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외전 25화
Golden Age
4. 황금이 녹아내린 땅(5)
[고훈-러시아 합의 체결]
[고훈 모스크바 간다]
[유리 아킨페프, “고훈 합류는 모스크바 국제 아트페어의 위상을 재확인한 일.”]
[러시아 국보급 문화재 100점 한국에 반환 추진. 이달 내 완료될 것]
[고훈 묵묵부답]
고훈이 모스크바 국제 아트페어에 참여한다는 소식은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몇 해 전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여 민간인을 학살한 전범국 러시아는 철저히 고립되어 있었다.
경제뿐만 아니라 문화에서도 철저히 제재받아 나라의 근간이 흔들리는 중이었다.
모스크바 국제 아트페어 또한 국제라는 단어만 포함되었을 뿐, 실상 자국 내 정치 선전 수단이었다.
그러한 행사에 현재 미술계를 대표하는 고훈이 참여한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훈아 ㅠㅠ 협박당한 거라면 제출작에 당근 그려줘 ㅠㅠ
└이게 말이 돼?
└ㅋㅋㅋㅋㅋ얼척 없네. 문화재 돌려받겠다고 전범국 행사에도 참가하네? 이러려고 델프트의 여인도 반대했음?
└일관성은 있네. 그깟 문화재가 뭐라고 사람보다 중요한가?
└고훈이 이럴 리가 없는데.
└뭔가 생각이 있겠지. 진짜 문화재 반환하는 것 때문에 가겠어?
└진짜 협박 당한 거 아냐?
└댓글 역겹네. 어제까지만 해도 문화재 돌려받아야 한다고 하던 애들이 이젠 참가한다고 ㅈㄹ이야.
└쟤들은 그냥 남 욕하고 싶은 거임. 그보다 훈이가 걱정되는데.
└그러게.
└어쩌면 진짜 저 문화재 돌려받으려고 저러는 건지도 모름.
└?
└[링크] [러시아 반환 문화재, 문화재 반환 재단과 한국 예술인 조합이 함께 선별]
└고훈이 문화재 반환 재단이랑 한국 예술인 조합하고 같이 반환 목록품 정했다고 함. 반드시 그것만은 돌려받아야 한다고.
└그만큼 중요한 거라는 말임?
└ㅇㅇ 사료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그렇대.
└문화재 반환 재단 인터뷰 내용 보면 러시아가 처음 11점 제안했고 더 이상 내줄 생각이 없었던 것 같음. 근데 훈이가 협상해서 최대한 많이 확보했대.
└장미래 뉴튜브 영상 보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차악을 선택한 거라고. 훈이는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거라고 너무 욕하지 말라면서 울먹이더라.
└아니 누가 그러라고 했냐고. 솔직히 난 문화재 뭐가 있는지도 모름.
└며칠 내내 그걸로 시비 터는 놈들이 태반이더만. 검색해 봐. 훈이 등 떠밀었던 놈들이 얼마나 많은지.
└책임감 때문에라도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듯.
└진짜 원망스럽다. 문화재 중요하지. 근데 진짜 어떻게 왜 중요한지도 모르면서 그냥 국보급이라니까 훈이한테 가져오라고 한 놈들이나, 그걸로 돈 벌 생각하는 놈들이나 진짜 원망스럽다.
└본인이 하기 싫었으면 안 했겠지ㅋㅋㅋㅋ 걱정 안 해도 된다. 고훈 이미 수백, 수천억 원 가지고 있다.
└위에 ㅂㅅ은 무시하고 솔직히 나도 무시하는 게 좋았다고 생각하는데.
└전국민의 반이 환수해 달라고 얘기하는데 그 압박감이 어떨지 상상이나 됨?
└훈이 두고 며칠째 싸웠잖아. 나 같아도 정신적으로 힘들었겠다.
└너무 허탈하네. 훈이가 지금까지 했던 일은 뭐가 되는데.
└그러게.
└다른 누구보다 훈이가 가장 힘들 거야.
“말도 안 돼.”
이클립스란 필명으로 활동한 비다 라바니도 고훈의 소식을 접했다.
믿기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현실을 부정했다.
“아, 고훈?”
그의 스승 뱅크스가 뒤를 지나치며 시큰둥하게 물었다.
“보셨어요?”
“봤지.”
“뭔가 잘못됐어요. 훈이가 그럴 리 없다고요.”
“글쎄.”
뱅크스가 위스키를 따랐다.
“그런 위치에 있으면 주변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어. 고훈도 예외는 아니야.”
“뱅크스!”
“바꿔 생각해 봐. 네가 고훈 입장이었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아?”
“…….”
“우리처럼 익명 뒤에 숨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시하자니 자국내 절반이 바라고 있는 일이야. 그럴 수 있겠어?”
뱅크스가 단숨에 잔을 비웠다.
“그림을 잘 그리고, 신망을 얻고, 돈이 많은 것을 제외하면 고훈도 평범한 사람이야. 문화재를 반환받을 유일한 기회를 저버리면 평생 원망받을 텐데 그럴 수 있겠어?”
“훈이는.”
“말했지. 평범한 사람이라고. 참가해서 받을 비난과 그러지 않았을 때 돌아올 원망 사이에서 나름의 답을 내놓은 거야.”
익명으로 활동하며 수많은 폭력과 싸워온 뱅크스는 누구보다도 고훈을 잘 이해했다.
“어느 쪽이든 미움 받을 거면 그 안에서 최선의 선택을 한 거지. 누가 러시아 상대로 국보급 문화재 100점을 돌려받을 수 있겠어. 대단한 거야.”
스승의 말이었지만 비다 라바니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아니에요.”
뱅크스가 비다 라바니를 노려보았다.
“너의 그런 점이 고훈을 몰아붙인다고 생각해 봤어?”
“네?”
“역사에 남을 예술가다.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화가다. 고훈을 그렇게 초인적인 존재로 인식하는 생각 자체가 그를 이 지경까지 몰아넣은 거라고.”
뱅크스는 대중이 고훈에게 너무나 가혹한 짐을 주었다고 보았다.
한 개인이 러시아라는 대국을 상대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고훈에게 해결 불가능한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응하지 않으면 않는 대로 참가하면 참가하는 대로 비난하니 그러한 생각이 그를 차악으로 몰아넣은 것이었다.
“우리가 왜 얼굴 감추고 활동하는지 잊은 건 아니지?”
“……네.”
이슬람 극단주의자, 러시아와 같은 전범국 등 여러 폭력과 저항할 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수단으로 가면을 썼다.
“그러면 우리라도 이해해야지.”
뱅크스의 말이 옳았다.
익명성을 이용해 러시아를 비판하고 있었지만 고훈은 상황이 달랐다.
지켜야 할 것이 너무도 많았고 책임질 일 또한 산적해 있었다.
하지만.
비다 라바니는 고훈이 보여주었던 기적을 여전히 가슴에 품고 있었다.
온 세상이 해바라기로 물들었던 그라면 분명 뭔가 다를 거라고.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기에 기적이란 단어가 탄생했음을 증명한 고훈이라면 분명 다른 생각이 있을 거라고 믿었다.
* * *
비난과 연민, 걱정과 환영 속에 모스크바 국제 아트페어 개최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러시아 연방은 고훈과의 약속을 지켜 국보급 문화재 100점을 대한민국에 반환했고 이는 또 한 번 큰 뉴스로 다뤄졌다.
-지금 러시아가 보낸 문화재 100점이 인천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화가 고훈이 모스크바 아트페어에 참가하기로 약속하며 반환된 문화재 중에는 신윤복의 풍속화와 청자 상감운룡문 매병 등 일명 국보급 문화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국내 언론사는 앞다투어 현장을 중계하고 나섰다.
-반환 목록 논의을 함께한 문화재 환수 재단과 한국 예술인 조합은 신라시대부터 조선 말까지 사료적 가치가 높은 문화재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문화재 반환 현장은 경찰 인력까지 대동되어 철저한 감시 속에 이뤄지고 있었다.
-덧붙여 이들은 해외 문화재 반환 사업이 시작된 이래 최대 성과라며 어려운 결단을 한 고훈에게 감사를 표하고 있습니다.
“후우.”
중계를 지켜보던 이인호 기자가 TV를 껐다.
온 나라가 축제 분위기였으나 그는 좀처럼 기뻐할 수 없었다.
분명 돈으로 환산하기 힘들 정도로 큰 성과였으나 고훈이 예술인으로서의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 얻었기에 한숨만 나왔다.
고훈이 어렸을 적부터 그를 지켜보았던 이인호는 모레로 다가온 모스크바 아트페어에 취재를 가야 할까 고민했다.
어쩌면 고훈 일생 가장 치욕적인 날이 될 수 있기에 그 모습을 차마 카메라에 담을 수 없었다.
그러는 한편 대의를 위해 고훈이 무엇을 희생했는지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도 들었다.
이인호는 생각을 정리하고자 인터넷에 접속해 문화재 반환에 관련한 여론을 살폈다.
“……지들 맘대로네.”
실제로 문화재가 반환되면서 국내 여론은 매우 긍정적으로 변화해 있었다.
고훈을 걱정하던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무슨 문화재가 왔는지, 어떤 가치가 있는지 등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한편 해외 반응은 그 어느 때보다도 날카로웠다.
[시든 해바라기]
[고훈의 선택에 유감을 표명한 유럽 미술계]
[캐롤라인 스트릭, “21세기 미술사 최고의 비극. 차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그를 위로한다.”]
[명예와 정의를 저버린 미술가]
“여기도 마찬가지고.”
세계 각국에서 기사가 올라왔지만 유독 유럽이 공격적이었다.
러시아와 대척하고 있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고훈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에 대해 알려주는 기사는 없었다.
해외 기사를 보던 이인호가 비행기 티켓과 여권을 챙겼다.
본인이라도 이 일을 사실 그대로 알려야 한다는 마음으로.
* * *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밥을 먹을 때도, 강의를 할 때도, 할아버지와 드라마를 볼 때도 항상 그 생각뿐이었다.
러시아의 의도대로 놀아날 수 없고 그렇다고 문화재 반환을 기대하는 수많은 이들을 저버릴 수도 없었다.
두 일은 서로를 물고 늘어졌고.
어느 쪽이든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넘쳐났다.
아무리 고민해도 답을 내릴 수 없어서 그때부터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했다.
그러니 답이 명확해졌다.
그 동안의 고민과 부담이 거짓말처럼 떨어져 나가고 붓을 쥔 손은 어느 때보다도 가볍고 경쾌했다.
아를에서 꿈을 키우던 그 시절로 돌아간 것마냥 자유로웠다.
밀짚모자를 쓰고 화구통과 이젤 캔버스를 짊어진 채 걷다 보면 어느덧 그곳에 도착했었다.
따사로운 태양의 은혜를 머금어 빛나는 밀밭.
사락사락 바람 따라 들리는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면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리곤 했다.
지평선에 이르러 푸른 하늘과 맞닿은 광활한 밀밭에 폭 안기고 싶었다.
황금이 녹아내린 듯한 그 풍요로움 속에서 잠들고 싶었다.
생명과 사랑을 듬뿍 찍어.
옛 마음 그대로 캔버스에 옮겼다.
햇빛으로 잉태된 신의 축복이 푸른 하늘 아래 저마다의 결실을 맺고 있었다.
기나긴 겨울을 겪고도.
새로이 생명을 머금은 그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