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428화 (428/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외전 24화

Golden Age

4. 황금이 녹아내린 땅(4)

청자 상감운룡문 매병에 이어 신윤복의 풍속화까지.

러시아가 하루에 하나씩 국보급 문화재를 공개하자 국내 여론이 둘로 나뉘었다.

문화재를 인질로 붙잡은 러시아를 비판하는 이들도 있고 지금이 아니면 기약할 수 없으니 타협을 해야 한다는 이들도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폭력과 타협할 수 없다, 문화재를 반환받아야 한다는 두 주장으로 나뉘어 싸우는 것처럼.

나 또한 신념과 책임감을 저울질하고 있다.

이 상황을 모른 척하면 갈등은 더더욱 심화될 것이다.

앙리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상황은 다를지라도 결단을 내려야 하는 입장만은 같다.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해. 정말로.’

시현이가 당부한 대로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할 때다.

고민은 충분히 했으니 이제 행동할 뿐이다.

“만나 볼게요.”

할아버지와 방태호가 고개를 돌렸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만나 보다니. 누굴?”

방태호가 물었다.

“유리 아킨페프요. 모스크바 아트페어 책임자라죠?”

“만나서 어쩌려고. 말로 설득될 놈들이 아니야.”

“이대로 무시할 순 없어요. 어느쪽이든 결정해야 해요.”

“문화재 받아야 한다는 사람들이 네 생각 한 번이라도 했을 것 같아? 러시아나 그런 사람들 때문에 책임감 가질 필요 없어.”

방태호는 항상 내 편이다.

지금껏 여러 일을 겪었지만 언제나 든든히 자리를 지켜주었다. 고개를 돌리면 언제든 그곳에 있어서 망설이지 않고 나아갈 수 있게 해주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인 걸 확인하니 용기가 난다.

“괜찮아요.”

“훈아!”

방태호가 간절히 날 불렀다.

“잘 생각해야 해. 자기 정권 지키려면 무슨 짓이든 할 놈들이야.”

“보는 눈이 있으니 절 어떻게 하진 못할 거예요.”

“그러진 못하겠지. 근데 참여 안 하면 우크라이나 포로 어떻게 하겠다면? 지금처럼 단호히 거절할 수 있어?”

“……그런 생각은 못 했어요.”

“그래! 상식이 안 통하는 놈들이라고.”

“아마 그런 생각은 러시아도 못 했을 것 같은데.”

사탄도 울고 갈 발상이다.

방태호가 착해서 다행이다.

“지금 농담할 때가 아니잖아. 정말 그럴 수도 있다니까?”

“너무 걱정 말아요. 생각이 있어요. 아무도 다치지 않을 거예요.”

방태호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훈아 혹시 배도빈 일화 생각하는 거라면 그만 둬. 걔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네가 그러도록 두겠어?”

베를린 필하모닉 악단주이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로 손꼽히는 배도빈이 홍콩에서 벌인 일은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그렇게 할 정도로 겁 없진 않아요. 지금도 무섭고.”

일단 내가 배도빈처럼 대담한 일을 할 수 있을지부터 의문이다.

“그러면 왜!”

“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방태호가 말을 잇지 못했다.

날 걱정해 주는 마음도, 상황이 불리한 것도 이해하지만 그럼에도 고집 부리는 날 어떻게 설득해야 좋을지 고민하는 듯하다.

“훈아.”

할아버지가 불렀다.

“네.”

“할애비는 네가 다치는 건 볼 수 없다. 곧 있으면 네 엄마 아빠 볼 텐데 내가 그 아이들을 무슨 면목으로 대하겠니.”

“…….”

“하지만 네가 한 사람의 미술가로.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람으로 행동하려 한다면 그 또한 말릴 수 없단다. 할애비 마음 알지?”

어렸을 적부터 그랬다.

모든 일에 답을 주지 않으시고 함께 고민하셨다.

내가 온전히 한 사람으로서 목표를 정하고 길을 선택해 걸어갈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럼요.”

“그럼 무슨 생각인지 얘기해 주면 좋겠구나.”

“그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해줄 생각은 없어요. 문화재를 돌려받고 싶기도 하고요.”

할아버지와 방태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만나서 얘기를 해봐야 할 것 같아요. 계획대로 안 되면 포기해야겠지만요.”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얘기를 해 봐. 어떻게 한다는 거야?”

“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어요. 그래야 하거든요.”

* * *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유리 아킨페프는 큰 코에 안경을 걸치다시피 낀 남자였다.

상당히 말라서 미소를 짓자 얇은 눈 주변에 주름이 많이 생겼다.

그가 내민 손을 잡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덕분에 만나 뵙지 않아도 될 분과 자리를 하게 되었네요.”

이 만남은 유리 아킨페프가 계획한 일이다.

불편하기 짝이 없는 자리라 불쾌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하하. 하기 싫은 일 중에는 꼭 해야 하는 일도 있죠.”

조롱하는 건가.

아무래도 이 자와는 끝내 척을 질 것 같다.

“그럼 식사를.”

“유쾌한 자리도 아닌데 용건만 나누죠.”

유리 아킨페프가 멈칫하더니 이내 미소 짓는다.

“좋습니다. 이미 알고 계실 듯하지만 우리 러시아는 작가님이 모스크바 국제 아트페어에 참가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 대가로 문화재를 돌려준다고 하셨고요.”

내게는 말도 없이 마치 내가 참가하기로 결정한 것마냥 기사를 냈다.

“네. 아무래도 해방 전쟁 이후 양국간의 첫 교류다 보니 이보다 기쁜 소식이 또 있겠습니까. 해서 일을 서두르다 보니 사소한 착오가 있었습니다. 이해해 주시죠.”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잘도 늘어놓는다.

한국 사람들의 여론을 갈라놓아서 내게 압박을 줄 계산이었겠지.

“러시아가 보유한 한국 문화재 전부를 반환하세요.”

유리 아킨페프의 가는 눈이 잠시나마 크게 떠졌다.

“글쎄요. 아마 이번 일로 모든 문화재를 드리긴 힘듭니다. 작가님께서도 무리한 조건이라는 건 알고 계실 텐데 편히 말씀하시죠.”

“떠보는 것처럼 보입니까?”

“이런. 정말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난처하게 되었습니다.”

유리 아킨페프가 고민하는 척 연기했다.

“작가님께서 확답만 주신다면 노력할 수도 있죠. 우선 청자 상감운룡문 매병이라든가 신윤복의 풍속화 등을 드리고 나머지는 추후에 조절해 보는 게 어떠십니까.”

“…….”

“어차피 이번 일을 계기로 러한이 다시 교류를 시작하면 언젠가는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워낙 큰 일이니 천천히 얘기 나누시죠.”

말을 교묘하게 하는 사람이다.

지금 당장은 모든 문화재를 돌려줄 수 없다고 말하나 여지를 남겨둔다.

그 여지가 결코 이뤄지지 않도록 말이다.

“실망입니다.”

조금은 흥분해 주길 바랐지만 유리 아킨페프는 이런 자리에 나올 만한 사람답게 평정심을 유지했다.

“수천 점이나 되는 문화재를 드리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오해하고 계시네요.”

“어떤?”

“주시는 일이 아니라 반환입니다.”

조금 전부터 거슬리던 단어를 정정했다.

“……그렇네요.”

순순히 물러나는 걸 보니 강하게 나서는 척해도 되도록 내 심기를 건들고 싶진 않은 듯하다.

어떻게든 날 데려가고 싶단 뜻인데 그렇다면 이 협상의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다.

“또 하나 오해하셨습니다. 이 자리에 나오신 분이 문화재 반환에 대하여 권한이 없으신 듯해서 실망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하. 그렇진 않습니다.”

자존심을 건드니 반응이 온다.

“그걸 제가 어떻게 믿죠?”

대화 도중 그는 기존에 언론으로 보도된 내용 이외의 것은 말하지 않았다.

그에게 권한이 없음을 지적하면 어떻게든 대응할 거고 만약 전권을 위임받은 게 사실이라면 구워 삶을 수 있다.

날 데려가고 싶으니까.

“이거 대화가 조금 딱딱해서 오해를 하신 듯합니다. 전부를 드릴 순 없으나.”

“…….”

“반환할 순 없지만 현실적인 조건이라면 작가님의 말씀을 최대한 맞춰드리려 합니다.”

시선을 주자 방태호가 문화재 목록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이건.”

“이번 일로 반환받길 바라는 문화재 목록입니다. 확인해 보시죠.”

러시아가 보유하고 있는 한국 문화재 중 중요도를 선별해서 총 100점을 정리해 왔다.

모든 문화재를 돌려받고 싶지만 러시아가 그럴 리 없기에 이것만이라도 지키고 싶어서 국내 전문가들과 함께 논의를 거쳐 완성한 목록이다.

이것만은 반환받아야 한다.

“잠시.”

유리 아킨페프가 보좌진을 대동해 협상 테이블을 벗어났다.

의논할 거리가 많을 것이다.

“후우.”

긴장을 풀고자 숨을 길게 내쉬니 방태호가 씩 웃는다.

“이젠 내가 없어도 될 것 같은데?”

“무슨 뜻이에요?”

“옆에서 보는데 내가 다 무섭더라. 어디서 배웠어?”

“아저씨 보고요.”

어렸을 적부터 방태호가 계약을 어떻게 체결하고, 상대를 어찌 다루는지 봐 왔다.

상황도 다르고 방식도 다르지만 어깨 넘어로 배운 것이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분위기 보니까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데. 정말 괜찮겠어?”

“네.”

이 사건이 일어난 이후로 줄곧 고민했다.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기도 했고 나 또한 마음을 다졌으니 후회는 없다.

지금은 망설여서는 안 된다.

선택보다 그 길을 걷는 일이 더욱 고되니까.

긴장한 탓에 시계 소리마저 크게 들릴 즈음 유리 아킨페프가 방으로 돌아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눈을 마주하니 씩 웃는다.

“조건이 상당해서 고민이 됩니다. 물론 직권으로 처리할 수도 있지만.”

어지간히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반대로 제가 여쭙고 싶습니다. 이런 조건을 준비하실 정도면 모스크바 국제 아트페어에 참가하실 의향이 있다고 봐도 되겠습니까?”

“개최일 전에 한국에 도착하지 않으면 당일이라도 예정을 변경할 겁니다.”

“……이야기가 빠르게 진행되겠군요.”

유리 아킨페프가 주름 진 미소를 보였다.

“받아들이겠습니다.”

소파에 등을 대는 모습이 마치 내게 생색이라도 내는 듯하다.

“개최일인 8월 9일이 되기 전에 여기 적힌 문화재 100점을 반환하도록 하죠. 다만.”

뭔가를 더 챙길 생각인가 보다.

“제출하실 작품이 해바라기는 아니었으면 합니다.”

“…….”

“아실까 모르겠지만 해바라기는 우크라이나의 국화인데 아무래도 모양새가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내 속셈은 이미 간파했다는 듯 눈빛이 날카롭다.

“우연히도 작가님의 상징 같은 꽃이니 혹시나 싶어 노파심에 당부 드립니다.”

허튼 수작 부리지 말라는 뜻이다.

“계약서 꺼내 놓으시죠.”

유리 아킨페프의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 * *

“징하다. 징해.”

계약을 마치고 나오자 방태호가 진절머리를 쳤다.

“해바라기 그리지 말라고 콕 집어 얘기할 줄 누가 알았어? 독하다. 독해.”

내가 보기엔 독하기로는 방태호가 한 수 위다.

방태호가 말했던 대로 우크라이나 포로를 죽이겠다고 나왔으면 나로서도 어찌 해볼 방도가 없으니까.

“괜찮아요.”

“정말이야?”

“네.”

“다른 방법이 있다니까 다행이긴 한데. 치밀하다. 저 인간들도 너 데려가지 못하면 큰일 날 테니 당연하겠지만.”

“그러게요. 설마 해바라기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정말 해바라기 그리려고 했어?”

“네.”

방태호가 입을 크게 벌렸다.

“그럼 어떡해. 안 한다고 했잖아.”

“마음 단단히 먹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괜찮아요.”

당하고만 있진 않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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