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431화 (431/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외전 27화

Golden Age

5. 사랑과 용기(2)

“돌아가지 않았다고?”

“네. 대기실에 있습니다.”

“흐음. 조금 전만 해도 그렇게 날을 세우더니만 변덕은.”

고훈 일행이 돌아가지 않았단 소식을 접한 유리 아킨페프가 어깨를 으쓱였다.

“필요한 건 전부 들어줘. 그보다 기자들 입단속에 신경 쓰고.”

“외신 기자들은 어떻게 할까요.”

“적당히 내버려 둬. 전쟁은 끝났으니 괜히 마찰 만들지 말고.”

전쟁을 벌이며 러시아는 얻는 것보다 잃은 것이 많았다.

과거에는 침략으로 부를 취할 수 있었지만 현대에 접어들어서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고도로 발달한 경제 체제는 단순히 땅을 얻었다고 해서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않았고 러시아가 얻은 것이라고는 독재자가 본인 권력을 더욱 확고히 한 것뿐이었다.1)

지금도 여러 제재 조치로 경제가 파탄 수준에 이르렀으니 이 이상 적대 국가를 늘리기에는 부담이 컸다.

“네. 알겠습니다.”

* * *

오후 1시.

모스크바 국제 아트페어 행사장이 부산스러워졌다.

중앙전시장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자리에 한 작품이 운송된 탓이었다.

가장 주목받는 자리에 누구의 그림이 걸릴지는 너무나도 명백했고, 세계 각국의 언론사와 수집가 그리고 방문객들 모두 한곳에 몰려들었다.

“드디어 공개되는구만.”

“그러게. 이거 참.”

유럽에서 취재 나온 기자들이 기대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모처럼만에 고훈이 신작을 발표하는 자리가 모스크바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그들은 지난 수년간 수많은 사람을 위로하고 사랑으로 보듬었던 고훈을 떠올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어때?”

이인호 기자가 함께 출장 온 이에게 물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작품이 카메라에 잘 담길지 의문이었다.

“그럭저럭이요.”

이인호는 인터넷 중계가 잘 되는지 확인했다.

러시아가 인터넷을 통제한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다행히 인터넷 생중계에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뭐야 아직 시작 안 했나 보네?

└당근! 당근을 찾자!

└저기 포장되어 있는 게 훈이 그림인가?

└아 진짜 왜 나가냐고 ㅠㅠ

└그만 좀 해라 나가랬다가 나가지 말랬다가.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내가 다 빡치네

└오늘이 고훈 장례식임?

뉴튜브 중계방송에 30만 명이 넘게 접속해 있었고 채팅창은 제대로 확인하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올라갔다.

눈살이 찌푸려지는 말이 심심치 않게 보일수록 이인호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사람들이 여러 낭설에 흔들리지 않도록 고훈이 어떤 사람인지 사실 그대로 전달하자고 되뇌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이내 모스크바 국제 아트페어의 책임자 유리 아킨페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훈은?”

“안 보이는데?”

“돌아갔나?”

“나오기 싫겠지. 러시아 놈들이 뭘 물어볼지 뻔한데 누구 좋으라고 나오겠어.”

외신 기자들이 저마다 수군거렸으나 유리 아킨페프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오늘처럼 뜻깊은 날에 함께해 주신 여러분께 인사드립니다. 모스크바 국제 아트페어의 책임자 유리 아킨페프입니다.”

러시아인들이 박수를 보냈다.

“위대한 러시아 연방이 승리를 쟁취한 지 3년을 맞이한 기념일에 멀리 파리에서 축전이 도착했습니다.”

외신 기자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소속 언론사의 지시로 고훈을 비판하기 위해 왔다지만 그들 중에도 고훈의 작품을 사랑하는 이들이 있었다.

유럽 내 여러 사회 갈등을 보듬었던 영웅적 화가가 이러한 취급을 받는 데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꼈다.

동시에 러시아의 조건을 수락한 고훈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황금의 화가, 사랑의 화가. 고훈 작가의 황금이 녹아내린 땅입니다.”

유리 아킨페프의 소개와 함께 <황금이 녹아내린 땅>이 공개되었다.

자애로운 햇빛을 고스란히 머금은 황금빛 밀밭이 펼쳐지자 일순간 소란스러웠던 행사장이 고요해졌다.

그들이 접했던 그 어떤 작품보다도 고결한 노란색이었다.

새하얀 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진 신의 은총은 고훈이 왜 황금의 화가로 불리는지 다시금 각인시켰다.

“오오오.”

고훈의 작품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찾은 수집가들은 침음성을 흘렸고.

러시아 미술계 종사자들은 <황금이 녹아내린 땅>에 압도되어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순백의 하늘 아래 고귀하게 빛나는 밀은 러시아 연방의 미래를 보여주는 듯합니다.”

감격에 젖은 이들의 귀에 불결한 말이 들렸다.

유리 아킨페프는 장관의 눈치를 보며 고훈의 의도를 왜곡해 풀어내기 시작했고 이에 외신 기자들은 불만을 내비쳤다.

“빌어먹을 놈들.”

“아주 제멋대로 구는구만.”

“서리 밀밭에 버금가는 작품이 하필 이런 곳에서…….”

아쉬움을 토로하는 기자들 사이에서 이인호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토록 훌륭한 작품이 저들에 의해 유린당하고 희롱당하는 현실이 분하기 짝이 없었다.

└그냥 빈 캔버스 보내지 ㅠㅠ

└엿 먹으라고 그랬으면 러시아에서 못 돌아오게 될걸.

└그림이 너무 아름다워서 더 슬프다. 저거 그릴 때 무슨 마음이었을까.

└고훈한테 문화재 가져오라던 놈들은 다 어디 갔냐 ㅅㅂ

└지들 얻을 거 다 얻었으니 관심 없단 거겠지. 이제 훈이 화가 활동 안 하겠다고 하면 어떡함?

└반 고흐 <까마귀가 나는 밀밭>이랑 완전 정반대네.

└그러게. 하늘은 하얗고 표현된 바람도 순풍 느낌임.

└이 상황에서 저렇게 평화로운 그림을 그렸다는 게 난 믿기지 않아.

└뭐가?

└훈이라고 안 분했겠어? 억울했을 거잖아. 그런데도 저런 그림 그리려면 자기를 얼마나 다스렸겠어.

└맞네.

└ㅋㅋㅋㅋㅋㅋ러시아 전범들하고 놀아난 놈한테 있는 거 없는 거 다 가져다 붙이네

└ㅗㅗ

└난 가끔 현대 문명이 원망스러워. 저런 놈들 예전 같았으면 맞아 죽었을 텐데 법 때문에 살아 있는 거잖아.

└개소리 길게도 하네. 저 해골처럼 생긴 놈 자꾸 뭐라는 거임?

└고훈이 <황금이 녹아내린 땅> 경매 시작한다고. 근데 유로랑 달러 등 정해둔 화폐로만 거래한대.

└루블 빼고 다잖앜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루블 개박살 난 데다 러시아 아니면 쓰지도 못함. 결국 러시아인들한테는 안 판다는 소리임.

└개인이 가지고 있을 수도 있잖아.

└러시아가 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외환을 남겨 두겠음?

└훈이 나름대로의 항의였네.

└그런가 봄.

└앙리가 저기 왜 갔나 싶더니 저거 사러 갔구나

└경매 시작했다.

“시작가 5만 유로로 경매 시작하겠습니다.”

경매사의 발언으로 <황금이 녹아내린 땅>의 경매가 시작되었다.

러시아가 전후 처음 여는 아트페어에서 타국가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참여한 작가의 작품이자.

전 세계로부터 추앙받는 화가 고훈이 3년 만에 발표한 그림이었으며 동시에 그에게는 씻지 못할 치욕의 밀밭이었다.

그러나 모순되게도 그의 작품 중 가장 빛나는 그림이었기에 수집가들은 앞다투어 입찰을 시도했다.

“10만!”

“15만!”

경매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러시아의 외화 정책으로 인해 달러 및 유로가 부족한 상황이라 러시아 수집가들은 금방 포기해야 했고.

고훈의 작품을 사고자 모스크바를 방문한 수집가들에 의해 입찰가는 순식간에 100만 유로에 달하고 말았다.

“150만 유로 나왔습니다. 150만 유로. 150만 유로. 160만 유로 불러봅니다.”

경매사가 경매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이들을 둘러보며 호가를 진행하는 가운데 한 수집가가 푯말을 들었다.

“감사합니다, 160만 유로 나왔습니다. 160만 유로. 바로 앞에 계신 43번 고객님 바로 드셨습니다. 180만 유로 찾습니다.”

긴 입찰 끝에 두 사람만이 남았다.

사람들은 250만 유로를 넘어선 치열한 입찰 경쟁을 흥미롭게 지켜보았고 끝내, 한 사람이 300만 유로에 따라붙지 못하자 박수를 보냈다.

“이 상황에서 300만 유로라니. 고훈이 대단하긴 하네.”

“그러게 말이야.”

“300만 유로뿐이겠어. 저 사람만 횡재했지.”

“제대로 된 환경이었으면 얼마나 갔을까.”

“500만.”

박수와 한탄, 감탄을 뚫고 시큰둥한 목소리가 울렸다.

500만 유로라니.

믿기지 않은 호가에 모두가 고개를 돌렸고 그곳에는 앙리 마르소가 다리를 꼰 채 거만히 앉아 있었다.

경매사는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었다.

“500만 유로. 500만 유로 나왔습니다.”

그녀는 직전에 입찰한 남자를 살폈으나 그는 이미 전의를 상실해 있었다.

호가를 높일 여지는 조금도 없어 보였다.

지금까지의 경쟁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호가하겠습니다. 500만 유로. 500만 유로. 500만 유로. 낙찰되었습니다.”

앙리 마르소가 낙찰을 받은 순간 사람들은 그의 재력이 혀를 내둘렀고 동시에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어?”

“저게 뭐야?”

<황금이 녹아내린 땅>의 새하얀 하늘이 조금씩 푸른빛을 띄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파랗게 변해버렸다.

모두가 놀라고 당황한 와중에 앙리 마르소만이 씩 웃고 있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사고 아니야? 색이 변했잖아.”

“어떻게 된 일입니까?”

“변색이 되지 않았습니까!”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수집가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꺼냈고 기자들은 모스크바 아트페어 조직위원회를 향해 질문을 쏟아냈다.

그러던 차 누군가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닮았어.”

“뭐가?”

“저 그림. 뭐랑 닮지 않았어?”

“그니까 뭐가?”

“……우크라이나 국기.”

<황금이 녹아내린 땅>의 참모습을 확인한 순간, 우크라이나란 단어가 언급된 순간 회장이 경직되었다.

“맞네. 우크라이나 국기 맞아.”

“설마 의도한 거야?”

“고훈! 고훈 작가님은 어디 계십니까!”

“러시아 수도에서 우크라이나 국기를 전시했다고?”

수집가와 기자들의 말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찍고 있어? 어? 찍고 있냐고!”

이인호 기자는 쾌재를 부르며 카메라 기자를 흔들었고 이 상황을 지켜보던 전 세계 수천만 명의 시청자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뭐야? 어? 뭔데?

└미쳤다

└찢었다

└우크라이나 국기가 밀밭이랑 하늘을 상징한다는 설이 있는데 그거 반영해서 그린 듯.

└나 소름 돋았어. 어떻게 하얀색이었던 게 파랗게 변한 거야?

└빛을 받으면 색이 바뀌는 염료가 있어. 특수안료로 날염처리 하면 가능함.

└와 ㅋㅋㅋㅋㅋㅋㅋ 제대로 속였네?

└나 훈이 믿고 있었어 ㅠ 믿고 있었다고오!

유리 아킨페프의 눈이 거의 튀어나왔다.

줄곧 여유로웠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황금이 녹아내린 땅>과 장관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

장관의 얼굴은 노기로 부풀어 곧 터질 듯했다.

고훈에게 속았다는 생각이 들자 이성을 잃고 말았다.

“내려!”

유리 아킨페프가 소리쳤다.

고훈을 데려와야 한다는 발상과 그를 초청할 방법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을 책임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독이 든 홍차로 편안히 죽을 수조차 없었다.

유리 아킨페프는 악에 받쳐 <황금이 녹아내린 땅>으로 향했다.

저것을 찢어발겨야만 분이 풀릴 듯했다.

“서.”

앙리 마르소가 앞으로 나서서 유리 아킨페프를 저지했다.

“비켜! 비키라고!”

유리 아킨페프가 앙리 마르소를 밀치려 했으나 삐쩍 마른 그로서는 무리였다.

도리어 앙리에게 밀쳐진 그는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건 내 거야.”

앙리 마르소가 유리 아킨페프를 내려다보다가 로만 페시코프 문화부 장관에게 시선을 보냈다.

“건들 수 있으면 해봐.”

오만한 태도에는 근거가 있었다.

프랑스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예술가로서의 입장을 차치하고도 앙리 마르소는 BNP파리바의 최대주주였고 동시에 세계 경제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러시아를 향한 다국적 경제 제재가 아직 풀리지 않은 상황에서 앙리 마르소까지 가세한다면 러시아로서는 막대한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끄으으으.”

로만 페시코프 장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 * *

1)Paul Krugman(1953~): 미국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2022년 3월 1일 뉴욕 타임즈에 「War, What is it good for?」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서 “Conquest doesn’t pay.” 즉 정복은 돈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현대의 경제 체제는 농경사회와 달리 땅만 있다고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전쟁을 통해 무너진 경제 시스템은 복구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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