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외전 26화
Golden Age
5. 사랑과 용기(1)
2038년 8월 9일.
여러 논란 속에 모스크바 국제 아트페어가 개최되었다.
전쟁 이후 러시아에서 처음 열린 대규모 국제 미술 행사였으나 미술계의 반응은 냉담했다.
세계 각국 미술인들은 예술을 체제선전 도구로 사용한 러시아를 비판하며 해당 행사를 보이콧했으며.
뱅크스, 이클립스 등 적극적인 예술가들은 러시아를 규탄하는 작품을 발표하는 데 이르렀다.
덕분에 모스크바 국제 아트페어는 러시아 정부의 대폭적인 지원으로 화려한 개막식을 올렸음에도 실상은 어용 예술인만 참여한 행사가 되었다.
당연히 수집가들 사이에서도 모스크바 국제 아트페어는 가치 없는 행사가 되었고 중앙전시장을 찾는 사람은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트페어 중계 방송은 러시아뿐 아니라 각국에서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는데 모두 화가 고훈을 지켜보기 위함이었다.
그가 정말로 모스크바 아트페어에 참가하는지 확인하려는 사람과 예술가로서의 긍지를 저버린 그를 비난하려는 이들.
그리고 온 세상을 사랑으로 물들인 고훈이라면 뭔가 다른 모습을 보여줄 거라 믿는 사람 등 모스크바 국제 아트페어는 전 세계 수천만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막이 올랐다.
“좋아.”
러시아 연방 문화부의 로만 페시코프 장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국제 여론이 어떠하든 세계 각국에서 모스크바 국제 아트페어가 중계되니 자국민들에게 러시아의 위상을 포장할 수 있었다.
또한 러시아 정부를 찬양하는 작품들이 만천하에 노출될 터.
고훈을 섭외하고 문화재 100점을 돌려주는 것으로 목표를 이룬 것이나 다름없었다.
“수고했어.”
로만 페시코프 장관으로부터 치하를 받은 유리 아킨페프가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래. 어디까지 왔다고?”
“30분 뒤에 도착한다고 연락 받았습니다.”
“혼자 왔나?”
“앙리 마르소와 그의 비서, 방태호 대표까지 네 명이 동행했습니다.”
“음.”
고훈에 더해 앙리 마르소까지 왔다는 소식에 장관이 흡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작품은 가져왔겠지?”
“네. 수행 보낸 직원이 확인했습니다. 다만 내용물은 극구 감추었다고 합니다.”
“흐음. 아무래도 찜찜해. 미리 확인하면 좋겠는데.”
로만 페시코프 장관이 신음했다.
러시아 연방 문화부로서는 그림을 전시하기 전에 검열 과정을 거치고 싶었기에 약속대로 문화재 100점을 개최일 전에 반환했지만.
고훈은 러시아를 신용할 수 없다는 이유로 작품을 직접 가지고 가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심려치 마십시오. 해바라기 관련해서는 이미 얘기해 두었습니다.”
“그건 장담할 수 없지.”
“모스크바로 직접 오는 일입니다. 그렇게 대담한 일을 저지를 순 없습니다.”
로만 페시코프 장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본인이 직접 가지고 오는 만큼 섣부른 행동은 하지 못할 것 같았다.
“영 이상한 그림을 가져올 수도 있지 않나.”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나 그 또한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고훈의 작품이라면 선 하나를 그려넣었다고 해서 문제될 일은 없습니다. 중요한 건 그가 모스크바 국제 아트페어에 참가했단 사실이니까요.”
“……그래. 사고 나지 않게 마지막까지 긴장 풀지 말고.”
“예.”
유리 아킨페프가 자신있게 답했다.
* * *
한편 모스크바에 도착한 고훈은 뜻하지 않은 동행을 신경 쓰고 있었다.
“진짜 말 안 할 거예요?”
“뭘.”
앙리 마르소가 퉁명스레 답했다.
“대체 왜 따라오냐고요.”
“누가 따라와.”
“너요.”
앙리 마르소가 고개를 돌려 답을 피했다.
파리에서 모스크바로 이동하는 도중 몇 번이고 따졌지만 대답을 들을 순 없었다.
“혹시 나한테 무슨 일 생길까 봐 그래요?”
그럴지도 몰랐다.
앙리 마르소는 고훈이 러시아의 정치선전에 어울리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때문에 얌전한 작품을 넘겨줄 리 없다고 생각할 테고, 그 때문에 해코지라도 당하진 않을까 걱정하는 듯 보였다.
“아니.”
“그럼 왜 따라와요.”
“쇼핑.”
전쟁을 정당화하고 독재 체제를 찬양하는 작품 일색인 모스크바 국제 아트페어에서 작품을 산다니 말이 안 되었다.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요?”
“믿지 말든가.”
고훈와 앙리가 티격태격하는 사이 그들을 태운 차량이 아트페어 행사장에 도착했다.
“환영합니다.”
마중 나온 유리 아킨페프가 고훈과 그 일행을 향해 미소 지었다.
“아르센.”
앙리가 턱짓으로 유리 아킨페프를 가리키자 아르센이 앞으로 나섰다.
“작가님께서는 혼자 휴식하실 공간이 필요하십니다. 20도 온도와 50%의 습도가 유지되며 방음이 되는 장소로 안내 부탁드립니다.”
VIP의 요청 치고는 비교적 무난한 요구 사항이었다.
유리 아킨페프는 주름 진 미소를 띤 채 흔쾌히 수긍했다.
“곧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고 작가님께선 어떠신지요. 다른 말씀이 없으시다면 마르소 작가님과 같은 방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필요 없어요. 곧 돌아갈 테니.”
통역가를 통해 말을 전달받은 고훈이 냉담히 답했다.
“이런. 하루 정도 푹 쉬셔도 좋을 텐데요.”
“좋아서 온 게 아닙니다.”
고훈의 눈은 적의로 가득했다.
‘자존심인가.’
목적한 바를 이룬 유리 아킨페프는 이 이상 그를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그럴 이유도 없었고 만약 고훈이 마음을 바꿔먹기라도 한다면 일이 복잡해질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하면.”
유리 아킨페프가 방태호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는 50호 정도로 보이는 캔버스를 들고 있었는데 두꺼운 종이로 겹겹이 둘러싸 안쪽을 확인할 순 없었다.
“전시하기 전에 잠시 확인해도 괜찮겠지요?”
고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언의 긍정으로 받아들인 유리 아킨페프는 직접 고훈 일행을 대기실로 안내했다.
“고훈이잖아.”
“정말로 왔어.”
“앙리 마르소도 있네?”
고훈과 앙리 마르소가 행사장에 들어서자 주변이 웅성거렸다.
사실상 러시아인들만 모인 자리에 세기의 거장 두 사람이 나타나니 무리도 아니었다.
유리 아킨페프와 수행원들이 막아섰음에도 고훈과 앙리 마르소를 보려는 사람들로 행사장이 붐볐다.
“작가님! 모스크바 국제 아트페어를 위해 축사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작품 공개는 언제 하십니까!”
“러시아 국민들께 인사 부탁드립니다!”
“러시아에서 3년 만에 개최된 국제 아트페어에 참가하신 소감이 어떠신가요?”
러시아 언론사 기자들이 앞다투어 고훈에게 인터뷰를 시도했다.
독재자에게 아양을 떨기 위해 존재하는 이들답게 하나 같이 고훈의 귀에 거슬리는 질문을 내뱉었다.
“크흠.”
유리 아킨페프가 앞으로 나섰다.
“작가님께서 먼길을 오시느라 피곤해하시니 인터뷰는 차후에 진행하도록 하지요.”
러시아을 위한 발언을 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으나 유리 아킨페프는 모험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미 목표를 이루었으니 고훈을 자극할 필요는 없었다.
러시아 언론사가 대부분이나 곳곳에 타국가 기자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고훈이 홧김에 폭탄발언이라도 했다간 곤란해질 수 있었다.
유리 아킨페프는 기자들을 물리고 고훈 일행을 대기실로 안내했다.
“안으로 드시지요.”
러시아가 고훈을 위해 준비해 둔 대기실은 앙리 마르소가 내건 조건을 충족하고도 넘쳤다.
문을 닫자 행사장 소음이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위스키 어떠십니까.”
유리 아킨페프가 일행에게 술을 권했지만 아무도 응하지 않았다.
고훈과 방태호는 여전히 주변을 경계했고 앙리 마르소는 탐탁지 않은 얼굴로 소파에 앉았다.
그의 비서 아르센은 무엇인가를 꺼내 방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찾으시는 거라도 있으신지?”
그를 의아하게 여긴 유리 아킨페프가 아르센에게 물었다.
“카메라나 도청 장치가 있는지 확인 중입니다.”
아르센이 유리 아킨페프를 보며 씩 웃었다.
“하하. 설마요.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났더군요.”
유리 아킨페프의 얼굴이 굳었지만 아르센은 개의치 않고 대기실을 꼼꼼히 살폈다.
“빨리 끝내죠.”
고훈이 유리 아킨페프를 불렀다.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미소를 지은 채 고훈을 향했다.
“이제 보여주시겠습니까.”
고훈이 방태호에게 시선을 주었다.
방태호가 끈을 풀르자 <황금이 녹아내린 땅>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제목 그대로 지평선까지 이어진 광활한 밀밭이 황금처럼 빛나고 있었다.
절제된 임파스토 기법으로 강렬하게 표현된 밀은 생기 가득했다.
유리 아킨페프가 눈을 크게 뜨고 감격했다.
“놀랍습니다. 정말 놀랍군요. 제 평생 이보다 아름다운 밀밭은 없었습니다.”
그는 실로 감탄했다.
임파스토 기법으로 표현된 밀밭은 당장이라도 바람에 넘실거릴 것 같았다.
하얀 하늘 아래 고귀하게 빛나는 황금의 땅.
유리 아킨페프는 순간 빈센트 반 고흐의 밀밭을 떠올렸다.
황금빛 밀밭과 스산한 밤하늘이 대조적이었던 <까마귀가 나는 밀밭>과 달리.
고훈의 밀밭은 새하얀 하늘에 구름이 일렁이고 있었다.
유리 아킨페프는 그것이 마치 곡창지대 우크라이나를 점령한 러시아의 미래처럼 느껴졌다.
“제목은.”
“황금이 녹아내린 땅.”
고훈이 퉁명스레 답했다.
“황금이 녹아내린 땅. 이 얼마나 좋은 울림입니까.”
유리 아킨페프가 두 손을 모았다.
‘그래. 쓸데없는 걱정이었다니까.’
장관을 안심시키고자 그러지 않은 척했으나 유리 아킨페프 또한 고훈이 불경한 그림을 제출하진 않을까 내심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훌륭한 작품을 내놓으니, <황금이 녹아내린 땅>은 고훈의 여러 작품 중에서도 수위에 꼽히는 <서리 밀밭>과도 비견될 작품이었다.
방태호가 <황금이 녹아내린 땅>을 서둘러 다시 포장했다.
유리 아킨페프가 의아해하자 방태호가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었다.
“황금색을 표현하기 위해 특별한 안료를 사용했습니다. 자외선이나 LED등에 오래 노출되면 변색이 되니 전시 전까지 각별히 신경 쓰셔야 합니다.”
“그런 안료가 있었습니까?”
방태호와 고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불필요한 대화는 단 한 마디도 나누고 싶지 않은 기색을 내비쳤다.
“알겠습니다. 전시 전까지 빛에 노출되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방태호가 <황금이 녹아내린 땅>을 유리 아킨페프에게 건넸다.
“그럼 발표식 전에 돌아오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예?”
“제게 그런 자리까지 나서야 하는 의무가 있나요?”
고훈이 날 선 반응을 보이자 유리 아킨페프가 당황했다.
“그래도 작가님 작품을 공개하는 자리니까요. 작품에 관련된 질문도 있을 테고.”
“필요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곧 떠날 거예요. 사람들이 몰리지 않는 길만 마련해 주세요.”
유리 아킨페프가 잠시 고민했다.
아쉽기는 했지만 저런 상태라면 인터뷰를 강요할 수 없을 듯했다.
작품도 확인했으니 이후 일은 원하는 대로 풀어주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니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유리 아킨페프가 직원들과 함께 대기실을 빠져나가자 고훈이 앙리를 재촉했다.
“일어나요. 바로 돌아갈 거니까.”
앙리 마르소는 대답하지 않고 아르센에게 시선을 주었다.
“깨끗합니다.”
도청 및 감시 수단이 없음을 확인한 앙리 마르소가 입을 열었다.
“쇼핑한다고 했잖아.”
“빨리 돌아가야 해요. 나중에 설명할 테니 일어나요.”
“왜.”
“위험하니까.”
“그럼 기다려.”
“위험하다고 하잖아요. 고집부리지 말아요. 파리로 돌아가야 해요.”
앙리 마르소가 다리를 꼬았다.
“파리보다 내 옆이 더 안전해. 허둥대지 말고 앉아.”
“앙리!”
고훈이 버럭 소리쳤다.
“내 그림 사려고 온 거면 잘못 생각했어요. 어차피 못 가져요.”
“왜.”
“그놈들이 내버려둘 리 없으니까.”
“역시 뭔가 있었어.”
앙리 마르소가 그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센, 마실 거.”
“네.”
아르센이 앙리의 분부를 받들어 휴대용 칵테일 제조 세트를 꺼내 음료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