도 이 일에 관해서는 끝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고훈이 문화재 반환 운동을 이어가겠단 말을 꺼내자 박수 소리가 공항 건물을 가득 채웠다.
“작품은……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의도가 맞습니다. 가족과 고향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으신 분들께 여러분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다고. 그 땅에 다시금 밀이 자라날 거라고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한 폭력 행위에 죽어간 이들을 기리며.
그들이 지킨 자리에 다시금 황금빛 생명이 탄생할 거라고, 분명 그럴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사실 그 그림이 온전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어요. 분명 어떤 방식으로든 훼손될 거라 생각했는데,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러시아가 다시 우크라이나를 향해 폭력을 가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들의 민낯을 고발하고 싶었습니다.”
고훈이 잔뜩 성이 나 씩씩거리는 앙리 마르소를 보았다.
“그래서 앙리가 경매에 참여했을 땐 한 대 쥐어박고 싶었는데.”
고훈의 목소리에 집중하고 있던 사람들이 눈을 깜빡였다.
“다시 생각해 보니 모스크바에서 우크라이나 국기를 상징하는 그림이 보호되는 모습이 더 좋겠다 싶더라고요. 그에겐 항상 도움만 받는 것 같아요. 고마워요, 앙리.”
공항에 모인 이들이 앙리 마르소를 연호하며 박수를 보냈다.
“변색이 된 원리는 무엇입니까?”
분위기가 다소 가라앉자 기자들이 하나씩 질문을 던졌다.
“검열할 게 분명해서 눈을 속이려고 이것저것 찾다 보니 예전에 그린 그림이 눈에 들어왔어요.”
빈센트 반 고흐의 이름으로 그린 그림이었으나 그 사실을 밝힐 순 없었다.
“빛에 노출되어서 색이 변했으니까 의도적으로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서 찾아봤는데 생각보다 쉽게 구할 수 있더라고요. 온도 변화나 빛을 받으면 색이 변하는 염료요.”
고훈은 특수염료와 날염처리 방식을 떠올리며 설명을 이어갔다.
“다행히 흰색에서 파란색으로 변하는 것도 구할 수 있었는데 시간을 조절하는 게 조금 힘들어서 전시하기 전까지는 빛을 완전히 차단해야 했어요. 그래서 직접 들고 갈 수밖에 없었고요.”
<황금이 녹아내린 땅>의 제작비화를 들은 이들이 저마다 감탄하거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아이디어도 놀랍거니와 그런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작품을 전시한 담력 또한 감탄이 절로 나왔다.
“러시아의 향후 방침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응하실 건가요?”
“어렵네요.”
한 기자의 질문에 고훈이 쓴웃음을 지었다.
어떻게든 러시아가 보유한 문화재를 돌려받고 싶었으나 그러기에는 그들의 치부를 너무도 적나라하게 폭로했다.
“그분들이 어떻게 나올지는 잘 모르겠어요. 다만 적어도 러시아 내부에도 전쟁을 반대하신 분들이 계시단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술을 사랑하시는 분도요.”
고훈이 카메라를 응시했다.
혹시나 러시아 정부와 관련된 인물이 이 방송을 지켜보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진심을 다했다.
“그런 분들이 상처받지 않길 바라고 러시아 정부에 뜻있는 분들이 힘을 내주시길 바랍니다.”
고훈이 사뭇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Ебанат.”
사랑과 용기 그리고 거만함이 이뤄낸 기적 같은 일이었다.
* * *
1)조우토블라키트니 프라포르(Жовто-блакитний прапор): 황색-청색기. 우크라이나 국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